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트 어만의 고백(간증)

바트 어만의 고백(간증)

한님 0 3,919 2011.08.30 18:50
아래글은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책을 쓴 "바트 어만"의 신앙간증 같은
고백의 글입니다.
"성경 왜곡의 역사"란 책의 저자 서문으로 실린것을 일부 발췌 하였습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노가다" 혹은 "하등비평"이라 불리우는 "본문비평"
분야의 학자로써, 그가 남들이 마다하는 그 길을 가게된 과정과 변화된 시각,
학자의 양심, 학자의 책임등을 느낄수 있을 겁니다.


      <<성경 왜곡의 역사 _저자서문_>>      저자 : 바트 어만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심장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나는 매우 보수적인 곳에서, 그리고 매우 보수적인 시절에 태어나서 자란 셈이다. 
나는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성장기를 보냈다. 
5학년 때부터 우리 가족은 캔사스 주 로렌스에 잇는 성공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많은 성공회 교회들이 그렇듯이, 이 교회 역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갖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회였다. 우리 교회 예배 분위기는 진지하고 
엄숙했으며, 성서는 예배의 일부에 속했다. 
그러나 성서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았다. 
교회의 전통 및 상식과 더불어, 성서는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여겨졌다. 
주일학교에서 교사들은 실질적이며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거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더 중점을 두고 가르쳤다. 
 어머니는 성서를 꽤 읽으셧고, 자녀인 우리들이 성서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교리'보다는) 윤리적인 교훈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종종 확인하셨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성서가 신비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종교에나 있는 그런 중요한 책 말이다. 
그러나 배우고 익혀야 할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서가 유물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왠지 하나님이나 교회나 예배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혼자 성서를 읽거나 연구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 생각이 급격하게 바뀐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거듭남'을 체험했고, 그 일은 내가 다니던 교회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범생이긴 했지만 전형적인 '주변인'이었다. ... 
여러가지를 해보았지만 공허하였다. 
일요일마다 신부님의 잔일을 돕는 복사 노릇을 하는 착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돌아가더라고 공허함을 달랠 수는 없었다. 
사실 토요일 밤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일날 아침만큼은 그런 착한 
아이여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사춘기에 겪는 외로움이었다. 
나는 그것이 사춘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으며, 
틀림없이 내 삶에 무언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기독청소년선교회라는 교내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 모임은 학생들 집에서 이루어졌었다. ... 그룹의 리더는 전업으로 이런 사역을 
하는 스물 몇 살 쯤 되는 부루스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청소년선교회 모임을 지역별로 결성했고, 고등학생들 회심시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난 아이들을 특별한 성서연구 모임과 기도회 등에 
참석하도록 유도했다. 
 부루스는 자유자재로 성서를 인용했는데, 
내가 보기엔 상당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내가 성서를 신비롭고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성서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하는 모든 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다. 
또한 거기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우리 교회의 예배 방식은 나이 든 기성세대에나 어울리는 구태의연한 
것이었을 뿐, 재미나 모험을 동경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공허함을 느끼는 
십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 짧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나는 브루스를 알게 되었고, 
그가 전해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예수님을 내 마음에 초청했고,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열다섯 살이었으며, 당시의 거듭남의 체험은 내게 새롭고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이때부터 평생에 걸친 나의 신앙 여정은 시작되엇다. 
그 길은 수많은 굴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때로는 막다른 길인 것처럼 보이는 곳도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그 지점은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길모퉁이인 적이 많았다. 
하여간 그런 길에 들어선 지 이제 30년이 훌쩍 넘었다. 
 
