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총독 빌라도 - 1장 본디오 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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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총독 빌라도 - 1장 본디오 빌라도

김춘봉 0 3,328 2004.08.16 04:43
 

 

(부제; 서기 30년대 예루살렘 이야기 )


(차례)
1장 본디오 빌라도
2장 요셉 가야바
3장 사람의 아들
4장 유월절
5장 빈 무덤
6장 도굴사건
7장 에필로그



1장 본디오 빌라도

                                     (1)
  본디오 빌라도는 부인 프로크라가 속주총독으로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나이 40을 넘기면서 보람 있는 일을 해보고 싶던 참이었다.

아우구스투스(BC~AD14년) 황제의 손녀딸인 그녀가 티베리우스(AD14~37년)황제를 만나고 돌아온 얼마 후, 빌라도는 총독 직책을 제수 받았다.

그런데 기뻐해야 할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하필이면 유대야!”
이렇게 투정하는 그를 향해
“당신 이름 때문이에요. 빌라도(피라투스)는 창으로 무장한 자라면서요? 유대와 같은 속주에는 정무보다 군무에 밝은 사람이 가야 해. 황제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는 처가 덕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름 덕도 본 셈이다. 그런데 빌라도라는 이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개명을 생각해 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원치 않은 이름을 갖게 된 것을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샘니움족과 싸워 이긴
사령관이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샘니움족은 용맹스러웠다고 보고 했을 것이고, 샘니움족 사내들은 아들 이름을 지을 때, 병기의 명칭이나 전투 용어를 갖다 붙이면서 너도 용맹스러운 사내가 되라. 이렇게 속삭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다른 속주 자리를 생각하면서 청을 넣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총독은 아무나 하는 관직이 아니다. 600명이나 되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 총독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많다.
로마의 상류사회에서 행세께나 하려면 총독을 거처야 했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기사계급에 속한 사람에게는 행운이다. 유대가 아니라 그 보다 더 지독한 곳이라 하더라도 감지덕지 달려가야 할 판국이다. 이렇게 생각을 굳힌 그는 떠날 채비를 했다.

  빌라도가 유대로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친지들이 찾아왔다.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또 마음이 상했다. 축하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잘해보시오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2)

  마침 유대총독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AD15~26년)와 만날 수 있었다. 발레리우스는 선배로써 후배에게 전수해야 할 일들을 소상하게 일러주었다. 그래서 유대에 대한 정보를 나름대로 숙지할 수 있었다.


 -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에 간섭하지 않는 한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 간혹, 반란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헤롯 일가에 대한 도전이다. 헤롯이 죽고(BC 4년), 그의 아들 아겔라오와 안티바 그리고 빌립이 분할 통치하던 초기에, 갈릴리 출신 유다란 자가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 자는 에제키아 아들이기 때문에 아비와 마찬가지로 ‘헤롯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 부친은 이두메 출신이고, 모친은 나바티아 여자다. 아스칼론의 아폴로 신전에 매여 있던 어느 이교도 손자라는 소문도 있더라.’ 이렇게 비방하다가 시리아총독 바루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때, 백성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으며 모든 화근은 헤롯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제들 말이 입증된 셈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제들은 유대 왕 무용론을 주장해 왔다.


  - 아겔라오를 몰아내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란다. 사제들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탄원서를 올렸다.

‘헤롯의 자식들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아겔라오란 자는 어찌나 포악한지 그들의 숙적 에제키아 씨를 말려버릴 생각에 유아살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진정서를 무시해버렸다. 유대인들의 특수성, 종교와 정치를 구별하지 못하고 율법을 앞 세워 똘똘 뭉치는 그들의 결집력 때문에 이들을 제압할 강력한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헤롯은 이 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헤롯의 아들들에게 유대를 맡기고 싶은 것이 로마황실의 방침이기도 했다.


  - 이러한 의도를 헤아리기나 한 것처럼 예루살렘 사제들은 다시 대표단을 파견하면서 황제와 협상을 시도했다. 협상의 내용은 알려진 바 없지만, 아겔라오를 몰아내고 총독을 보내주면, 대제사장 예복을 맡기겠다는 제안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대총독 코포니우스(AD5~9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날 사제들은 자진해서 대제사장 예복을 안토니요새에 맡겼으니 이런 추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 결과를 놓고 동기를 유추해내기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사제들은 매우 파격적인 결단을 내린 것 같다. 왜냐하면, 로마 군단의 독수리 깃발만큼이나 상징성이 강한 대제사장 예복을 안토니요새에 맡겨놨으니, 만약 이 사실이 백성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어떤 시태가 발생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 속죄일에 예복을 가지고 가면서 은밀하게 일을 진행시킨다고 했다.


  - 어찌됐거나 집권 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아겔라오는 먼 나라로 유배를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코포니우스를 비롯해서 로마인 총독이 오게 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안티바와 빌립이 계속 군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로마황실의 일관된 정책 속주국은 분할 통치한다는 방침에 따랐을 뿐이고, 사제들 관심사는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안티바(BC4~AD39년)와 빌립(BC4~AD34년)의 자리보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특히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사제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협상하기 위하여 대표단을 파견할 때 사마리아 장로들이 협조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가짜를 대표단에 포함 시켰다고 합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마리아인들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내가 이 사실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은 내 소관과 무관한 일이기도 하려니와, 로마황실이 알았다고 한들 뾰족한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덮어 두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제들이 대제사장 예복을 맡기면서까지 아겔라오를 몰아낼 생각을 했던 것은 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이방인 출신이라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아겔라오와 안티바는 사마리아의 말타케 출신 여자의 소생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시각에서 볼 때, 구다인의 몸에서 태여 난 형제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로마인 상전을 모시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지요.”
그라투스는 이런 말도 했다.
“사마리아인들은 수백 년 전, 페르시아에 있는 구다란 땅에서 이주해 온 부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하면 배타적인 어휘로 사용할 때 쓰는 말이고 구다인하면 지독한 욕설이니 이 점 참고하세요.”

