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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8 : 안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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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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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07 16:30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4월18일(월) 22시23분1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8 : 안락사
온갖 것 보기 위해 태어났지만
온갖 것 보아서는 안된다 하더군...
괴테, 파우스트 2부 (린세우스)
양승용씨가 입원실에 들어선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
'이야... 교과서적인 황달이군...'
staire는 감탄의 눈빛을 애써 감추며 admission note(입원하면 맨 먼저 쓰는 기본
보고서) 용지를 뜯었다. 이건 원래 인턴과 주치의(레지)가 따로 한 장씩 쓰는
거지만 당시 서울대 병원에선 인턴, 레지의 격무를 덜어주는 의미에서 학생이 2부를
작성하는 게 공공연한 관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CC = chief complaint)
전에 다른 큰 병을 앓으신 적은? (hx = history)
현재 증세가 어떠신데요? (PI = present illness)
가족 중에 특별한 질환을 가지신 분은? ( FHx = family history)
그다음엔 좀 지루한 질문의 연속. (SR = systemic review) 머리가 아프지 않으세요?
숨이 가쁘시거나.... 소화는 잘 되시고...
여기까지가 대충 30여분, 그다음은 직접 손으로 하는 기본 검사들 (PE = physical
exam.)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뒤진다. 우선 VS (vital sign), 즉 체온,
호흡수, 맥박수, 혈압 측정. 그다음엔 청진, 복부 촉진, 무릎 반사...
이런 걸 다 하면 1시간 남짓 걸린다. 이렇게 꼼꼼하게 하면 그건 실습생이라는
뜻이다. 인턴이나 레지라면 10분, 20분에 끝난다.
'skin : melon color'를 적어넣으며 staire는 환자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세상에... 책에서나 보던 녹색인간을 이렇게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황달이 갈
데까지 갔군...
"강선생, 어때? 양승용씨?"
주치의가 물었다.
"글쎄요. 황달이 심하지만 뭐 건강해보이는데요. 씩씩하게 말씀도 잘하시고,
표정도 밝고, 식사도 잘 하시고..."
"그렇게 봤어? 그환자, 오늘을 넘기기 어려워..."
"그래요?"
"간성 혼수(hepatic coma)에 여러 번 빠진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요즘 불안정해서
입원시킨 거야. 차트 읽어보라구..."
과연 그랬다. 양승용씨의 차트는 웬만한 책만큼이나 두꺼웠고 각종 검사치는 이런
몸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어왔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정정해보이는 건 왜일까? 그것도 좋게 말하면 인체의 신비라고 해야 하나?
오후 5시를 넘기지 못해 양승용씨는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이런, 오늘 집에는
다 갔군 하는 예감... 혈압이 떨어지고 심전도는 규칙성이 전혀 없고... 주치의는
심폐소생술(CPR =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을 준비시키고 병동은 활기(?)를
띤다. 간호사와 간호 보조원 4명이 병실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CPR이 시작
되었다. 주치의는 강심제 주사기를 든 채 심전도를 주시하고, 간호사는 에어 백으로
인공호흡을 시키고...
인턴이 staire를 불렀다.
"지금부터 심장 마사지(cardiac massage)를 하는 거야. 요령은 알지?"
staire는 환자의 가슴뼈 바로 위, 그러니까 명치 조금 위에 두 손바닥을 겹쳐 대고
힘껏 가슴을 누른다.
"힘이 그것밖에 없어? 왜 자네를 시키는지 모르나? 힘껏 눌러, 힘껏.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staire는 체중을 실어 정말 부러지도록 눌렀다. 순간, 뭐가 부러져 나가는 느낌.
"정말 갈비뼈가 부러진 것같은데요?"
"지금 갈비뼈가 문제야? 더 힘껏 해..."
거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마사지를 한 보람이 있었는지 양승용씨는 숨을 돌렸다.
모두들 땀에 흠뻑 젖었다.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땀을 닦으며 병실을 나서는데 복도에는 벌써 환자 가족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환자를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거다.
'아니, 어떻게 살려 놓았는데...'
그러나 주치의의 설명은 냉정하다. 이미 틀렸다는 것, CPR은 다만 객사를 면하고
집에서 임종을 맞기 위한 미봉책이라는 거다. 가슴이 으스러진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증세가 그런지는 모르지만 양승용씨는 심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치사량의
거의 3분의 1은 되어보이는 모르핀을 맞고 진정은 되었으나 아직도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아니, 병원 입원실에서 죽는 건 객사라고? 그럼 환자를
저 꼴로 만들어놓고 집에 싣고 가는 게 환자에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거야?
왜 편히 죽도록 놔두지 못하는거야...
그러나 병원 현관에는 이미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주치의와 staire, 간호사
3사람은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양승용씨와 함께 현관으로 내려갔다. 환자를
태우고 나자 주치의가 staire를 손짓으로 불렀다.
"원래는 내가 따라 내려가서 사망진단서를 써야 하는데, 오늘 밤에 한 건 더 있을
것같아서 병원을 비울 수가 없어. 자네가 가라구. 사인은 이미 써 두었으니까,
언제 죽든 개의치 말고 집에 도착한 즉시 죽은 것으로 해두면 돼."
어리둥절하여 받아든 진단서에는 'cardiac arrest'라는 사인이 이미 적혀 있었다.
"알았습니다. 어디까지 가면 되는데요?"
"집이 조치원이래."
"?????"
이래서 staire는 조치원까지 가게 된거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했다. 조치원이
얼마나 먼 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 수업까지 망친 건 확실했다.
앰뷸런스에는 기사 이외에 staire와 환자의 딸이 탔다. staire와 비슷한 연배였다.
"이런 일을 처음 겪으시는 거죠?"
양승용씨의 딸은 의외로 차분했다. staire가 실습생인 걸 알고 있다...
"전 처음부터 입원에 반대했어요. 다 부질없는 일을... 그냥 편안히 돌아가시게
하고 싶었어요."
그 말을 알아들었을 리 없지만 양승용씨의 용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staire는
emergency kit를 열었다. 사실 그걸로 뭘 해야 할 지 몰랐다. 낯익은 진통제와
강심제 이름들... propranolol, atropine...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무서운 고통과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해야 하는 건지...
양승용씨의 딸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엉뚱하게도 눈빛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양승용씨의 딸은 날렵하게 emergency kit를
낚아챘다. 그리고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스트리키닌...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는
눈을 staire는 애써 외면했다. 스트리키닌이 왜 거기 있는지 잠시 어리둥절하는
사이 그녀는 거의 한 병을 주사기에 담더니 양승용씨의 팔에 꽂혀 있는 비닐 튜브를
찔렀다...
"전 간호 전문대를 다녔어요. 지금 조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구요. 진단서
이리 주세요. 사인해드릴테니..."
익숙한 솜씨로 사인을 하고 진단서를 staire에게 돌려주며,
"죄의식 갖지 마세요. 강선생님이 반대 안하실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좋은 의사가 되세요. 하지만 환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아요..."
"......"
"여기서 내리시면 서울 가는 버스가 있어요. 집에 도착해서 돌아가신 걸로
해두지요. 어차피 부검은 없을 테니까요..."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리며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처연한 미소를....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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