이와 같은 거듭남을 경험한 우리들은 스스로 '진짜' 기독교인이라고 여겼다. 
'진짜 기독교인' 이라는 말에는, 그저 당연히 교회에 출석하지만 사실은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전혀 진실하지 않으면서 
그저 흉내만 내고 있었던 사람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기독교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우리 자신들을 이런 보통 기독교인들과 구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성서연구와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성서연구가 그랬다. 
부루스는 정말 성서 그 자체였다. 
시카고에 잇는 무디 성서 대학 출신인 부루스는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질문에 성서를 인용해 대답할 수 잇을 정도였다. 
물론 우리가 결코 생각해 내지도 못할 질문에 대해서도 성서를 인용하며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새 그의 성서 인용 능력을 부러워하게 되었던 나 역시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성서를 읽고,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중요한 성구를 암송하기도 했다. 


ㅇ 글자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 
 
부루스의 설득으로 나는, 내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일과 기독교 신앙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내가 무디성서대학에 들어가 전문적으로 성서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특별히 생활 방식의 급격한 변화가 뒤따랐다. 
무디성서대학에는 학생들이 서명으로 서약해야 하는 윤리 '규범'이 있었다. 
술도 담배도 춤도 카드놀이도 영화도 일체 접하지 않고, 오로지 성서만 죽도록 
파고들겠다는 서약이었다. 
그 학교는 일종의 기독교 신병훈련소 같았다. 
어쨋뜬, 나는 어설픈 신앙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무디성서대학에 
지원해 합격했다.  1973년 가을, 나는 그 학교에 입학했다. 
 무디성서대학에서의 경험은 강력했다. 
나는 성서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으며, 그것은 곧 성서연구 및 조직신학 과목을 
많이 수강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양한 과목을 수강했지만, 거기서는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이 서명 동의한 
단 하나의 관점만을 배웠다. 
교수들이나 학생들이나 다음과 같은 서약문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성서는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에는 어떤 실수도 없다. 
 성서는 그 글자 하나까지도 완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다." 
즉 '축자영감설'에 대한 전적인 동의였다. 
 
내가 수강한 모든 과목은 이런 관점을 전제로 했고, 또 이것을 가르쳤다.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전부 오도된 것이거나 아니면 이단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세뇌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회지향적인 성공회 신자로서 자란 나로서는, 
성서를 보던 줏대없는 견해로부터 엄청나게 '진일보'한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철저한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러나 성서가 그 글자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축자영감설에는 명백한 문제점이 있었다. 
무디성서대학에서 초기 교과 과정을 이수하면서 우리들은 실제로 신약성서의 
원문서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난 훗날에 만들어진 필사본들이다. 
대개는 수백 년 후의 것들이었다. 
심지어 완벽하게 정확한 필사본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사본들을 만든 필사자들이 실수로 혹은 고의로 본문을 여기저기 
변개시켰기 때문이다.  모든 필사자들이 그렇게 했다. 
따라서 우리는 '원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의 자팔 원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자필 원고에 나타났을지도 모를 영감으로 된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자필 원고를 베낀 사본만 가지고 있는 셈이다. 
오류투성이의 사본 말이다. 
그러므로 
(1)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2) 우리가 영감으로 된 성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가장 급박한 당면 과제는 성서의 '원본문'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무디성서대학의 많은 친구들은 이 과제를 그다지 중요하거나 흥미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필 원고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주장에 만족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자필 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 문제는 대충 넘어갈 사안이 절대 아니었다.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처음에 기록된 성서 말씀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처음의 그 말씀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다면, 필사자들이 실수나 고의로 변개하여 
만들어낸 다른 본문을 가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일찍이 신약성서 사본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디성서대학에서, 나는 본문비평이라는 이름의 학문 분야의 기초를 닦았다. 
본문비평이라는 말은 원본문이 변개된 사본들을 연구하여 성서의 '원본문'을 
재구성하려는 과학적 학문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연구에 몰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먼저, 신약성서에 쓰인 언어인 그리스어를 배워야 했다. 
게다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이나 견해를 알기 위해 독어와 불어 같은 유럽의 
현대 언어들을 당연히 배워야 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그야말로 까마득했다. 
 무디 성서대학에서의 학위 3년을 나는 무사히 잘 마쳤으며, 기독교인 학자가 
되는 일에 대해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햇다. 
그 당시 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학문적으로 탁월한 학자들이 
아주 많지만 세속적인 학문 분야에 탁월한 학자들 가운데는 복음주의자들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나의 헌신을 유지하며 세속적인 환경에서 가르칠 수 있는 
학위를 얻음으로써, 세속적인 세계에서 복음주의적인 '목소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학사 학위를 마쳐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최고의 복음주의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나는 시카고근교에 있는 휘튼대학을 선택했다. 

