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series 17 : 81 병동의 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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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17 : 81 병동의 거머리

(ㅡ.ㅡ) 0 3,147 2003.10.07 16:36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7일(화) 06시09분04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7 : 81 병동의 거머리


O let me be awake, my God!

Or let me sleep alway.

          - Coleridge,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에서


연휴를 맞아 꼬박 이틀 반을 철야하며 수없이 이런 기도라도 올리고 싶었다. 나를

깨워주소서. 그게 안된다면 차라리 영영 잠들게 하소서... 본과 3학년이던 어느날,

잠에 취해 저질렀던 어이없는 실수의 기억과 함께...


손가락 끝의 감각이 꽤 예민한 편인지 혈관을 찾아 찌르는 데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실습 1주일만이었다. 처음엔 빤히 보이는 혈관도 잘 못찌른다. 그러나

연습을 거듭하다보면 차차 감각이 붙는다. 잘 안보이는 혈관도 느낌만으로 찔러

들어가게 되고, 주사바늘 끝에서 미끄러져 달아나는 혈관을 쫓아가 찌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데에는 1달이면 충분하다. 근데 staire는 불과 일주일만에 그 단계에

도달한 거다.


이제 실습생이 맡은 채혈과 정맥주사는 대부분 staire가 처리하게 되었다. 아침

6시까지 출근(?)해서 간호사들이 챙겨둔 order에 따라 졸린 눈을 비비며 시험관과

주사기를 들고 병실을 돌며 채혈... 8시 수업을 마치고 9시반에 병동에 올라와 다시

병실을 돌며 정맥주사... 인턴의 총애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건 원래 인턴의

일이거든.


어느샌가 staire는 '81 병동의 거머리'라 불리게 되었다. 처음엔 흡혈귀... 였지만

간호사들은 거머리라는 별명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피뽑는 일을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staire가 특히 즐겨 쓰는 기술은 동맥 찌르기... 원래 채혈은 정맥에서 한다.

그러나 ABGA (Arterial Blood Gas Analysis : 동맥혈 가스 분석)를 위해 동맥혈을
 
뽑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동맥 속의 산소, 이산화탄소, 중탄산염 등을 측정하기

위해서... 손에 익으면 정맥 찌르기보다 보다 쉽기 때문에 정맥을 찌르기 어려운

환자의 채혈을 위해 ABGA가 아닌 경우에도 가끔 쓴다...


그날 아침에도 staire는 졸음을 참으며 채혈을 하고 있었다. 우선 간염 환자의 정맥

채혈... 대개 cubital fossa(팔꿈치 앞쪽의 오목한 부분)에서 뽑는다. 환자는

온 몸이 퉁퉁 부어 있어 정맥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staire는 살짝 비치는 가느다란

정맥 줄기를 발견하고 고무줄을 감았다. 고무줄의 압력으로 인해 정맥혈이 심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맥에 고이면 좀더 찌르기 쉬워진다. staire가 시키는 대로

환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근육이 수축하며 앞팔에 남은 정맥혈을 짜 주면

정맥은 좀더 부풀어오른다. 그래도 여전히 희미한 정맥... 손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혈관의 부피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괜찮아... 이건 충분히 찌를 수 있어... staire는 주사바늘을 눕혀 환자의 팔을

찌른다. 꿈틀하며 바늘 옆으로 미끄러져 달아나는 혈관의 감촉... 이제는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 손감각만으로 해야 한다. 바늘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다시 밀어

넣는다. 오른손으로 (staire는 왼손잡이) 혈관이 지나는 부분을 당겨 미끄러지는 걸

최대한 막으며 바늘 끝이 혈관 벽을 긁는 걸 느낀다. 주사기 끝에 빨갛게 피가

비친다. 성공! 고무줄을 풀고 피스톤을 슬슬 당기며 피를 빨아들인다. 필요한 3cc를

다 뽑고나서 솜을 대고 누르며 바늘을 뺀다.

"문지르지 마시고 솜으로 꼭 누르세요... 문지르면 피멍이 맺힙니다..."

습관이 돼버린 말을 중얼거리며  피를 시험관에 옮겨담는다...


