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피리님과의 대화

풀피리님과의 대화

한님 0 2,703 2011.08.30 18:51

<예술가님의 "바트어만의 고백"을 읽고>  글쓴이 : 풀피리

 

성경의 오류와 무오에 대한 변론 와중에 몇 일전
예술가님께서 올려주신 바트어만의 “성경 왜곡 역사”라는 저서의
서문인 것 같은 글을 읽고 개인적인 소감이 있어 
몇 가지 느낌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바트어만이라는 신학자에 대해 
그가 신약성서 본문비평학자라는 것과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저술을 했다는 것 외에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또한 그의 저서를 읽어 본적도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의 저술의 간증과 같은 서문에 대한 
극히 제한적 인상비평일수도 있다.
그가 그의 저술이 개인적인 책이라고 고백했듯이
나 역시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이다.


먼저 그가 학문의 여정을 가면서 선택한 수학 과정이 
그의 성서에 대한 가치관을 변경하게 했으며
결국 그의 신학과 신앙이 전면 수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여졌다.
무디 성서학교에서 휘튼 college,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 이르는
학문과정은 그의 신학 입장이 어떻게 출발했으며
어떤 종착역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짐작 게 한다.

그는 어린 시절에 만난 부르스라는 사람을 통하여 거듭남을
체험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부르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만약에 F.F 부르스 라면 신앙의 동지로 사람은 제대로 만났다고
생각 되어지는데 두 사람의 신학은 영영 갈리고 말았다는
아쉬운 생각마저 들게 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F.F Bruce는 보수주의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바트어만의 신앙입문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사람이 부르스라면,
오늘날 그의 신학사조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람은 사람도 
역시 부르스라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F.F 부르스가 아닌 부르스 메쯔거(Bruce Manning Metzger) 말이다. 

부르스 메쯔거는 당시 프린스턴 대학의 사본학 교수로써
바티칸 사본을 기초로 한 네슬레 판의 역본인
RSV와 NRSV 성경의 편집 위원장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말로 소개된 성경 비평학 관련 서적 대부분이 
이 부르스 메쯔거 교수 주변인들의 저술이라고 알고 있다.

부르스 메쯔거와 같은 교수의 수학 하에 프린스턴 신학의
옷을 입게 된 바트어만의 신학적 사조는 그의 처음 신앙을
합리적, 이성적 사유 안의 제한을 두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는 성경을 자신의 사유의 한계 안에서 생각 되어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쓴 인간의 책”이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성경의 오류들에 의구심을
극복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그가 인용한 마가복음 2장의 내용을 보면 
아비아달과 아비멜렉에 대한 난해한 구절이 있다.
그는 스토리 교수의 마가복음 주석을 사사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스토리 교수에게 어필한바 
“마가가 실수한 것이겠지”라는 황당한(당시 그로써) 답변을 듣고
바트어만 자신도 비로서 “맞아 마가가 실수한 것이겠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이후 그의 성경의 영감에 대한 신뢰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인간이 쓴 지극히 인간적인 책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이 내용을 읽고 나는 개인적으로 학문과 스승이 신앙도 180도 
바꾸어 놓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고,
무엇 보다 도 몇 사람의 척도에 의해서 성경의 상황과
모습이 판단되고, 그것이 마치 진실된 결론처럼 선포되는 
가벼운 성급함을 보게 하는 듯 하였다.

30년, 50년, 아니 일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분석했다 한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전수되어온 성경의 진실과 진면목을
어찌 다 파 해쳤다고 장담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본다.
메르쯔거 교수의 사본학이나
바트어만의 본문 비평학과 같은 분야는 
한 사람의 일 평생이라는 연구 기간에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삼상21장의 제사장 이름이 마가 복음에서 다르게 표기 된 것에 대한
그럴듯하고 타당스런 추론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런 추론(원본이 없기에)은 재고함 없이 일축해 버리고
마가의 단순한 실수로 단정해 버리는 것이
학자적인 자세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고 문서, 특히 신앙 안에서 성경의 원문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연구하고 학문하는 사람의 모양이라면 의아할 뿐이다. 

