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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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아이

회색영혼 4 6,968 2006.03.05 21:37
 

까마귀의 아이                                          


 불빛이 아스라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여력을 다해 타오르는 빛. 그러나 나는 그 빛의 결말을 알고 있다. 벌레의 예민한 촉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린 날개에 불빛이 어리어 투명하게 빛났다. 오직 갈망만을 안고 달려가는 벌레.

"인간의 광기란 저런 것일까."

나는 속삭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날개에 불을 붙는 수초간, 촛불은 갑작스레 꺼져버린다. 환희를 안고 날던 벌레는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날개 한쪽을 그슬리는 화상을 입고도 벌레는 불빛을 찾아 그 자리를 한바퀴 뱅뱅 돈다. 죽음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아닌 미칠 것 같은 그리움과 갈망.

나는 벌레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이내 다른 불빛을 찾아낸 듯 벌레는 내손을 달아나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까마귀의 아이."

그라이아이는 한쪽만 남은 눈으로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웃었다. 마녀, 몰락한 여신의 잔영만을 주워담은 여자, 예전에는 숭배받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그녀는 몹시 불결하고 언제라도 재앙과 질병을 몰고올 저주스러운 존재다.

"또 운명이라고 할건가요?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될지 알텐데도?"

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툭 말을 건넸다. 내말에 그라이아이는 움찔거렸다. 사람들은 그날밤 우우 몰려가 사안이라 일컬어지던 그녀의 붉은 색 눈동자를 발갛게 달군 칼로 도려냈었다. 그리고 남은 한쪽 눈으로 보라고 그녀의 발앞에 그것을 던져버렸다. 뿌드득. 나는 단단한 신발 밑창에 짓눌려 붉은 핏물을 토해내며 터지던 그녀의 한쪽 눈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어차피 그들은 내 말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럴테죠."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이아이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까마귀의 아이. 그게 네 운명이다. 얼마안가 우리 트라이아에는 거대한 열기가 몰려온다. 사람들이 열기에 미쳐 뛰는 모습을 보게 될게다. 그럴때는 오히려 광기가 더 아늑해 보여 정상인 자들조차도 그안에서 안식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럴때면 그녀의 쉰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자장가처럼 부드럽고 온화해진다. 눈을 감고 경청하고 싶을 만큼.

"너는 그 광기속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까마귀처럼 관조하는 눈으로. 오히려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졸립다. 하지만 난 눈을 떠 그라이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난다. 사람들의 저벅거리는 발자욱 소리가 저멀리서 들려왔다. 그들은 그라이아이의 집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뭐라고 중얼거렸지?"

그라이아이는 웃으면서 먹고 있던 빵조각을 내밀었다. 남자는 빵을 내미는 손을 걷어찼다.

"치워. 재수없는 마녀."

나는 숨어 있던 곳에서 그라이아이가 영주의 병사에게 걷어채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라이아이는 저주받은 마녀인 것이다. 사안을 잃고도 영주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 마녀. 그리고 이곳은 그녀의 집이자 마지막 안식처이며, 유배지인 것이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라이아이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 즉 내 할머니였다.


내 어머니의 이름은 그라냐, 그녀의 어머니의 이름은 그라이아이. 그리고 그들의 딸이자 손녀인 내 이름은 에리시나. 고대어로 정당한 복수, 혹은 그러한 복수의 행위자를 의미했다.

그라이아이는 처음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절망했다. 왜냐하면 그날이 영지에서 추방당하던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라이아이의 방에서 상아로 만든 작은 여신상을 발견했고, 그녀를 마녀라고 부르며 광장으로 끌어냈다. 그라이아이는 그곳에서 욕설을 내뱉고 지나가던 말이 흘린 말똥을 주워먹었다. 당시에는 미친 사람에게는 관대해서 간혹 형집행을 멈추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친 짓 덕분이었는지 그라이아이는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풀려났다. 열달후 사람들은 영지에서 쫓겨난 그녀가 다시 와서 얼쩡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의 팔에는 어린 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이가 네다섯살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라이아이가 정신병자이고 마녀라는 이유로 아이를 그녀의 품에서 떼어놓았다. 사람들은 아이에게 세례를 주고, 그라냐라는 이름도 주었다.

