살인구렁(1)
어메나라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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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9 20:22
살인 구렁
부제:기독교를 기어 넘어서
<1>
옛날 서방 이역 어느 나라에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 거칠어진 헹뎅그렁하게 넓은 땅이 있었습니다. 드문드문 수풀이나 관목 더미 따위가 수부룩한 곳도 있긴 있었지만, 겨우 민대머리를 면한 널감의 개비지 덮개처럼 애처롭고, 어쩌다 소슬바람까지 불어오는 날엔 가슴 짜안히 미어지게 호젓하여, 도래 마을 사람들의 발길은커녕 초식 동물들의 자취마저 뜸해진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황무지를 지나 동방으로 향하다가, 서털구털한 나그네들은 감쪽같이 없어졌다가는 그만 죽임을 당한다는 무시무시한 날나발까지 퍼져 있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급기야 원수가 진 이웃 나라에까지 퍼지자, 제 몸과 제 가문과 제 고향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외곬지고 고지식한 윗분들이 그 개털 같은 자존심에 흠이 갈까 적이 두려워, 허구헌날 이름난 오래의 처녀나 부인네들을 후리고 다니는 악명으로 그 시대를 풍미하고 있던 으뜸순라꾼을 불러 짬이 생기면 한 번 거시기해 보라는 지시 시늉을 내보였습니다. 이에 얼바람난 도시 계집들 상내 암내에 얼이 썩어 어리석은 으뜸순라꾼이라 하는 사내가 백성들 속여 먹기에 얼이 나가서 얼이 빠진 얼치기 부림꾼들을 부려 제 임무를 싱겁게 날치 사냥으로 돌라방치고 돌아와선 황무지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았고, 앞으로도 생기지 않으니, 걱정할 아무 거시기는 없을 것이라고 떠죽거렸습니다.
이러한 윗분들의 날거짓말에는 귓말뚝이 박혀 속지 않는 백성들이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귀에 쇠말뚝을 서너 개 박아 놓고 무시하려 해도 들리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황무지 근처에선 한밤중이 되면 설핀 바람 소리 사이로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는 사람 목소리가 귀신이 출몰하듯 튀어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나부대다가 길 잃고 황무지를 헤매던 양치기들도 한 번은 어떤 세 놈이 얼크러져 드잡이질하다가 게중 한 놈이 등 뼈골을 훑는 듯한 싸늘한 비명을 지르고 땅 속으로 푹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습니다. 흉흉한 날나발이 나라 골골샅샅이 퍼지자 황무지는 그야말로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곳으로 변해 갔고, 세상 흘러가는 판국에 귀 막고 눈 막고 지내자는 외돌톨이 나그네들이나, 지금부터 이 짧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땅꼬마만 빼놓고는 아무도 오도깨비 같은 그곳 근처에도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높고 툭 튀어 나온 앞짱구이마에 낮은 콧등 밑으로 썰면 두어 근 나갈 만치 두꺼운 입술-이것만 보더라도 이 땅꼬마가 이쁜 뽄새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는 것을 다 알 줄 압니다. 거기다 타고나길 머리통이 크낙한데 어쩌자고 팔다리는 졸아붙은 듯 작아 말 그대로 아뿔싸 가분수입니다. 두 팔은 짤막, 두 다린 몽똑한데 까치가 백 마리 쯤 둥지를 틀었는지 부수수하고 수박만한 머리통이 걸음에 따라 꺼덕꺼덕하는 품이 애간장 조리듯이 아슬아슬해 보입니다만, 동쪽을 향해 고개를 쳐들어 올릴 때의 샛별처럼 초롱초롱한 두 눈빛을 보면 막혔던 체증이 뚫리듯 통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땅꼬마는 어버이의 얼굴조차 모릅니다. 걸음발이 들기 시작하면서 도드라지는 몸맨두리가 여느 귀염성스런 얼뚱애기들과는 차이가 져서 따돌림당해 젖동냥이나마 양껏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잠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릿간에 몰래 숨어 들어가 돼지들과 함께 잤고, 배고플 땐 도야지 새끼들 틈에서 퉁퉁 불은 젖꼭지를 흠빨았습니다. 어느 날 키가 작은 코스모스처럼 자라자 땅꼬마는 무작정 해가 뜨는 곳을 향하여 걷기로 오골차게 마음먹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그야말로 뻘건 몸뚱아리 하나뿐이었습니다만, 꼬마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새벽이 오면 그 뜨거운 얼굴의 미소를 끼얹어주며 환하게 다가오는 햇님이 있었기에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예배당에 가거나 먹을거리를 푸지게 늘어놓은 장터에서 희희낙락하며 군것질에 세마리 팔린 또래의 아이들을 보더라도 그닥 애운한 맘이 들지 않았습니다. 땅꼬마는 땅벌레나 나무에 붙은 곤충들을 잡아먹으며 해가 솟는 방향으로 방향으로 내처 걸어갔습니다. 가다가 쓰러지면 거적잠을 자고 비오는 날에는 나무 밑에서 앉은잠을 잤습니다. 짐승들이 많은 곳에서는 괭이잠을 자고, 운 좋게도 재워 주는 헛간이 있으면 발편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꼬마는 잠들면 꿈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도 걸어 발덧이 나는 날도 있고, 지쳐 쓰러져 괴로울 땐 그 두꺼운 입술을 사려문 적도 있었지만, 꼬마는 모든 소망을 단 하나의 소망 안으로 쏟아 부었기 때문에, 그 소망 밖의 어떤 생각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몰랐고, 절간도 몰랐고, 기도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가정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꼬마는 언제나 씩씩하게 그 샛별 같은 눈망울을 설레면서 삶이 꼬마에게 마련해 놓은 진수성찬을 바람처럼 들이마시며 걸어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레 소리가 하늘땅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밤이었습니다. 