한번 생기기 시작하는 의문은 결국 무리한 가정에 가정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의식구조가 아니던가?   

사실 그러한 의문이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하는 것 같다.

서문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저서에서 
그는 성경이 여자들의 역할을 축소 내지는 왜곡했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바울 서신과 행전에서 여자들의 입지를 좁히는 내용을
후대에 임의로 첨가하거나 내용을 변형시켰다는 주장인듯하다.
그런데 과연 여자들의 역할과 위치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그럴 필요가 있었을지 정말 의문이다.
그리고 바트어만이 지적한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마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예를 들어,
고전14장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는 구절은
후대에 첨가된 내용으로써 여자의 중요성을 비하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하는듯 하다.
여자들에 입김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계략이라는 뜻일까?
과연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연구 결과일까?

또 로마서 16장에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는 내용에서
브리스가라는 남편의 이름을 아굴라라는 부인의 이름보다
앞에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여성 차별이라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는 어필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쯤이면 다른 구절은 아예 찾아 볼 필요도 없다고 본다.


나는 다원화, 에큐메니즘화된 신학자들이 무리한 가정과 보편화의
춤을 출 때마다 느낄수 있는 것은 이성과 합리를 추구한다는 것이
꽉 막힌 이성으로 맹신을 한다고 비난 받는 신앙인들 보다
탁월한 것이 무엇인지 의아할 뿐이다.

그들은 완전한 탈 신앙도 아니요,
그렇다고 완전히 과학적 합리적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잿빛 옷을 입었을 뿐,
예복 없이 잔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바트어만이라는 사람은 자기 개인적으로 학문을 통한
기독교 성경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었다고 할지는 몰라도
자신의 신앙과 영혼을 학문과 시대적 사조에 굴복시킨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류와 변개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책이라는 결론을 얻어 왜곡의 역사라는 저술을 하였다면 
그에게 있어서 성경과 고 사본 연구가 더 이상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어
자신의 영혼을 지탱할 수가 있을까 의문되기 때문이다.
 
그의 글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책이다. 
나의 긴 신앙 여정의 최종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처럼 개인적인 책이 얼만큼 역사적 고증을 가지며
어떻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신앙을 확보할 것인지
질문해 본다.
또한 그의 저술이 개인의 긴 신앙 여정의 
최종 종착역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지는 몰라도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진실에 대한 최종 종착역은
결단코 아니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족) 
위 글은 짧은 서문에 대한 극히 제한적 느낌의 글임을 
시인하며 차후에 그의 저서 전체를 읽을 기회를
갖는다면 어떤 다른 시각을 갖게 될 수 있을지 
제 자신도 궁금해 지는 심정입니다.  

개인적 소감의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풀피리님의 글을 읽고>     글쓴이 : 예술가

 

본문비평은  "신학의 7대 혹은 8대 비평 분야"중  첫번째 순서로 
누구나 말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학문 분야지만, 
일반인이 접근하기는 매우 어려운 분야 입니다.  
기본개념만 숙지하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리며, 이 기본개념 없이는  
마치 암호로 써여진것 같은 그내용을 도저히 따라 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민**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면,   
본문비평 이라는 학문은 "보수교단에서 생각하는것과는 달리 상당히  
위험하고 진보적인 학문 이다."라고 강조 하면서 시작합니다.  
위험하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근본주의적 사고로는 저항할수 없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민** 교수님은 당연히 복음주의 신학자이며, 
한국에서는 본문비평 분야의 권위자 입니다. 
메쯔거 교수님의 자료를 많은 부분 인용하면서, 
민교수님은 그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성경의 사본수는 약 25,000개 있고, 그중 일치하는 본문은 단 한종도 없고,  
신약의 본문비평은 이중 약 5,700종을 가지고 합니다.  
파피루스 : 118개 (p1, p2………..)  
대문자 사본 : 318개 (바티칸사본, 시나이 사본 ………)  
소문자 사본 : 2877개 (주로 8세기 이후 사본등)  
성구집 : 2433개   
 
워낙 강의 내용이 암호수준이라, 관심이 적은 사람들이나, 
처음 참가한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강의 입니다.  
 