 ㅇ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성서 
 
무디성서대학에 다니면서, 휘튼대학에서는 진정한 기독교인을 찾기 어렵다는 
경고를 이미 수없이 들었다. 
이 말은 무디성서대학이 얼마나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모교이기도 한 휘튼대학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대학인데도 그런 평가를 들었다. 
처음에는 나 역시 내 신앙의 바탕에서 생각해볼 때, 휘튼대학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대학인데도 그런 평가를 들었다. 
이곳 학생들은 성서의 축자영감설보다는 문학과 역사와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주제를 논할 때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논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그 학생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까? 
 
나는 휘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또한 그리스어를 배우는 일에도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휘튼대학에서의 첫 학기에 나는 그리스어 선생인 
제럴드 호돈 박사를 만났다. 
그는 학자로서나 교사로서, 그리고 결국은 나의 친구로서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휘튼대학의 대다수의 교수들처럼, 호돈 박사는 헌신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그가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품는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나중에는, 그가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엇다.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더 깊은 지식과 인생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어를 배우는 일은 나에게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어를 전공으로 하게 되었지만, 하여간 그 때 나는 
그리스어 기초 문법을 꽤 잘 했고, 언제나 더 많이 배우려고 열심을 냈다. 
그런데 한 단계 올라가 고급 문법을 배울 즈음, 그리스어를 배우는 일이 
나에게 또 나의 성서관에 조금 문제를 일으켰다. 
이내 나는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본문의 온전한 의미와 뉘앙스는 
그것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읽고 연구할 때만이 제데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에 히브리어를 배워 구약성서를 공부할 때에도 이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어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나는 성서의 축자영감설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만일 성서를 그리스어(그리고 히브리어)로 연구할 때에만 그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고전어를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알기를 바라며 성서를 주셨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 수 는 없지 않겠는가? 
아울러 그렇다면 축자영감의 교리는,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고전어를 배워 성서를 원문으로 읽으면서 연구할 여유를 가진 
학문적인 엘리트들에게만 해당되는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만의 모국어로 
다소 어색하게 번역해 놓은 것 말고는 성서 말씀을 전혀 읽을 수 없다면 
그 번역된 말씀은 과연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의 창구가 되는 사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은 한층 더 복잡해져만 갔다. 
그리스어를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신약성서를 보존하고 있는 사본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신약성서 본문비평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신약성서 본문비평학이란 우리가 신약성서의 원본문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학적인 학문분야다. 
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사실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어 오류가 전혀 없는 그 말씀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성서는 오류가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필사자들이 베낀 말씀이 아닌가? 
부분적으로는 정확하게 베꼈을 것이고, 부분적으로는(오히려 더 많이!) 
부정확하게 베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필 원고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원본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류투성이의 사본들일뿐이다. 
더군다나 대다수의 사본들은 시간적으로 원본문보다 수 세기나 
후대의 것들이고,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의혹 때문에 나는 참으로 괴로웠다. 
그뿐만 아니라 성서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만에 휘튼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나서, 나는 호돈 교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신약성서 본문비평을 더 깊이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는 세계 제일의 전문가이자 학자인 프린스턴신학대학의 
교수 부르스 메츠거에게 갔다. 

