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기독교 죄악사-조찬선>에서 발췌 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모범적인 신도가 어떤 이유로 십일조 헌금을 한 번쯤
바치지 못하였거나 혹은 옛 친구를 만나 맥주라도 한 잔하면
무슨 비난이나 벌을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불안을 느끼고 죄의식을 가짐으로써
저자세가 되게 하는 교육에 주력해 온 것 같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희망을 얻기보다는 도리어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것 같다.
많은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화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x집사는 옛친구를 만나 맥주파티를 하다가 같은 교회 y장로에게
우연히 발각되었다. 그 장로는 교회에서 암암리에 x집사를 가짜집사라고
비난하였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갔다.
그리하여 그 집사는 맥주 한 잔으로 평생 가짜 신자로 몰려 장로 진급의 길도
막히고 또 위선자로 낙인 찍혀서 가는 곳마다 암암리에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장로는 하루도 술 없이는 살지 못하는
술고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숨어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로라는 신분 때문에 위선과 기만을 계속해야만 했다.
문제는 맥주와 술이 아니다.
위선과 기만이 교회라는 구조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집사, 장로 그리고 목사도 교회라는 틀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위선과 기만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 집사와 장로가 교회 밖에서 살았다면 그들의 음주는 위선으로
가장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교회 안에 살기 위해서 신도들은 스스로를 위선의 죄인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 그것은 통성 기도 시간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도할 때는 대체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이나 혹은 '부족한 종,
이 죄인' 등으로 시작한다.
신도자신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 즉 노예로 격하시킨다.
‥‥‥ 부흥회가 열리면 그때는 교회가 애매한 신도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드는
'즉석 죄인 대량 생산공장'으로 변한다.
‥‥‥ 결과적으로 교회는 죄를 사하는 곳이 아니라 죄인을 만드는 곳으로
변모했다. 이것이 교회의 정당한 모습일까?
‥‥‥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모든 신도들은 교회가 떠나갈 듯한 통곡의 기도를
올린다. ‥‥‥ 그런데 집사쯤 되고 보면 체면상으로라도 일반 교인들보다는
좀 더 두드러진 고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집사가 그렇게 톤을 올리게 되면 옆자리에 있던 권사는 체면상 집사보다는
더 높은 고음을 발하며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쇼를 보일 만도 하다.
또 그들에게 비하면 장로는 말할 것도 없다.
안 나오는 눈물도 뿌려야 하고 콧물, 눈물로 뒤범벅 된 얼굴을 보여 주어야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연습을 거듭하는 동안에 그런 위선과 기만이 몸에 배여 생활화되고
부지중에 성격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통성 기도 후에 강사는 때를 놓칠 세라 계획했던 헌금을 강요하는 때도 있는데,
신도들은 마치 교도관 앞에 선 죄인의 심정으로 강사가 불러대는 액수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구원과 은혜에 대한 감사헌금이 아니라 죄에 대한 벌금이다.
그리고 그들은 의무감과 죄의식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라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