바트어만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주로 보이지만, 
변개된(사실 변개라는 용어를 않쓰고 변경이라는 용어를 씀.) 본문이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 합니다.  
왜냐하면, 후대에 첨가된 증거가 있기때문이죠…  
 
풀피리님이 제기하신 고전 14장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부분에 대한  민**교수님의 설명을 살펴 봅시다.  
 
" 이 35~36절 구절은 후대에 삽입된 구절일 가능성이 있다.
  (초기 사본에는 없기때문..)   
  그러나, 어만의 주장처럼 누군가 당시 교회의 전통에 따라 고의적으로 
  변개 한것이라 보는것은 문제가 있다.  
  당시 수많은 필사를 거치면서, 누군가 필사과정에서 본문옆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구절을 메모해 놨었고, 
  이후 다른 필사자가 비고의적인 실수로 이 메모를 본문에 첨가하게 되고,  
  그후 또다른 필사자가 그 내용을 본문과 일치 시킨것일 것이다…….."  
 
자, 위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본문이 변경된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필사자가 고의로 변경시킨것이 아니라, 우연히, 매우 우연히 
본문 옆에 잠시 메모해둔것을 후대 필사자가 실수로 본문에   
넣은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고의적인 변개(그들은 변경이라 함.)는 없었다라 합니다.  
이런 가설이 개연성을 얻을려면, 본문 옆에 잠시 메모해둔<…..잠잠하라>라는 
사본이 존재해야  하지만, 이런 사본은 없습니다.  

굳이 이 고전 14장35~36절을 제외하고도, 
우연한 매우 우연한 경우는 더더욱 많기 때문에  
위와 같은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수 밖에 없습니다.  
 
20세기이후 새로운 사본들이 발견되고, 연구논문들이 속속 나오면서, 
복음주의계열 학자들도 (민** 교수님을 포함한)  "교리적인 이유및 
고의적은 이유"로 본문이 변경되었다는 것에 일부 동의 합니다.  
하지만, 이런류의 변경(변개)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조직적 으로 자행된 일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였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본문변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할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런주장은 "성서고등비평"쪽으로 가면, 
산산이 부서지는 참담함을 맛보게 됩니다.  
역사, 사회, 경제, 정치, 전쟁, 등 성서외적인 다양한 요소들(외적증거)이 
"개인적이고 사소한 변개-교리적인 변개를 포함한-"를 더이상  
지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원하시면, 헬라어 원문으로 각종 사본을 암호수준으로 적고, 
 그것을 해석하고, 구약의 전승과 비교하는 본문비평 내용을 
 올려드릴수도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성서의 변개는 그리 "단순하고 간단한 시각"으로 볼수 있는게 아니다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혹자는 "본문비평"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성경이라는것이 대체적으로 완벽하게 원본수준으로  
복구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원본수준으로 본문을 제구성 할려는 
작업은 무의미 하다라는 뜻이며.  
이는 원본의 재구성은 "사실 도저히 불가능 하다"는 고백임인 동시에, 
이제는 성경의 낱말수보다 많은 이문의 바다에서 
무엇을 선택하는냐를 결정해야할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주의나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비평신학"이라는게 상당히 위험한 
학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처럼 "아주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기도하고, 
"회색분자(대체로 다원주의 경향)"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전문 신학의 발달"이 복음주의 위기를 초례하기에,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자가 가끔 있습니다만,  
한뼘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는 없는법, 
근본주의는 그 근본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게 현재상황 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쏫아져 나오기 시작한 "교회의 위기….",
"교회는 바빌론으로 유수되었다….." 등 근본보수주의의 위기를 논하는 
논문성 글이 작금은 별로 신선하지도 않게 여겨 질 정도로, 
근본보수주의는 그 붕괴의 가속도가 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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