그라냐는 여느 평범한 소녀와 다름없이 자랐다. 그녀의 양부모는 그라냐를 친딸처럼 키웠다. 그라냐가 열 일곱이 되었을 때, 그녀는 동네의 청년과 결혼해서 가정도 꾸렸다. 그러나 남편이 이웃한 영지와의 전쟁에서 죽은지 얼마 안되어, 사람들은 그라냐가 그라이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그라이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라냐를 마녀로 몰아갔다.

그라냐는 그라이아이와는 달랐다. 지금도 내눈에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선하다. 그녀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그녀는 살기위해서 그라이아이처럼 미친 척하진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더 연기하지도 않았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를 집어삼켰을 때, 그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나는 멀리서 하염없이 지켜봤다.

다음해 봄축제가 열렸다. 화형대가 섰던 바로 그 광장에서. 나는 평범한 소녀들처럼 화환을 만들었다. 사실, 고아인 소녀가 할 수 있는 돈벌이수단이라야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매년 봄축제는 성대하게 열렸다. 엘켄 영주가 직접 축제에 참여했을 정도니까.

엘켄영주. 무감정한 짙푸른 눈동자와 회색머리칼, 매처럼 날렵한 실루엣정도가 그에 대한 내 인상이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젊어보이는 것은 그의 차가운 인상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게 아니다. 그가 막 준비된 자리에 앉았을때, 회색 눈의 그라이아이가 그의 앞에 뛰어들었다.

"저주를! 뜨거운 불길, 너희 스스로 일으킨 불길이 너희를 집어삼키리라!"

그라이아이가 그렇게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엘켄 영주의 옷자락을 붙잡자 영주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의 무감정해보이는 얼굴이 처음으로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공포는 영주자신뿐 아니라 모여있던 영지민 전체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전파되었다.

영주의 감정이 공포에서 분노로 바뀐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영주는 분노해서 소리질렀고, 그의 가병들이 그라이아이를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집 앞뜰에서 그라이아이의 한쪽 눈을 도려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라이아의 붉은 사안은 짓밟혔다.

 내가 사는 나라, 트라이아의 겨울은 음울하고 길다. 하루에 햇빛이 비치는 건 한두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밤의 시간이 길어지면, 온갖 무시무시한 전설들이 영지를 둘러싼 뾰족한 산봉우리를 타고 내려온다. 그 중에 하나가 마녀 이야기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길을 잃은 사냥꾼이 당한 불운한 재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길을 잃은 사냥꾼이 늑대에게 습격을 당하고 늑대의 발을 잘랐다. 그런데 불빛을 찾아 들어간 어느 귀족의 집에서 귀족과 자기가 당한 불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팔목이 잘린 귀부인을 목격한다. 늑대가 입은 것과 똑같은 부상을 입은. 이야기의 결말은 귀족이 그 마녀를 엄정한 법의 심판에 맡기면서 끝이 난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고 그 이야기를 듣지만 나는 하도 들어서인지 그다지 흥미는 일지 않았다. 다만, 너무 일방적으로 사냥꾼과 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게 아닐까할 뿐이었다.

