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시리즈 14 : 공포의 베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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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시리즈 14 : 공포의 베팅

(ㅡ.ㅡ) 0 3,354 2003.10.07 16:33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5월18일(수) 08시02분20초 KD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14 : 공포의 베팅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습니다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세요

                        -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베팅 - bedside teaching을 이렇게 부른다 - 이 항상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환자

한 사람을 선택해서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임상 실기를 배우고 그동안의 수업 성과를

채점하는... 내과와 소아과의 필수 과정이다. 그렇지만 만일 담당교수가 최규완,

이정상, 방영주, 민경업, 고광욱, 홍창의, 안효섭... 선생님인 경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오늘은 의대 시리즈 1편의 주인공 '재수 없는' 윤경이의 베팅날. 역시 운수가

사납다. 이정상 교수님께 걸렸으니...


이정상 교수님은 내과의 대표적인 냉혈한... 무시무시한 외모에 걸맞게 학생들을

사정없이 두들기시는 편이다. 신혼여행길에도 내과책 'Harrison'을 들고 가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긴 해리슨(불어로는 아리송...)을 읽으시며 '아니... 이렇게

훌륭한 책이...'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는 다소 인간적인(?) 전설도 있긴

하지만...


첫 주에 최규완 교수님 베팅에서 늘씬하게 두들겨맞은 staire만이 느긋할 뿐,

실습생들은 분주하다. (최규완 교수님은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의 주치의를 지내신

꼬장꼬장한 양반... 이분의 베팅도 살기가 흐른다.) 윤경이 혼자서는 역부족이기에

온 실습조가 총동원되어 베팅 준비를 하는 거다. 재준이는 3시간 간격으로 환자의

혈압, 호흡수, 맥박수, 체온을 재어 정리하고 한성이는 차트를 요약, 노트한다.

윤경이는 주로 이론적인 질문을 받을 것에 대비, 교수님의 애독서인 '해리슨'을

며칠째 이잡듯이 뒤졌고...


드디어 약속시간... 멀리서 저승사자같은 구두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윤경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교수님의 심기가 좀 불편하신 듯해서 병동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교수님께서 staire를 보시는 순간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진다. (하긴... 원래 좀

험악하긴 하다.) 아침에 병동 복도에서 staire는 이정상 교수님과 마주쳤는데

먼발치에서 교수님께서는 staire를 민헌기 교수님 (이 분은 박대통령의 주치의셨다)

으로 착각, 공손히 인사를 하시는 참사가 발생했던 거다...


애써 외면하는 staire를 잠시 노려보시던 교수님은 윤경이를 향해 차갑게 한 마디를

던지신다.

"발표 시작해..."

윤경이는 며칠밤을 새워 준비한 환자의 리포트를 읽어내려갔다. 여학생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리포트... 이정상 교수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신 채 듣고

계셨다.


발표가 끝나자 갑자기 교수님이 일어서셨다.

"내과 실습생 치고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군. 직접 관찰, 조사한거야?"

물론 아니지...  그 리포트를 위해 땀을 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닌걸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윤경인 빵점이다.

"예..."

자신없는 윤경이의 목소리... 교수님의 얼굴에 냉소가 스친다.

"그럼 어디 확인하러 가 볼까?"

에구... 이런 변고가... 윤경이는 책읽느라 바빠서 환자를 직접 보는 건 다른

애들이 거의 다 했는데... 다들 교수님 뒤를 따라 병실로 간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 남자 6인실 환자다. 윤경이는 환자 얼굴도 가물가물할

텐데... 윤경이는 씩씩하게 한 환자의 침대로 걸어간다.

"김주용씨, 안녕하세요..."

"김주용씨는 저쪽인데요..."

으으... 끝장이군... 그러나 교수님은 태연하시다.


"혈압을 재봐..."

윤경이가 혈압대를 환자의 팔에 감았다. 그런데... 긴장해서인지 그만 거꾸로 감는

거다. (거꾸로 감으면 에어 백에 공기를 넣을 때 혈압대가 벗겨져버린다.) staire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혈압대를 고쳐 감았다.
 
"넌 가만있어!"

위협적인 교수님의 일갈... "가진 것 다 내놔..." 할 때와 같은 목소리... 이제

혈압대 아래에  청진기를 찔러넣을 차례... 그런데 윤경이는 청진기를 자꾸 넣었다

뺐다 한다. Krotokov sound(혈압대에 눌려졌던 피가 혈압대 밑을 벗어나며

turbulence를 일으키는 '부걱 부걱'하는 소리) 가 안 들려서 당황하고 있는 거다.

당연히 안들리지... 아직 혈압대에 공기를 넣지 않았으니...

"그냥 하면 돼..."

재헌이가 한마디 하다가 역시 교수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혈압을 제대로 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순서로...

"Fundoscope... 볼 줄 알지?"

(Fundoscope 또는 ophthalmoscope : 망막을 들여다보는 장치. 환자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망막 동맥을 관찰할 수 있다.)

사실 본과 3학년 초반에 fundoscope를 제대로 볼 줄 아는 학생은 많지 않다. 볼 줄

모른다고 실토하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리포트엔 인턴 원태형 (소설가 박완서

씨의 외아들. 레지던트 1년차때 자살하셨다...)이 대신 그려준 멋진 망막 스케치가

있으니...


윤경이는 환자의 오른쪽 눈에 fundoscope를 대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갖다댄다.

그런데... 한성이가 병실 불을 끈다. staire는 커튼을 치고... 망막을 볼 때에는

조명을 낮추어야 하는데 윤경이가 또 깜빡한 거다.

"자네! 왜 자꾸 그래? 나가!"

에구... staire는 쫓겨나고 말았다...


병실 밖에서 족히 30분은 기다렸을 거다. 그동안 윤경이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병실을 나서는 윤경이의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보아 석연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교수님은 윤경이의 턱밑에 손가락 (엄청나게 길어요...)을 갖다대며

"도대체 실습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모두들 말이 없는 가운데...

"자네같은 의사는 필요 없어. 가운 벗어!"

버티면 안된다는 얘긴 선배들로부터 귀에 싹이 나도록 들었다. 윤경이의 가운을

빼앗듯이 받아든 교수님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휙 던져버린다...


8층 높이에서 흐느적대며 떨어져 내리던 가운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흑..."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윤경이...

교수님께선 뒤도 안 돌아보시고 돌아서서 병동을 나선다. 굳어 있던 애들이 윤경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든다.

"괜찮아... 다들 그러고도 졸업해서 의사 잘만 하던데 뭘..."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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