 ㅇ 원문을 보존하지 않은 하나님 
 
복음주의자들인 친구들은 또 다시 내가 프린스턴신학대학에 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거기서 내가 '참된' 기독교인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곧 거듭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진리에 대한 탐구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던지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내가 배운 진리가, 비록 나의 복음주의적인 배경이 규정하는 바와 다르다고 
해도 그것은 진리임을 믿기 때문이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에 도착하자마자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주석 수업들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도전이 되는 강의들이었다. 
학문적인 도전은 충분히 반가운 일이었지만, 내가 부딪힌 개인적인 도전은 
감정적으로 견디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나는 이미 취튼대학에서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몇가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프린스턴신학대학에서 보다 더 깊이 성서를 연구하다 보니, 
내 믿음은 심각한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바꾸어 놓으려는 온갖 유혹에 저항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학교 출신으로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믿음을 지킨다'는 말은 우스운 표현이다. 
우리는 모두 기독교 신학 과정을 밟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여간 내 연구는 내 믿음을 따라 잡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두번째 학기에 찾아왔다. 
매우 존경받는 경건한 학자였던 컬린 스토리 교수와 함께하는 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그것은 당시에, 그리고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복음서인 마가복음서 
주석에 관한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에 우리는 마가복음서를 그리스어로 완벽하게 읽어내야 했다. 
나는 학기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에 이미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어 
단어들을 모두 암기했다. 
학기 내내 우리는 마가복음서의 핵심 구절들의 해석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는 주석 노트를 정리해야 했다. 
또한 본문 해석상의 문제점들을 노론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기말에는 한 구절을 선택해 주석하는 학기말 논문을 써야 했다. 
 
나는 마가복음 2장에서 한 구절을 선택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면서 낟알을 따먹은 일로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는 단락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다윗 왕이 굶주렸을 때 부하들과 함께 행했던 일, 
즉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그들이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제단 빵을 먹었던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준다. 
 이 구절의 잘 알려진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말씀(사무엘하21:1-6)을 보면, 
다윗이 이 일을 행한 때의 대제사장은 아비아달이 아니라 
사실은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아비멜렉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단락은 성서가 문자적으로 무오하지 않으며, 
실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들 가운데 하나다. 
 스토리 교수에게 제출한 학기말 논문에서 나는, 비록 마가가 이 사건이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일어났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아비아달이 주인공 중 하나인 성서 본문 속에서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는 취지로 매우 길고 복잡한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토리 교수가 내 주장을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는 틀림없이 나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오류 따위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훌륭한 기독교인 학자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리 교수는 내 논문 말미에 간단한 한 줄 평을 써놓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한 마디는 나를 정통으로 꿰뚫고 지나갔다. 
그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마가가 그냥 실수한 것이겠지" 
이 학기말 논문에 기울인 그 많은 수고를 곰곰이 되새기면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깨달았다. 
본문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상력을 펴고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는 동시에 
주석 작업을 철저히 했어야 했다는 것을. 
또한 내가 제시한 해결책은 사실 견강부회였다는 사실도 함께 인정했다. 
나는 마침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음... 그래. 아마 마가가 실수를 한 게 맞을 거야." 
 
일단 그렇게 인정을 하자, 물을 막아두었던 둑은 한꺼번에 터져 버리고 말았다. 
마가복음 2장에 작고 하찮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면, 
다른 단락에도 실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가, 겨자씨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
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두고(마가복음4:31), 이 세상에서 겨자씨가 가장 작지 
않다는 것을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굳이 겨자씨가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이유에 대해 터무니없는 설명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실수들'은 다음과 같은 더 큰 문제점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도 있다. 
  