꼭 그녀가 마녀였을리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귀족이 내연의 여자를 안주인으로 앉히기 위해 사냥꾼과 짜고 벌인 일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전설과 현실이 혼동되는 시대였으므로, 신체적 특징이나 기괴한 흉터만 가지고도 마녀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내연의 여자문제로 남편과 싸우다가 입게 된 상처일지도 모르고, 사냥꾼에게 그런 이야기를 꾸며서 사람들에게 퍼뜨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변신까지 할 수 있는 마녀가 왜 결정적인 순간에 변신해서 달아나지 못했을까. 나는 코웃음쳤지만, 이런 내 생각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러잖아도 사제들은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정말로 깨우쳤는지, 조모와 어머니가 했던 끔찍한 죄악을 참회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는 마을, 아니 영지전체가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단지 주말마다 교회를 빼놓지 않고 가는 것만으로는 이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죄악을 참회하며 나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야했다. 기도하고 채찍질하고 기도하고 채찍질하고. 기도하기 위해 앉았다가 일어설 때마다 막 굳어가던 상처가 갈라져 몹시 쓰라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의 감시를 피하고 싶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조차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마다 내 벗은 몸을 보려고 호기심어린 눈을 들이미는 아낙들로 창가와 문가가 소란스러웠다. 그들은 악마가 키스하고 나서 몸에 남긴다는 손톱자국이 내 몸에 나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퍼밀리어에게 먹인다는 젖이 나오는 젖꼭지가 하나 더 달려있는 게 아닌지 확인하려고 들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내게는 이런 소동이 너무 고역이었다. 이웃에 말이나 소가 병이들면 제일 먼저 의심받는 것도 나였다. 아무리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럴 때면 빨리 말과 소가 병이 낫기를 바라고 있거나, 교회에 가서 다시 한번 채찍질하며 참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내 눈앞에서 번득였다 사라졌다. 엘켄영주는 자신의 검을 무엇보다도 애지중지했다. 그가 내 앞에서 검을 저렇게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검에 비치는 노을 빛이 유난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매끈한 검 표면위로 물감처럼 번져나가는 노을은 검 전신을 붉게 빛나게 했다.

"병사들 말로는 그라이아이가 오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더구나."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곳까지도 감시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한 영지의 영주나 되는 사람이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그곳에 간 건 아니겠지. 너도 네 어미처럼 되고 싶으냐?"

"아닙니다, 영주님."

"회개해라."

엘켄은 짧게 한마디했다. 나는 묵묵히 그자리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있던 마가레트가 채찍을 건넸다. 나는 무거운 얼굴로 내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사이 나는 성안에서 일자리를 하나 얻었다. 사람들은 이일을 두고 수근거렸지만, 나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일정한 수입원이 생긴데다, 적어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로 나만의 착각이었다.   어떻게 해서 아는지 몰라도 내가 그라이아이를 찾아가는 날이면, 엘켄은 나를 자신의 서재로 부르곤 했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한마디를 툭 던질뿐이었다. 그러면 나는 내방으로 돌아가 거칠게 내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야 했다. 단지 여러개로 나뉘어 있던 시선이 엘켄한사람의 시선으로 좁혀졌을 뿐이었다. 무게가 더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철썩 철썩."

 어제 채찍질한 자국이 몹시 쓰라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자정이 될 때까지 말이다. 나는 미친 듯이 채찍을 휘둘러댔다.

 자정을 넘기자 사람들이 잠자리에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겨우 채찍을 내리고 무릎꿇고 있던 마룻바닥위로 쓰러졌다. 긴 머리채를 가진 바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친 내 뺨을 어루만졌다. 눈물 자욱이 패인 자리에서 투명한 얼굴의 물의 정령이 피어올랐다.

정령들의 말에 의하면, 그라이아이와 나는 고대 무녀의 후손이라고 했다. 내 이름, 에리시나도 그녀들이 섬기던 고대의 여신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다고 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어. 너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거야.'

'자기 자신도.'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바람이 내 머리칼을 훅 불어제꼈다. 사람들은 밤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상상의 괴물이 현실로 나타날까 두려워했다. 밤의 어둠에게는 그런 초현실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 맞았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정령들은 예전에는 낮에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요새 들어서는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했다.

'이게 다 저 뾰족한 쇠막대기 때문이야.'