이토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한 사마리아를 둘러보게 된 것이다.


                                        (3)
  사마리아 장로는 빌라도 총독을 그리심 산으로 안내했다. 일행은 주춧돌이 사방에 널려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산 아래는 도성이 내려다보이고, 도성 안에는 크고 작은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사마리아 장로는 총독이 예루살렘 성직자들 보다 먼저 자신들을 찾아 준 것에 대해서 만족해하면서 유대역사를 들려주었다. 솔로몬 왕이 노환으로 죽은 다음 아들들에 의하여 나라가 둘로 나누어지면서 남쪽지방은 유대왕국, 북쪽지방은 이스라엘왕국이 세워지고,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야훼가 약속한 땅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로는 넌지시 그리심 산 보물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유대왕국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 그곳 사람들은 전쟁포로로 잡혀가지만 이쪽 사마리아 사람들은 무사했다면서 그 때 솔로몬 성전의 보물을 옮겨 놓았다고 했다. 

“여기 어딘가에 솔로몬 성전에서 사용하던 집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장로의 태도가 하도 진지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땅이 파여진 흔적이 있다. 지금도 소문을 믿고 도굴에 나서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보물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깊은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험준한 산세도 아니다. 그리심 산은 여니 산과 마찬가지로 밋밋한 능선이 고작이다.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저토록 무모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지 사람들이 저 짓을 한답니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었다.

“이 곳 성전은 어찌되었습니까?”

“경전을 돌려달라니까 불을 지른 것이지요.”

장로의 대답에 총독은 어이없어 하면서,

“경전이라니요?”

“토라의 원본(신명기)을 우리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쪽에서 성전을 수리한답시고 법석을 떨더니만 원본을 찾았다는 겁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직자들을 의심하게 되면서 경전을 돌려달라고 하자, 당시 대제사장 지위에 있던 요한 히루카누스(BC 134~104년)가 무장한 사람들을 보내 성전에 불을 지르고 이곳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4)

  유대인들이 헤롯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사마리아인들의 헤롯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헤롯은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로 개명하고 유대의 행정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정실부인 마리암메가 죽은 다음에도 아홉 명이나 되는 여인 중에서 특히 사마리아의 말타케 출신 여인을 가까이 했으며, 유산을 상속함에 있어서도 그녀의 장남 아겔라오에게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차남 안티바에게는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을,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이름이 같은 이집트 여인에게서 태여 난 빌립에게는 유대북부지역 가을라니티스, 바티네아,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를 주었다.

  헤롯은 자신의 집권기간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의 예루살렘 출입을 허용했으며, 아겔라오도 두 지역 주민의 화해를 정책적으로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사제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 뜰 이상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사제가 번갈아 시중드는 타미드 번제물 시간에도 사마리아 장로의 동참을 방해했으며, 성전에서의 역할 분담을 한사코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헤롯 부자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예루살렘을 찾는 사마리아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했다. 그래서 아겔라오가 추방당한 얼마 후,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해(AD8년), 유월절이 임박한 시점에서 누군가에 의하여 사제의 뜰에 사람의 뼈가 뿌려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월절 행사가 취소되고, 범인 검거를 위해 법석을 떨다가 범인을 잡지 못하게 되자, 앙숙처럼 여기던 사마리아인들을 의심하면서 급기야 예루살렘에 와 있던 사마리아인들을 폭행했다.

  당시 코포니우스 총독이 군대를 동원해서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하긴 했지만 그 후, 사마리아인들의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고 두 지역 주민의 원한관계는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를 위시해서 전직 총독은 가이샤라에 거주하면서 축제기간 중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 생각은 달랐다. 예루살렘을 제외시킨 유대 통치는 무의미하다고 여긴 나머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매사를 자신이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예루살렘이 성스러운 지역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 생각이고, 로마인 입장에서 볼 때 경제적 특구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곳에서도 황제의 권위가 세워져야 했으며, 이것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통치 이념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이사랴의 관저에 여장을 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직행하는 중이다.


                                      (5)

  총독은 사마리아인들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면서 마차에 올랐다.

호위 기마 병사들이 앞을 섰다.

출발 신호를 보내자 일행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 시각, 예루살렘은 신임 총독을 맞이하는 도시치고는 너무도 조용했다. 백인대장 스르피티우스가 달려와서 총독의 행차를 알렸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총독 맞을 준비를 하다가 그의 장인 안나스로부터 핀잔을 받은 후로는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안나스는 예루살렘의 실세다. 그는 아겔라오 몰아내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총독과 무관한 지역이기 때문에 빌라도를 위한 번거로운 행사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안나스는 발레이우스 그라투스가 유대총독으로 부임하던 해에 대제사장 지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총독이 자기 후임으로 이스마엘 피아비1세를 임명하자 그를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엘루아살이 대제사장 지위에 오르게 했다.

  다시 총독이 안나스 세력을 누르기 위해 카미토스의 아들 시몬을 임명하자 다시금 총독과 안나스의 힘겨루기가 진행되다가 안나스의 사위 요셉 가야바(AD18~37년)를 대제사장에 임명하는 선에서 두 사람은 화해를 했다.

말하자면 요셉 가야바는 안나스와 총독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절충안으로 등장하게 된 인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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