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series 25 : 베토벤 8번 -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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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25 : 베토벤 8번 -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로?

(ㅡ.ㅡ) 0 2,929 2003.10.07 16:47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9월04일(월) 05시27분44초 KDT
  제 목(Title): 베토벤 8번 -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전원교향곡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 클로드 드뷔시


1989년이었을거다. 의대 오케스트라 OB인 MPO(Medical Philharmonic Orchestra)의

창단 연주회.


의사들이 대부분인 단원들은 연습 시간에 맞춰 출석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출석률

이래야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이러니 연습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연주회

날까지 악보가 깨끗한 사람이 태반이었으니 (제대로 연습을 했다면 악보는 지휘자의

갖가지 지시 사항으로 지저분해야 한다.) 연주회가 시작되면 어떤 소리가 날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위기 상황. 이런 속에서도 고참 선배님들께선 '우리는 전통적

으로 실전에 강해...'라며 마지막 리허설 직전까지 분장실에서 마이티만 치고

계셨다.


리허설이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데 정형외과 의사인 어느 선배님께서 부르시는

거다.

"민형이 넌 악보에 잘 적어 놨지?"

"예..." (약간 불안)

"난 이렇게 깨끗하거든... 그러니까 나하고 악보 바꾸자. 넌 다 외었지?"

으으... 후배가 무슨 힘이 있겠나. 선배님의 깨끗하다 못해 손을 베일 정도로 날이

선 빳빳한 새 악보를 받아들었다.


연주회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정말 실전에 강한 사람들인지 어려운 곳은 적당히

뭉개면서 잘도 넘어간다. staire도 제 1 바이올린 말석에 앉아 기억을 더듬어가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곡. 베토벤의 교향곡 8번 4악장만 남았다.

이 4악장은 무지무지 빠르고 복잡하다. 수시로 반복되는 3연음과 8분음표... 잠시

한눈 팔다간 놓치고 만다. 한 번 놓치면 다시 템포를 잡아 끼어들 틈이 별로 없는

것도 문제다. 이래저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거다.


드디어 4악장도 거의 끝나고 이제 마지막 한 페이지만 남았다. 3마디 쉬는 사이에

잽싸게 악보를 휙 넘기고서... 앗!!! 이게 웬 일... 마지막 한 페이지가 감쪽같이

떨어져 나간 거다. 악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남은 건 허연 백지 뿐. 아무리 연습

안 하는 선배라지만 이런 정도일 줄이야...


딴 생각 하고 있을 틈이 없다. 4악장 마지막 부분은 한껏 화려하게 부풀며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악보가 없다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는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앞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쫓아갈 밖에.


격렬한 화음으로 4악장이 끝났다.

'휴... 정말 진땀 뺐네... 어쨌든 끝나서 다행이야...'

간신히 숨을 돌린 staire는  지휘자가 시키는 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몇 차례

쑥스러운 박수를 받았고...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도 없는 청중들의 앵콜

요청에 못 이긴 지휘자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앵콜 하지요 뭐... 4악장 후반부... 자아, 준비..."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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