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series 21 : 서울역에서 만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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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21 : 서울역에서 만난 전경

(ㅡ.ㅡ) 1 3,474 2003.10.07 16:39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8월15일(월) 21시45분14초 KDT
  제 목(Title): 서울역에서 만난 전경


적어도 증오의 감정은 순수해. 오도되기 쉽고 때묻기 쉬운 '사랑'이라는 애매한

개념보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훨씬 투명하게 보여주는 게 증오라는 거지...

                                          - 87년 6월, 어느 서클 회지에서


학교는 휴교 상태였지만 우리는 매일 모여서 끝없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전두환의 호헌 선언 이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87년, staire의 본과 3학년

시절은 그렇게 얼룩지고 있었다.


"폭력을 반대한다구요? 물리력과 폭력은 다릅니다. 선생님의 사랑의 매를 당신은

폭력이라고 부릅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폭력이 아닌지 석연히 구별해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것은 증오입니다. 저변에 증오의 감정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무력 투쟁이 증오에 좌우되는 맹목적인 폭력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증오감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거리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철이의 열띤 목소리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력 시위에 대해 시큰둥한

표정들이었다. 그보다는 어느 진료 서클의 회장인 상준이의 주장이 훨씬 매력적으로

들렸다.

"흰 가운을 입고 나가는 겁니다. 시민과 학생, 전경 구별 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중립 지대를 우리가 만드는 거에요. 지금 분위기는 너무 뜨거워요. 식힐

필요가 있습니다..."

투표를 거쳐 진료 봉사쪽으로 대세가 기울었고 우리는 조를 짜서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흰 깃발과 흰 가운... 서울 의대 본과생들로 이루어진 의료 봉사단은 시내 곳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의료 봉사래야 간단한 응급 처치 수준이었지만 우리가 깃발을

세우고 테이블을 벌여놓은 것만으로도 그럴듯한 중립지대가 형성되었다. 학생이건

전경이건 우리 앞에서는 양처럼 온순했고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거리에 내던져진 젊음과 자신의 뜻에 무관하게

소모되어가는 젊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순수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


최루 가스에 눈물을 흘리고 초여름의 따가운 볕에 그을리면서도 우리는 쉴 틈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찾는 사람은 점점 더 불어났고 모자라는 약품을

대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여학생들의 발길은 더욱 바빠졌다.


staire가 있던 곳은 서울역 광장. 본격적인 충돌이 한 번 있은 뒤여서인지 우리

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환자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고 간단한 응급처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들을 실어나르는 정호와 윤호의 차 시트에는 핏물이 배어들고

있었다. 눈을 다쳐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여학생을 부축해 온 어느 청년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며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증오감의 유무로 판단한다는 건 불가능해. 저 분노에 타오르는 눈빛을 보면...

거리에 나선 이상 자신의 감정마저도 스스로의 것이 아니야. 여기엔 전염병처럼

증오의 씨가 뿌려지고 있는 거야. 비폭력 투쟁이란 간디와 같이 느긋한 성인 군자

들에게나 가능한거야...'


한 차례 파도가 쓸고 지나간 뒤 우리는 숨을 돌렸다. 다행히 전경들도 진료

봉사단의 영역을 인정해주었고 우리 팀중에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간호

학과 여학생 하나가 일사병으로 쓰러져 집으로 보내어진 것을 제외하면...


따가운 눈 주위를 찜질용 얼음으로 비비며 잠시 쉬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긴장했다. 한 무리의 시민들이 우리 쪽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백골단이다!"

그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

특별히 성격이 비뚤어진 자들로 구성된다는 냉혈 집단이 우리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일단 물러날까? 저녀석들이 우리라고 해서 그냥 놔두진 않겠지?"

"하지만... 쟤들도 인간인데 설마... 그리고 이 약들과 의료 장비... 이걸 버리고

간다는 건..."

"안돼. 우리에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비도 없잖아. 맨손으로 저녀석들

앞에서 버틸 수는..."

말을 맺을 틈이 없었다. 백골단의 짧은 곤봉에 진태가 머리를 호되게 맞고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우리는 역 오른편의 골목길을 향해 뛰었다. 그들은 약병과 붕대를

늘어놓은 테이블을 뒤엎고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흘낏 돌아본 눈에 비친 광경은

치료를 받고 얼음 주머니를 얼굴에 대고 있던 어떤 청년을 방패(백골단 특유의 작고

각이 진)로 내리찍는 모습...


그때 staire의 가슴을 꿰뚫은 감정은 분명 증오감이었다. 손에 기관총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쏘아붙였을 정도로 맹목적인 증오...


학생 전투대의 반격으로 백골단의 기세는 좀 누그러졌지만 진료 봉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일도 이 자리에서 진료 봉사를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운은 달아나기에는 무척 거추장스러운 옷이다. 어느 가게집으로 뛰어들어간

staire와 한석이, 민규는 친절한 가게 아주머니에게서 물을 얻어 마시며 숨을

돌렸다.


"아무래도... 문을 닫아야겠어. 학생들은 어떻게 할거야?"

"죄송합니다만... 당분간 나가기 어렵겠군요. 잠시 신세를 져도 될까요?"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으러 나가셨다. 그때 구르다시피하며 뛰어들어온

사람은... 헬멧과 방패를 잃어버리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청바지와 청조끼를

입은 백골단 녀석이었다. 곤봉을 쥐고 있는 손에도 힘이 없어보였다. 그는 가운

차림의 우리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겁먹은 눈... 전쟁을 겪은 일은 없지만

전쟁터에서 느끼는 광기라는 것은 이런 걸까... 대열에서 낙오된 병사의 왜소한

모습이란...


"아주머니, 얼음하고 붕대 좀 구할 수 있을까요?"

"붕대는 내 가운 주머니에 몇 개 있어..."

우리는 그의 터진 머리를 씻어내고 항생제 연고를 대충 바른 후 그의 머리를 싸매어

주었다.


"백골단은 싸움에 나서기 전에 술을 마시거나 흥분제를 먹는다던데... 정말이에요?"

그는 대답 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아! 니네 대장이 그렇게 시켰니? 우린 그렇다 치더라도 부상자를 그렇게

두들겨패는 법이 어딨어!"

"......"

다혈질인 한석이의 화난 목소리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가게에 딸린 살림방 들창으로 밖을 내다보시던 아주머니는

우리를 보고 말씀하셨다.

"이제 조용해진 것같아. 학생들, 이제 나가도 되겠는데..."

"아주머니,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안내하시는 대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맨 끝에는 그 백골단

청년이 말없이 따라나왔다.

"헤어지는 마당인데... 악수나 합시다.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래야겠지요..."

민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는 고집스럽게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민규가 어색하게 돌아서는 순간...

"민규야!"

"안돼!"

staire와 한석이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 백골단 청년이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민규의 뒷머리를 곤봉으로 힘껏 내려친 거다.

"야 이 개새끼야!"

한석이가 길바닥에 구르는 돌을 집어 힘껏 던졌으나 돌은 달아나는 그에게서 한참

빗나가 어느 담벼락을 때렸다.


staire는 민규를 안아 일으켰다. 눈이 풀린 민규의 뒷머리는 무섭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씩씩거리는 한석이,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늘어져 있는

민규를 번갈아 보며 staire는 다시 속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피해야 한다는 폭력, 버려야 한다는 증오... 어디

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인가...'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br><br>[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5-04-07 16:23:58 횡설수설(으)로 부터 이동됨]

Comments

방울뱀 2005.01.09 1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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