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시리즈 12 : 선배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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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시리즈 12 : 선배의 눈물

(ㅡ.ㅡ) 0 3,097 2003.10.07 16:32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4월30일(토) 02시18분14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12 : 선배의 눈물


시각, 가장 애닯은 감각...

볼 수 있으나 만질 수 없는 모든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지이드 '지상의 양식'


그렇다. 볼 수 없다면 모를까,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중앙대 의대 내과학 교수...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자리에 계시면서도 유병철

선배님은 늘 학생 시절을 그리워하셨다. staire와 나이 차가 10년 이상이면서도 늘

'병철이형'이라고 불러드리는 걸 좋아하셨고 우리와 함께 연주하는 걸 즐기셨다.


중앙대 의대에는 staire의 SNUMO(SNU Medical Orchestra) 선배 두 분이 계시다.

소아과 교수 응상이형(최응상 선배님)과 내과 교수 병철이형. 두 분 모두 졸업

후에도 악기를 놓지 않으시고 Doctors' Ensemble 단원으로 연주를 하셨다.

병철이형께선 원래 바이올린을 하셨으나 의대 졸업 후에 비올라가 더 맘에 든다며

악기를 바꾸셨다. 형의 두툼하고 깊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형께서 연주하시는

브람스의 비올라 소나타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듣게 되기를 바라는... 

연습 막간에 잠시 들려주신 'Vocalise'도 잊혀지지 않는다.


의대 오케스트라에는 묘한 전통이 있다. 연주회 전날 마지막 연습을 마치면 반장이

마지막 전달 사항을 얘기한 후 꼭 덧붙인다.

"오늘밤에는 after가 없습니다. 일찍 들어가서 푹 쉬세요..."

그러나 그날 밤 대학로의 소주집에서는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 제정신으로

귀가하는 사람이 드물다. 매년 반복되는 거짓말... 한 달동안 마실 술을 그날 다

마시는거다. (이번 봄연주회 전날은 하필 만우절이라 더 혼란스러웠다. 반장은

'이번에는 정말이다. 제발 일찍 자라...'고 했지만 결국 대학로의 골목집에서 다들

만났다.)


그런데 staire가 본과 3학년이던 87년의 연주회는 바로 본과 3학년들의 시험날

이었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 은 시험 전날인 거다. 그래서 staire를 포함한

본3들은 슬쩍 달아나 시험공부할 작정들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선배는 한 수

위... 병철이형을 비롯한 선배들께서 미리 짐작을 하시고 달아나려던 본3(악장,

반장 등 책임자들이 모두 본3이다)들을 모조리 체포(?)하신 거다.


"한심한 녀석들... 네놈들 같은 녀석들이 갈 데가 있지..."

우리는 벌써 뻐근히 취한 몸을 간신히 가누며 선배님들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강남

으로 압송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잠원동 포장마차촌으로 우리를 데려가신

거다. (그땐 음주운전 단속도, 심야영업 제한도 없었다.) 병철이형은 차선을 무시

하고 취중운전으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고 (그게 다 니들 술 깨게 하려고

그런 거야... 하고 말씀하시지만...) 금호 터널을 지날 때는

"야, 큰일났다... 터널이 두 개로 보여..."

"그 터널은 원래 두개에요..."

"거짓말 하지 마. 나 아직 안취했어.. 두 개 사이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정말 두 터널 사이로 돌진하시다가 하마터면 추모음악회를 만들 뻔 하시기도...


드디어 잠원동에 도착한 우리는 간판을 보고 쓰러질 뻔했다. 심장이 약한 종호는

잠시 거품을 물었다. 무슨 술집 이름들이 하나같이 '이판사판', '산수갑산',

'싹쓸이'...


92년의 연주회 때는  병철이형과 응상이형께서 Mozart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Synfonia Concertante'를  연주하셨고 광주 시향 지휘자이신  금노상 선생님

께서 지휘를 맡으셨다. (금난새씨의 동생)


연주를 일주일 남짓 앞둔 어느날, 2차, 3차 after도 끝내고 남은 골수 술고래들

금노상 선생, 병철이형, staire, 당시 예과 2학년이던 석한이...)은 '요즘 학생들이

잘 가는  술집이 어디냐'는 형의 말씀에 따라 대학로의 골목집에서 곱창 전골에

소주를 마셨다. 금노상 선생, 아니 노상이 오빠(나이로는 병철이형보다 젊으시다)

께서는 술이 약하기로 소문난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소주를 끝없이 따르셨고...


문득 어깨에 병철이형의 무겁지만 따스한 손길을 느낀 staire는 서둘러 잔을 비우고

형에게 잔을 드렸다.

"의대를 과감하게 떠난 네가 얼마나 부러운지 너는 모르지?"

노상이 오빠께서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5년 전에 의대생으로서

뵌 이후로 뜸하나마 노상이 오빠의 술상무가 되어 드렸던 staire가 공대생이 되어

다시 술잔을 나누게 되다니... 금노상 선생으로서도 감회가 새로우신 거다.

그렇지만 당시 대학원 입시를 불과 두어 달 앞둔 공대 4학년의 staire로서는 형의

부러움이 실감나지 않았다.


"의대 교수, 이건 못할 짓이야..."

취하셔서 음절이 불분명한 목소리로 병철이형이 말씀하셨다.

"임상 의사는 일에 몰두하면 되지. 하지만 교수는... 젊은 학생들,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너희들을 매일 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학생들이 알까?"

"......"

"나도 한 때 너처럼 바꾸어볼 생각을 했지..."

"하지만 형은 다 이겨내셨잖아요..."

"그땐 이겨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인턴을 마치고 레지를 거쳐 군의관을 지나는

그 기간동안 늘 내겐 하기 싫은 일과 싸워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어. 교수직을

따내는 순간 싸움은 끝났다고 믿었지만..."
                                                     

금노상 선생께서 다시 한 잔을 권했다.

"금선생,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오. 자신의 길에 일말의 회의도 없었다는 얘길 많이

들었지... 하지만 난 아니오. 바이올린을 비올라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난 언제나

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만 했어..."


형은 잔을 다시 staire에게 건네셨다.

"너도 내일 아침부터 쫓기는 생활을 시작하겠지만 나도 그래. 내일 아침에 봐야 할

환자가 몇 명인지 생각도 안나는군..."

형은 고개를 푹 숙이셨다. 석한이가 형을 부축하려는 순간 손을 내저으시며 하시던

잊지 못할 한마디...

"환자 보기 싫어..."


굵은 눈물이 형의 뺨위로 흘러내렸다. 40대의 당당한 교수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환자 보기 싫어...' 숙제 하기 싫어서,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어서

징징대는 철부지마냥 '환자 보기 싫어...' 그래, 그럼 오늘은 쉬어라... 하고

응석을 받아줄 누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공허하고 절망적인 '환자 보기 싫어...'

모든 것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고 살아야 하며 가정에선 든든한 아버지로, 학교에선

존경받는 교수님으로, 병원에선 늠름한 의사로 늘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중년 남자의, 누구 앞에서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환자 보기 싫어...'


형께서 건강 문제로 휴직하셨다는  소식을 작년에 들었다. staire는 그것이 정말

건강 문제이기를 바랄 뿐이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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