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구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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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구렁2

어메나라 2 3,403 2004.03.30 22:49
부제 : 기독교를 기어 넘어서

<2>


축축한 옷을 입은 채 을씨년스런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곯아떨어진 시쳇잠에서부터인지 자루가 큼지막한 사냥용 칼로 긴 장막을 가로 야짓 찢는 듯 제발 고만 해줬으면 싶은데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비명소리가 개비지 속을 메아리치다 끝나기가 무섭게 땅꼬마는 발딱 일어났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겨운 새소리나 짐승의 울부짖음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드넓은 초원이나 벌판이 아니었습니다. 땅꼬마는 아직도 잠이 한 덩어리나 달라붙어 있는 그 큰 머리통을 주억거리며 맑은 기억이 어서 도드라지길 기다렸습니다. 이제껏 이런 일을 겪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때박 앞쪽에 갈라진 문틈을 뚫고 들어온 몇 오리의 빛살이 여러 가닥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누워 있는 빛살 끄트머리에서 무언가 반짝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땅꼬마는 걸어가 그 반짝이는 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올려 문틈의 빛살에 비쳐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반짝이는 것 속에서 아주 흉측스럽게 생긴 얼굴 하나가 보였습니다. 순간적으로 땅꼬마는 흑 하다가 들숨에 체하고 말았습니다. 땅꼬마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두근거렸습니다. 아까 본 앙가슴에 몽뚝한 팔이 달린 이상한 아저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그 반짝이는 것 속에 자신을 노려보았던 것입니다. 땅꼬마는 그 반짝이는 것을 두고 왼쪽으로 돌아서 갈라진 문틈에 눈을 대고 밖을 가늠해 보았습니다. 커다란 상자 위에는 싯누렇게 빛나는 돌덩이만한 것들이 뭉텅뭉텅 쌓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머리가 허리까지 긴 늙은 여자가 무어라고 지껄이는 데 땅꼬마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땅꼬마는 사람의 말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알고 있는 것은 짐승이나 꽃, 땅이나 하늘의 말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말 없이 전해지는 말들이었습니다. 직선처럼 곧고 맑은 물처럼 순간에서 순간으로 옮겨지는 말들이었습니다. 땅꼬마에겐 사람의 말이 돼지의 꿀꿀거리는 소리들보다 더 거북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안 하는 척 하면서 하려고 하니까 부자연스럽게 들린다는 것을 땅꼬마는 몰랐습니다. 늙으데기 여자가 뭐라고뭐라고 입술을 씨불랑거리면서 얘기하니까 애꾸눈 사내가 그 싯누런 돌덩이들을 보자기에 싸더니 문을 열고 휙 나가버렸습니다. 그러자 가슴에 팔이 돋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땅꼬마가 있는 쪽으로 눈초리를 쏘아붙였습니다. 그 눈초리와 마주친 땅꼬마는 덜컥 여기를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상자가 들썩거리면서 가로 마구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가슴에 팔이 돋은 사내가 어디서 났는지 커다란 도낏등으로 상자를 쿵하고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상자의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이제는 더 생게망게하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땅꼬마는 침대에 올라가서 찢어진 커튼 뒤의 삭아 바삭이는 창틀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숨까지 멈춘 채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주저하는 사이, 꼭 커다란 들고양이가 마지막으로 토끼의 숨통을 물기 직전에 질러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땅꼬마는 냅다 뛰었습니다. 숨이 턱에 걸릴 때까지 뛰어 이제 못 뛰겠다는 못난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등뒤에서부터 맹렬하게 달려드는 개들의 악귀 같은 울부짖음이 끈적한 거미줄처럼 들려왔습니다. 땅꼬마는 그 짧은 다리를 돼지젖 먹던 힘을 발휘하여 뛰는 것 외에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땅꼬마는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뛰면서 자신이 지금 왜 뛰는지는 모르도록 뛰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다리가 짧아 아무리 재게 발을 놀려도 같은 또래들의 반지기 넘게 달렸을까요, 하늘땅도 자지리 무심하게도 등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개의 고약한 입김이 마악 끼얹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발짝이면 한 뼘이면 아뿔싸 달려드는 사자만한 사냥개의 날카롭게 충혈된 어금니에 뒷덜미가 너덜너덜해지고 말 숨가쁜 때박, 갑자기 소년은 땅 속으로 푹 꼬꾸라졌습니다. 그리곤 정신을 잃었습니다.


땅꼬마는 두런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날이 밝았는지 희부염한 빛이 구렁 속에 남실거렸습니다. 그 물결치는 옅은 빛 속에서 반짝하는 무엇, 어젯밤 도망쳐 나오기 직전에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무언가가 언뜻 보였던 그 요상한 물건 같은 게 뼈다귀들 틈에서 보였습니다. 가슴뼈가 쌓여져 있다가 땅꼬마가 떨어지면서 재수 사납게도 죽은 사람들의 뼈들이 부서진 모양입니다. 땅꼬마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슬며시 고개를 바투 수그리고 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것이 어쩐 일인지… 접때 그 괴물이 또 나타났습니다. 땅꼬마는 꾸-꿀- 악을 치며 그것을 버석이는 흙벽에 들입다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일개미가 뽕나무 잎을 한 바퀴 다 돌 때쯤 해서 나들개처럼 쿵쾅대는 가슴이 진정되자 자력에 이끌리듯 그것을 다시 집어 들고는 표면에 묻은 뼛가루들을 옷소매로 매끄러운 표면이 나타날 때까지 문지르고, 슬며시 그 괴물이 또 나타나나 하고 고개를 수그렸습니다. 몇 번이고 이런 동작을 반복하고 나서야 땅꼬마는 그 괴물의 정체가 무언지 어려풋이 알 것도 같았습니다.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얼굴이 바로 그 미지의 괴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물론 아니려니와 돼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얼굴과 돼지 낯짝을 잘 버무려 섞는다고 해도 그런 괴물스런 얼굴이 나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곳이 있다면, 또 그곳에서 굶주려 사는 아귀라는 것이 있다면, 그 천 년 넘지게 아귀로 살아온 것이 천 년을 하루 삼아 지옥에서 살아 온 지네나 뭐 그런 징그러운 벌레와 어울리다 새끼쳐 나온 그런 괴물보다 웃길이면 웃길이지 전혀 처지지 않는 그런 몰꼴이었습니다. 그때서야 땅꼬마는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빗자루질을 하며 내쫓고, 아이들은 돌을 던지며 저희들끼리 뭐가 좋은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짓까불고, 그리고 또 오두막집에서 자신을 본 외눈박이 사내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놀란 까닭을 감 짚었습니다.