 정령들은 교회의 십자가를 그렇게 불렀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숭배하면서부터 자신들이 건네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았고, 간혹 모습을 보게 되면 오히려 화를 내며 자신들을 쫓더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을 임프(소악마)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입어버린 정령들은 하나둘씩 활동을 멈추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자연은 전보다 더욱 무기력해져갔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연을 숭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연을 멸시하고 괴롭혔다. 남아있는 정령들은 자연이 곧 자신들처럼 잠들어버리게 될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라고, 자기들이 마지막 하나까지 잠들어버리지 않는 이상, 자연이 잠들일은 없을 거라고 그들은 내게 속삭여주었다.

 이제 정령들은 조심스럽게 밤중에서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아무에게나 보일 수도 없고, 가끔 나처럼 무녀의 힘과 혈통을 계승한자들에게나 보인다고 했다.

나는 죄악을 범하는 기분으로, 해방감으로 충일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가끔 도움이 되었다. 도움이 되는 약초와 해가되는 독초에 대해서 배웠고, 도움이 되는 약도 어떻게 하면 독으로 바꿀 수 있는지까지 배웠다. 나는 환상을 일으키는 독버섯가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몇가지는 실행에 옮겼는데 유리병안에 담긴 저 잉크처럼 검은 액체는 한방울만 들이켜도 곧바로 혈관이 굳어져 죽어버리고 만다. 사실은 나중에 내가 먹으려고 만들어 둔 건데, 언제가 될지는 나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령들은 계속 속삭이면서 나를 침대위로 옮겼다. 이불을 덮어주면서 바람이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언젠가 들어본 법한 노래, 하지만 나는 그 노래를 알아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으므로.


그라이아이는 뜨개질 감을 내려놓았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그라이아이의 둔탁해져가는 청각을 사정없이 때렸다.

"누구요?"

그라이아이는 의자속에 파묻은 몸을 웅크리며 물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라이아이."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라이아이는 뜨개질 감을 다시 집어들었다.

"너구나, 그라냐. 오늘은 왠일로 왔니?"

남자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라이아이는 하나 남은 눈을 뒤룩거리며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착한 아가는 울지 않아요, 엄마가 불러주는 노래에 잠들지요."

"정말 나를 못 알아보는 건가? 사람들이 말한 대로 정말 미친 게 맞는 건가."

남자는 안도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보았지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했다. 엘켄은 그라이아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해님도 달님도 방긋방긋, 착한 아이는 울지 않아요."

자신을 바라보며 백치처럼 웃는 그라이아이를 보며 엘켄은 한순간 그녀의 마지막 남은 한쪽 눈마저 뽑아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예전의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추악한 외모의 노파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마법이었겠지. 너는 마녀였으니까.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내게 마법을 건게 틀림없어."

엘켄은 주먹을 쥐었다.

"에리시나도 그라냐처럼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아이에게 접근하지 마."

엘켄은 등을 돌렸다. 그가 떠난 후에도 그라이아이는 한참동안 "착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는 노래를 반복하고 있었다.



 달빛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엘켄은 자신이 왜 그러는 지조차 알지 못하고 소녀에게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소녀는 자랑스럽게 약초를 잘게 써는 도구와 약사발 따위를 보여주었다.

'여기가 내 집이야.'

소녀가 속삭였다. 눈을 마주치면 안 돼. 사안과 마주치면, 조종당하고 말아. 엘켄은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외쳤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셨어.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소녀는 찬장 한켠에서 상아로 만들어진 작은 조각상을 꺼내 보여주었다.

'예쁘지? 어머니가 고대 문명의 폐허에서 주워온거래.'

소녀는 지금은 없는 소녀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상아조각을 불빛에 비쳐 보였다.

'어머니는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대. 트라이아 전지역을 다녔대. 젊었을 때는 집시 패들을 따라다녔다고 하니까. 여기서 아버지를 만나 정착했대. 믿어져? 날 가졌을 때 우리엄마 나이가 서른을 넘겼다니까.'