다음 환자는 ABGA. 이것도 반복하다보니 과정을 다 외어버렸다. 우선 주사기와

시험관용 고무 마개를 준비한다. 고무줄은 필요없다. 환자의 손목을 더듬으며
 
맥박을 잡아낸다. 동맥을 찾는 거다. 일단 찾은 동맥을 아래위로 더듬으며 동맥의

진행 방향을 확인한다. 동맥은 정맥과 달리 비교적 곧게 뻗어 있어 쉽게 방향이

잡힌다. 그 다음엔 바늘을 수직으로 세워 단숨에 찔러넣는다. 물론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맥이 눈에 보이는 경우란 동맥경화증 환자의 관자놀이나 귀 앞

같은 곳뿐이다) 손끝에 느껴지는 맥박의 위치로 잡아내는 거다. 주사기 끝에 피가

비친다. 동맥은 혈압이 정맥보다 높아 힘주어 당기지 않아도 쉽게 빨아낼 수 있다.


"솜은 문지르지 말고 가만히 누르세요. 적어도 5분동안..."

정맥보다 오래 누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 솜을 대고 누르며 바늘을 뽑는다.

즉시 고무 마개를 주사기로 찌른다. 동맥혈의 산소 함량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깥 공기와 닿지 않도록 하는 거다. 반창고에 환자의 이름과 날짜를 써서 붙이고

냉장고에 넣는 것으로 끝... 냉장고에 넣는 이유는 적혈구 등 세포들의 대사과정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혈구들이 계속 산소를 소모하거든...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최성재 교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아침 시간에

올라오시는 건 드문 일인데...

교수님은 scleroderma(공피증) 환자를 보러 오신 거다. 그건 좀 드문 병인데...

온몸의 혈관과 결합조직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대책없는 병이다. 오늘 아침 용태가

급격히 나빠져 올라오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며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 갈 데까지 간 것같았다. 손가락 끝의 혈관들이

막혔는지 손끝이 거무스레 죽어 있었고 피부는 두툼하게 부풀어 흡사 살색 가죽

장갑이라도 낀 것같다...

"우선 혈액을 좀... 빨리!"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인턴이 혈관을 찾는다. 그러나...

"혈관이 다 막힌 것같아요. 잡히질 않는데요..."

잠시 모두들 당황했다. 그때,

"야, 거머리. 네가 해 봐."

주치의의 목소리에 문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staire가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자네가 81병동 거머린가? 해 보게..."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 할 수도 없다...


환자의 피부는 코끼리의 그것처럼 거칠고 두꺼웠다. 정맥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staire는 환자의 손목을 힘주어 쥐고 맥을 찾았다. 동맥을 찾는 거다.

교수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녀석 좀 보게... 하는 표정.


희미하지만 분명히 맥이 잡힌다. 보통때보다 좀 가는 24호 바늘(번호가 높을수록

가늘다. 보통의 채혈은 18 - 21호로 한다. 헌혈할 때 쓰는 굵은 바늘은 대개 13 -

16호)로 힘주어 찌른다. 수축된 혈관이라 가는 바늘을 택한 거다. 평소보다 좀더

세게 찌른다... 됐어! 검붉은 피가 빨려나온다. 동맥혈인데도 검붉다는 건 산소

함량이 심하게 떨어졌다는 뜻이겠지... 과연 다급한 상황이었군...


staire는 피를 시험관에 옮겨담고 가운 윗주머니의 펜꽂이에 단단히 꽂았다.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흐르는 걸 그때서야 느꼈다...

"잘했어. 과연 거머리야..."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다시 밀려왔다... 그때... 멍청한 staire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솜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바보같이...


윗주머니에 꽂아둔 시험관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staire의 가운 앞자락을 적시며

병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피...놀란 교수님과 주치의, 인턴, 환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staire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말았다...

"허허... 저 거머리는 뽑는 것만 잘하는군..."

교수님께선 웃으시며 익숙한 솜씨로 금방 다시 피를 뽑으셨다. 그것도 정맥에서...

어떻게 정맥 채혈이 가능할까? 저런 분 앞에서 얕은 재주를 뽐내려 했으니...


병동은 다시 분주해졌으나 가운을 입은 채 병실 바닥에 주저앉은 staire는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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