그새 구렁 위에서는 악다구니치는 늙은 여자의 갈라지고 쉬어빠진 음성이 게사니처럼 울렸습니다. 밧줄이 내려왔습니다. 땅꼬마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그 밧줄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밧줄은 설렁설렁 올라가며 땅꼬마가 구렁에서 나오자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의 탄성과 혐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에 갇힌 채 땅꼬마는 마을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세 개의 나무판이 삼각뿔을 이룬 꼭대기에는 커다란 칼날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곧장 창칼을 들고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땅꼬마를 끌어내고는 나무판 위에 눕힌 다음에 짧은 사지가 꼼짝달싹도 할 수 없을 만큼 살 속 깊이 동앗줄을 꽁꽁 동여맸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무판에 반원 모양으로 파인 데에다 목 깊숙이 넣고는 지레 겁먹어 꿈찔하다가 혹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판과 함께 또 한 번 묶었습니다. 준비가 끝나자 높은 연단에 올라간 으뜸순라꾼이 뭐라고뭐라고 씨불랑거리자 이어서 요란한 볼꾼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지고 어제 본 외눈박이 사내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땅꼬마는 그제서야 생각난 듯 마주 누운 푸른 하늘에 눈길을 고정했습니다.


때는 분명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칼날 위 저 높은 곳 하늘꼭대기에서 햇님이 장글장글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퍼붓어 주었습니다. 그 때박 조각생각들이 구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돼지가 자신에게 젖을 물려주었던 이유와 사람들이 자신을 슬미워하는 이유, 자신이 그렇게도 햇님을 그리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땅꼬마는 모든 사람들이 내나 죽을 수밖에 없으며, 죽으면서도 결국은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햇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은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죽는 것은 어쩌면 햇님의 자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북소리가 울리다 말고 나팔 소리가 울리다 말고 사람들이 떠들다 만 소리가 한데 모여 갑자기 구렁 속으로 처박혀 버린 듯 절대 조요한 순간에 땅꼬마는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장글장글하게 내리쬐는 햇볕의소리를 들었습니다. 곧이어서 칼날이 공중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팽팽하게 꼬여 있던 줄이 휘리릭 풀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칼날이 더할 나위 없는 빠르기로 내리떨어져 그 짧은 목은 제대로 겨냥하지 못해 그만 턱주가리 위를 두부 자르듯 갈랐습니다. 순간적으로 멈추어져 있던 사람들의 숨소리가 일시에 터져나오면서, 안도와 위로와 올적의 벅찬 희망을 기리는 환호성이, 끓는 돼지 기름 솥단지 속으로 잘려 들어간 땅꼬마의 귓속으로 언제까지나 들려왔습니다.


<3>


공개 처형이 있고 난 다음부터 더는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밤에 길 잃은 목동이 그 늙은 노파의 집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려고 문기척을 내도 아무런 대꾸가 없어 쭈삣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목동의 눈 안으로 들어온 광경은 무서울이만치 처연하고 섬찟했습니다. 늙은 여자는 높이 솟은 대들보에 긴 회색 머리칼로 목을 두 번 세 번 칭칭 매단 채 죽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뱃가죽은 어린애가 장난 치듯이 요리조리 그어댄 칼막질로 파헤쳐진 듯 뻘건 내장은 주룩주룩 흘러 나와 있고, 그 밑으로는 피가 한 사발씩이나 고여 있었습니다. 또 상자 옆에서는 두 사내가 서로 얼굴을 대일 듯이 마주 본 채 서 있었는데, 가슴에서 돋은 짧은 팔이 외퉁이의 남은 한 눈을 뚫고 나와 꼭뒤 위까지 삼지창 같은 손톱 세 개가 피에 물든 채 튀어 나와 있었고, 애꾸눈이 든 국 주걱은 상대의 배때기를 하많게 긁어댔는지 주걱끝이 닳아 있는 데다, 그 안의 내장은 찢어진 커튼처럼 사타구리 앞에서 흐물 출렁거리며 아직도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이 황무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나 상인들의 입길을 타고서 유난스레 뜨거운 날 정오녘에는 대가리 없이 거무칙칙한 뭉치 같은 것이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얼렁쑬렁 공중제비를 돌다가는 마치 햇볕이 짱짱대는 듯한 소리를 내고는 사라지고 사라진다는 날나발이 퍼져나갔습니다.

Comments

호감을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반기련에서 재밌게 놀아 봅시다.
투박하고 질긴 그러면서도 섬세한 단어들을 이렇게 한 줄에 꿰어 보배로 만드시는 님의 글을 보고 저의 글재주 없음을 탄식합니다...견문을 넓혀 주셔서 새삼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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