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series 22 : 사랑스러운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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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22 : 사랑스러운 아내

(ㅡ.ㅡ) 0 3,315 2003.10.07 16:41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9월22일(목) 23시46분07초 KDT
  제 목(Title): 사랑스러운 아내


'사랑하는 엘라 제인, 아내이자 생애의 벗, 여기에 잠들다.

50년의 행복을 진심으로 감사하노라...'

...

"50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50년? 음... 글쎄, 휴일을 빼고 150학기라는 셈이 되는데...

너무 길어서 실감이 안 나는 걸?"

"넌 날 그처럼 오래 사랑할 수 있어?"

                          - Alan Parker, '작은 사랑의 멜로디'


"자궁경부암... 이놈은 약물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요. 방 군이 얘기하겠나?"

김노경 교수님은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하신 방영주 교수님을 지목하셨다.

"그렇습니다. 자궁경부암은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cisplatin이 나온 이후로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cisplatin은

백금 제제로서 독성이 좀 강한 것이 흠이지만 제가 갖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따분한 종양학(oncology) conference... staire는 필기에 여념이 없었다.

'cisplatin, SE! but pot. in UCC...'

시스플라틴, 부작용(Side Effect) 심하지만 자궁경부암(Uterine Cervix Cancer)에

효과가 있음... 이런 뜻이다.


교수님께서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시는 '부작용'이란 게 어느 정도이길래 심하다고

하시는 걸까... 항암제 치고 약간의 부작용이 없는 경우는 없는데...


항암제란 기본적으로 세포를 죽이는... 그러니까 독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약이다.

하지만 아무 세포나 덮어놓고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항암제는 주로 분열기의

세포를 공격한다. 암세포는 활발하게 분열하는 놈이니까 항암제에 가장 심하게

피해를 입는다.


그렇지만 우리 몸에서 암세포만 분열하는 건 아니다. 암세포이든 아니든 분열을

많이 하는 세포는 모두 피해를 입는다. 예를 들어 피부, 장점막, 머리카락, 골수,

생식 세포... 그래서 항암제 치료를 오래 받은 환자는 예외 없이 피부가 거칠어지고

머리가 빠지고 피를 토하는 등 부작용에 시달린다.


81 병동의 주치의(레지던트)들은 환자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차트를 대충 읽고

staire에게 휙 던진다.

"젠장... 우리 병동은 무슨 시체 처리장인가... 왜 죽을 때가 되면 보내는거야..."


차트는 정말  처참하다. 자궁경부암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 암세포가 간과

위장, 폐, 그리고 최근에 뇌까지 침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정도라면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항암제(방영주 교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cisplatin)와 방사선 치료를 5년째 받고 있는 중... 통원치료하다 갑자기 혼수

상태에 빠져 응급실을 거쳐 입원... 그리고 두툼하게 쌓인 각종 검사 자료...

'죽으러 왔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잠시 후... 환자용 엘리베이터 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스트레처에 실려 등장한

주인공(?) 성희순씨... 부스럼이 가득한 피부에 깨끗이 빠져버린 머리...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말기 암환자의 모습이다. 두 명의 간호사와 40대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보호자와 함께 81 병동으로 들어왔다.


성희순씨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구석에 누워 있을 뿐.

staire나 다른 실습생들도 '배울 것 없는' 환자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아침 수업을 마치고 9시반쯤 병동에 올라갔더니 김노경 교수님과

방영주 교수님이 와 계시다. 주치의 성욱이형이 장갑을 벗으며 주사기에 든 것을

비닐 주머니에 옮겨 담고 있다. 아마 liver biopsy(조직 검사를 위해 굵은 바늘로

간조직을 떼어내는...)를 막 끝낸 듯하다. 환자는 고통스러운 듯 끙끙 앓고 있다.

늘 환자 곁을 떠나지 않는 보호자가 환자를 안고 쓰다듬어주며 위로하고 있었다.

"잘 참았어. 많이 아프지?"

말기 암환자의 고통이란 워낙 심해서 그까짓(?) biopsy가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저 아저씨는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군...


그런데... 이건 좀 의외다. 환자는 거의 해골같은 모습을 한 할머니인데 40대의

젊은 남자가 잘 참았어... 라니? 저 사람은 환자와 어떤 관계일까?


차트를 다시 읽어보고 깨달은 사실은... 환자 성희순씨는 40대 초반의 젊은 환자.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흉악한 몰골이지만 실제 나이로는 보호자와 부부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병동이 조용해진 후 그분 곁에 가서 물어보았다.

"성희순씨 남편 되시죠?"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시죠?"

그분은 빙긋이 웃으시며 부스럼과 허연 살비듬에 뒤덮인 환자의 머리와 이마에

뺨을 비비고 입을 맞추는 등 환자를 다독거리기에 바쁘다.


인턴이 정맥 주사를 하러 들어온 사이 그분과 staire는 병실을 나와 계단으로 갔다.

거기라면 눈치 안 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집사람이 너무 늙어 보여서 그러시는 거죠? 하긴... 그럴 만도 해요..."

"간호하시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어요."

"하하... 보기 좋았나? 집사람이 좀더 이쁘게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


staire의 가슴 속을 빙빙 돌고 있는 의문... 그분은 저런 몰골의 부인을 간호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무리 정이 들 대로 든 사이라지만 정말 기쁘게 간호하고

있는 것일까?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세요?"

그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는다.

"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음... 이래서야 질문을 한 staire가 무안해지고 말았다.

"지금 저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그런 감정을 갖고 계신 거에요?"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는 그분의 옆모습... 괜한 질문을 한 건 아닐까...

그 짧은 시간 동안 staire는 그분의 대답을 이것저것 짐작해 보았다.


'오랜 세월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동안 저때문에 고생했는데... 미안해서라도...'

'저마저도 외면하면 누가 돌봐주겠어요? 저 불쌍한 사람을...'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staire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맛있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연기를 뿜으며 staire를 돌아보는 그분의 눈빛은 마치

10대의 소년처럼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약간 짓궂어 보일 정도로...


"강선생은 모를 거요... 저 사람이 처녀때 얼마나 이뻤는지..."

옛날을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그늘 없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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