열여섯의 소녀는 킥킥 조그만 소리로 웃었다.

'난 빨리 결혼할거야. 노처녀는 너무 궁상맞잖아? 늦게 결혼해서 늦게 애 가져도 마찬가지고.'

소녀는 도로 찬장에 조각을 집어넣었다.

'어때, 상처는 많이 나았어? 그래도 무리하면 안 돼.'

소녀는 엘켄의 부러졌던 다리부분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엘켄은 말에서 떨어졌던 일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엘켄은 혼자서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끙끙 앓고 있었다. 며칠 전 소녀에게 이 사실을 들키기 전까지는.

소녀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정확했다. 부러진 부분을 교정하고나서 소녀는 말했다.

'큰일 날뻔 했다. 그대로 붙었으면 어쩔 뻔했어.'

지금은 부러진 부분이 꽤 나아서 부러졌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소녀는 찬장에서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다가 찻잔을 꺼내왔다.

'향기 좋지? 세이지야.'

허브 잎을 띄운 물결이 조그맣게 출렁였다.

'바닐라를 조금 넣어봤어. 설탕은...아쉽게도 구하기 힘들어서 넣지 못했어.'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허브차는 향기로 다가와 마지막에는 약간의 씁쓰름한 맛을 남기며 목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나른한 분위기 탓일까. 엘켄은 방심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사실을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소녀는 엘켄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처음 생긴 친구가 기뻐서인지 소녀는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엘켄은 소녀의 이야기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언뜻 소녀의 붉은 눈동자를 봐버렸다.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사안이라고 중얼거리던 오른쪽 눈동자.

'왜 그래?'

소녀가 창백해진 엘켄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다가오지마!' 

그토록, 이곳에 오면서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제 난 꼼짝없이 저 마녀의 포로야.

'어디 아파?'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엘켄은 소녀의 손을 뿌리친다는게 그만 소녀의 어깨를 때리고 말았다.

'아얏!'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져버렸다.

'아파.' 

막 문지방을 넘어서려는데 소녀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그대로 나가야 하는데, 도망처야 하는데. 엘켄은 고개를 돌렸다.

다시한번 소녀의 오른쪽 눈동자가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엘켄은 홀린 듯이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라이아이.' 

'응, 왜?'

소녀가 물었다. 엘켄은 말없이 소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소녀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온기와 함께 젼해져왔다. 소녀는 아무런 저항없이 엘켄의 품안에 안겼다.


여자의 거친 숨결이 젊은 엘켄의 귀를 간지럽혔다. 엘켄은 여자의 붉은 오른쪽 사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안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는데도, 그순간조차 손은 가증스럽게도 쾌락에 탐닉하고 있었다. 매끄럽게 굴러가는 자신의 손길이 경이로울 정도다.

'떠날거지?'

여자가 문득 절정의 순간에 물었다. 엘켄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부의 드레스를 입는 게 꿈이었는데.'

여자는 한숨처럼 말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아. 뭐, 난 집시의 딸이니까.'

엘켄은 그녀를 슬며시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엘켄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람은 다소 언짢은 기분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생긋 웃으면서 새로 교구에 임명된 사제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쭉 가면 영주님의 관저가 나옵니다."

소녀의 붉은 빛을 띤 갈색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람은 젊었을 때 트라이아를 떠나 헬레니스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몇년동안 대학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이제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후에야 고향 트라이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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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Nosferatu 2006.03.07 05:06
길면 몇 토막 짤라서 연재형식으로 올리면 되죠^^
그렇잖아도 싸이 게시판이.. 일정분량이 넘으면 에러나면서
안 올라가더라구요..
아까 무식하게 다 긁어다 붙였더니만.. ㅋ
넹...하지만 꽤 긴데요.
Nosferatu 2006.03.06 17:58
퍼가요~emoticon_038
꽹과리 2006.03.0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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