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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18 : 걸렸군...
(ㅡ.ㅡ)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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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07 16:37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18일(토) 10시19분50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8 : 걸렸군...
하나의 개념, 하나의 형상, 하나의 존재가
푸른 하늘로부터 진흙투성이의 납빛 지옥의 강에 떨어진다.
그곳에서는 하늘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 보들레르, '축복' (시집 '악의 꽃'에서)
악몽인가... staire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이마가, 아니 온
얼굴, 온몸이 펄펄 끓는 듯하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베갯머리에서 기어나와 서랍을
열었다. 뒤적뒤적... 체온계를 찾았다. 체온은 자그마치 40도 8부.
열을 조금이라도 식혀보려고 맨바닥에 누워서 생각해본다. 이상한 것을 먹지는
않았고... 그래... 이건 사나흘 전부터 앓던 가벼운 감기 때문이야. 그런데 정체가
뭐지? 대개 어떤 병이든 초기 증상은 감기 비슷한 법이니... 좀더 앞으로 거슬러
가며 감기로 시작되는 병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열에 뜬 머리로는 잘 안되지만...
앗...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staire는 억지로 몸을 추슬러 일어나 내과책을 꺼내어 장티푸스(typhoid fever)를
펼친다.
'초기 증상 : 가벼운 감기, 피로감, 식욕부진, 두통, 오한과 열...'
음... 이건 도움이 안된다. 대개의 병이 다 이렇지... 그렇지만 장티푸스가 아니라
는 확증은 없다.
'잠복기 : 약 1주일'
일주일? 가만있자, 일주일... 그렇군. 일주일 전이면 지난 주 수요일, 아니 목요일
인가... 하여간 '전염병동' 실습중이었던 그 시기... 그때 staire가 담당한
환자는... 으으으... 장티푸스다.
'주요 증상 : 8주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고열(39-40도)이 무엇보다 특징적이다.
그리고 서맥(bradycardia : 맥박이 늦어짐)...'
시계를 꺼내어 맥을 짚는다. 어지럼증이 심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서맥은
아니야... 그럼 그렇지...
그러나...
'서맥을 보이는 환자는 전체의 30 내지 40%에 불과하다.'
으으... 얄밉도록 무표정한 설명이군. 그럼 이딴 소린 책에 왜 적어놓은 거야...
'복통과 복부 팽만감'
그런가? 좀전엔 몰랐는데 읽고보니 배도 좀 이상하다.
'윗배와 앞가슴에 특징적인 붉은 반점'
옷을 걷어 본다. 분명히 그런 건 없다. 그렇지만... '반점은 2주째에 나타난다...'
그럼 아직 모르는 일?
'발병 첫주의 특징으로는 간과 비장의 종대(붓는다). 간과 비장을 만질 수 있다.'
누워서 간과 비장을 짚어본다. 만져진다... 숨을 들이쉬며 배를 부풀리는 순간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피감...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니, 적어도 staire는 그렇게 생각했다. 걸렸군... 1종
법정 전염병인 장티푸스. 생존율이 얼마더라?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치사율 12%'
치사율이 끔찍스럽도록 높다. 열에 한 명 이상이라니... 그걸 읽는 순간 어지럼증이
심해지며 잠시 아찔한 느낌. 안 돼, 난 살아야 해. 항생제, 항생제...
구급 상자를 꺼낸다. 장티푸스에 특효라면 chloramphenicol. 그렇지만 그건 없다.
그럼? 아스피린... 아냐. 장티푸스에 아스피린은 금물이다. 스테로이드... 그래,
스테로이드. 하지만 구급 상자 속의 스테로이드는 스테로이드 연고 뿐이다. 저걸
먹어? 아니면 이마와 배에 발라 봐? 아냐... 침착, 침착...
'Chloramphenicol을 쓸 수 없는 경우엔 ampicillin, amoxicillin...'
하필 집에 없는 것뿐이다.
'... 또는 trimethoprim과 sulfamethoxasole의 복합 처방...'
음... 그 복합처방은 낯이 익어... 근데 그 복합 제제의 상품명이 뭐더라...
그 두 가지에다 bacitracin을 섞었던가 ... 아닌가...
현기증이 한층 심해진다. 방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구르면서 필사적으로 그놈의
상품명을 떠올렸다. 그래... 박트림... 마침 박트림이 있다. 휴... 살았다.
약을 먹어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열제가 있으면 좋을텐데... 근데 아스피린은
왜 안되는걸까? 해열제로는 그만인데... 내과책에는 역시 무표정한 설명이 붙어
있다.
'아스피린은 장출혈과 장파열을 촉진시키므로 금한다.'
그렇지. 장티푸스의 가장 심각한 부분이 바로 장출혈과 장파열이니...
그럼 소화기에 무리를 주지 않는 acetaminophen(상품명 : tylenol)은 어떨까? 그건
책을 찾아볼 필요도 없다. 구급 상자엔 빈 통만 달랑 구르고 있었으니... 할 수
없이 살모넬라균(Salmonella typhi)과의 싸움은 항생제만으로... 열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하고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얼굴에 비쳐드는 햇살에 눈을 뜨고보니 10시다. 지각이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박트림을 두 알 더 먹고 학교로 향했다.
"저어... 늦은 건.. 다름이 아니라... typhoid fever 때문에..."
"뭐? typhoid?"
"예... 아무래도 지난 주 전염병동 실습때 전염된 것같아요."
"증상이 어땠는데?"
"열이 40도 8부. 간이 만져지고..."
"그리고?"
"... 생각해보니 그것밖에 없네요..."
최강원 교수님(전염병 전문가)은 한심하다는 눈치...
"간이야 열이 날 때 붓기 쉬운 거 아닌가? 좀더 specific한 게 필요한데..."
"글쎄요... 하지만 지난 주에 전염병동..."
"자, 자, 하루 사이에 열이 뚝 떨어졌다면 아무리 항생제가 좋기로서니 장티푸스는
아냐. 정 의심스러우면 혈액 검사를 좀 해 볼까?"
"아, 아닙니다..."
"혈액 검사에서 봐야 하는 게 뭐지?"
에구... 이건 긁어 부스럼이다.
"에... 또... leukopenia(백혈구 감소)..."
"얼마나?"
"3000, 아, 아니, 4000인가..."
"그리고?"
원래 교수님이란 학생들이 대답 못할 때까지 질문하시는 법이며 잘못했다는 소리를
들으실 때까지는 고삐를 늦추지 않으신다. 전날 밤 내과 책에서 읽은 밑천이 다
떨어지고도 실컷 더 시달린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휴... 환자를 이렇게 다루는 의사가 어디 있담?'
그나저나... 그날 밤의 고열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의대생이 있다면 전염병동에서 단단히 주의하시기를... 아, 그리고 구급상자는
늘 꽉꽉 채워둡시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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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갑지..히히...암튼 감기약 먹으면 몽롱한 그 느낌, 그 느낌 있잖아요! 그게 좋더라구요.
회원 여러분들도 감기 조심하시길...히히...이기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