밤거미는 황무지를 진작에 반지기 넘게 걸터먹었고, 이런 판국에 달걀알처럼 굵은 빗발이 우두둑 떨어져 땅꼬마는 낭패도 이런 낭패는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기도할 줄도 모르고, 절간을 모르니 나무아미타불도 손방이고, 생각나는 어버이의 모습 조각도 없으니, 이 두려운 밤길을 헤매면서도 꼬마는 그저 제 맨몸뚱아리밖에는 믿을 게 없는 안타까운 형편이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돌아보려고 해도 휘몰아치는 바람에 몸을 실고 날아오는 알굵은 빗발에 눈은 이미 쉴새없이 내리맞아 충혈된 데다가 온몸은 벌써 녹작지근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땅꼬마는 이 폭풍우을 견디고 나면 다른 날에는 이런 밤을 더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으리라 보배운 바가 있어 한 오리도 야코죽지 않았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앙바듬치며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딱하게도 이태 전에 얻어 입은 낡은 바지가 빗물을 먹고 말아 배허벅지가 쓸리는지 아릿해지고, 물에 젖은 솜뭉치나 다름없는 몸을 끌고 가기에도 지쳐 정신이 아질아질해진 통에 고만 잠을 자야겠다, 잠을 자고 싶다, 돼지젖꼭지를 흠빨 때 그 보드라운 배구레에 머리를 누인 때처럼 세상모르게 햇님이 껄걸 웃으며 떠오를 때까지만이라도 잠을 자련다, 하며 거의 자포자포한 마음으로 비라도 그을 데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지막 절망이 흔히 착한 사람들에게 보물처럼 숨겨 놓는 얄량셩 행운인지, 내리 꽂히는 어두운 빗발 속에서 콩알탄처럼 터졌다 꺼졌다 술래잡기하는 듯한 불빛을 본 것만 같았습니다.
허깨비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트막한 지붕 아래 자그마한 오두막이었습니다. 창틀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땅꼬마는 애오라지 제힘으로만 살아온 사람만이 갖게 되는 다부진 경계심으로 발맘발맘 집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창틀 밑에 몸을 웅크렸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안쪽으로 눈길을 무르춤 던졌습니다. 더그매에 매달린 희미한 불빛 아래로 사내 둘과 나쎄 먹은 아줌마가 보였습니다. 사내들 중 하나는 외꾸눈이고 다른 하나는 앙가슴에 반토막만한 팔 하나가 더 붙어 있었습니다. 가슴에서 튀어나온 그 팔의 끄트머리에는 손 어리비슷한데 가락이라고 해봐야 엄지손가락만하게 뭉툭한 것 세 개만 붙어 있고, 그 끝에서 튀어나온 손톱은 삼지창처럼 길었습니다. 그걸 알아보고 꼬마는 그만 심장이 땅바닥으로 덜커덕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무서워졌습니다. 그래 자기도 모르게 꼬마는 허걱 들숨이 목에 걸려 입을 손으로 가리고 캑캑대다가 어쩔꺼나 머리를 창틀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창문 옆의 나무문이 덜컥 열리고, 한쪽 눈의 사내가 반쪽 남은 눈을 부릅뜨고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꼬마는 이제껏 계곡의 벼랑길이나 산 너덜을 걸으면서 바위덩이만한 들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나 퍼덕거리는 날짐승들이 우짖는 소리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 보름보기의 빽-하는 목소리만큼 오금 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의 여운에는 세상 모든 것을 슬미워하는 사람 특유의 저주가 돼지똥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애꾸눈이는 꼬마의 갸녀린 어깨를 우악스런 손아귀로 움켜잡더니 끌어당겨 집 안으로 처민 다음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깥을 둘러보고는 문을 쾅하고 닫았습니다. 그 문이 닫히자 희한하게도 빗소리가 뚝 끊어진 듯 들리지 않아, 꼬마는 전혀 낯선 곳으로 순식간에 옮겨진 것 처럼 어리벙벙해졌습니다.
이러고 있는데, 잠시 꼬마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다섯 개의 눈이 동시에 깜박하더니, 세 사람은 안쪽으로 통하는 문 근처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우세두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틈에 꼬마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바닥에는 모래가 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쪽으로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모서리에는 맹꽁이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여자가 꼬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꼬마의 머릿속으론 나이 먹은 여자 옆에 서서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는 동가슴에 팔이 난 사나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팔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산망스럽게 움직이며 뾰족한 손톱질을 연신 해대고 있었습니다.
“너 혼자니” 허리까지 회색 머리가 헤풀어진 여자가 물었습니다.
꼬마는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 있었습니다.
“너 정말 혼자냐?”
이번에도 그 큰 눈망울만 굴렸습니다.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여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죽 훑어보고 나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다정하게 들리는 그 말 속에는 어떠한 장애물이 앞길을 가로막든 그것을 까부수고 나갈 수밖에 없는 맹신스런 독종들의 비정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가슴에 팔 달린 사내가 꼬마를 찢어진 커튼이 비맞은 나뭇잎처럼 매달려 있고 깜부기불조차 없는 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문을 닫기 전에 바깥의 불빛으로 본 가슴의 팔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데도 걸리는 거라면 그게 뭐든 움켜잡아 조여 멱통을 끊고 말겠다는 악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면바로 문이 닫히자 우릿간 같은 방 안은 갈라진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몇 오리의 빛살 말고는 깜깜나라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