마가는 예수가 유월절 식사를 한 후에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하고
(막14:12, 15:25), 요한은 유월절 식사 전에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요19:14). 이것은 사실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누가는 예수의 탄생 기사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다가 
겨우 한 달 뒤에 나사렛으로 돌아와 정결예식을 행했다고 말한 반면(눅2:39), 
마태는 누가와 달리 그들이 이집트로 피신했다고 말한다(마2:19-22). 
이것도 중요한 차이점일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바울은 자기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을 체험한 
후에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고 말한 반면(갈1:16-17),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간 일은 바울이 다마스커스를 떠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었다(행9:26). 이것 역시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사본들을 더 면밀히 
연구하면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점들과 맥을 같이 했다. 
원본문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원본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원본문을 재구성할 수 없다면, 원본문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게다가 교회사의 전 기간에 걸쳐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원본문을 못 접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성서의 축자영감설은 해결할 수 없는 끊임없는 논쟁거리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잇는 대다수의 사본들은 수 세기 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어느 한 사본도 다른 사본과 일치하는 사본이 없을 정도다. 
그것도 한두 군데 다른 것이 아니라 수천 군데나 차이가 난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본문을 이문(異文)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나중에 다시 살펴보게 되겠지만, 사본들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신약성서 필사 전승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문이 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신약성서에 있는 낱말의 수보다 이문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이문들의 바다에서 어떤 본문이 진짜이겠는가? 
이 모든 이문들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본문을 재구성할 수 있단 말이가? 
만일 하나님이 성서의 문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지금 우리가 그 성서의 문자 하나하나를 잃어버렸다면, 
이 주장의 논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우리가 원본문을 정확하게 재구성했다는 확신을 
전혀 가질 수 없는 구절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우리가 그 문자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말씀을 보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본존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먼저 문자에 영감을 불어넣는 기적을 수행했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해, 나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고 신약성서 사본들을 탐구하다가, 
성서에 대한 나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게는 지각 변동과 같은 일이었다. 
이전까지, 그러니까 학창 시적 거듭남의 체험에서 출발해, 근본주의적인 
무디성서대학 시절을 거쳐, 복음주의적인 휘튼대학 시절을 지나기까지, 
내 믿음은 특벽한 성서관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성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절대적으로 무오하다는 
성서관이었다.  나는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성서를 그런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성서는 나에게 매우 인간적인 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 필사자들이 성서본문들을 베껴 쓰고 변개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성서 본문을 '기록한' 이들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책인 셈이다. 
성서는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장소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책이다. 
성서의 저자들 중 다수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말한다고 느꼈지만,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과 자신들의 
믿음과 자신들의 견해와 자신들의 필요와 자신들의 소망과 자신들의 이해와 
자신들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각과 믿음과 견해와 필요와 소망과 이해와 신학은 
그들이 말하는 모든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런 모든 면에서, 그들은 서로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서와 누가복음서의 보도는 똑같을 수가 없다. 
마가복음서 저자의 의도와 누가복음서 저자의 의도가 달랐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서와 마태복음서는 같을 수 없다. 
바울서신의 보도는 사도행전의 보도와 다르다. 
야고보서 역시 바울서신과 다르다. 
신약성서의 각 문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모두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서를 읽을 때, 각 저자들이 쓴 것을 그대로 읽으면 된다. 
어떤 저자가 보도하는 내용이 다른 저자가 보도하는 내용과 같다거나 
비슷하다거나 일치해야 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서는 매우 인간적인 책이다. 

 ㅇ 새로운 시각, 변화된 시각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전망이었으며, 내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이엇을 때 
가지고 있었던 시각은 분명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의 견해도 아니다. 
나의 변화된 시각이 성서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달라지게 했는지 
예를 들어보자. 
 무디성서대학에 다닐 때, 학교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들 가운데 
하나는 헬 린지(Hal Lindsay)가 쓴, 미래에 대한 묵시적 청사진인 
<대유성 지구의 종말 the Late Great Planet Earth>이었다. 
그의 책은 1970년대 영어권 비소설 분야에서 성서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린지는 성서가 그 글자까지도 한치의 오류가 없다고 믿었다. 
신약성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무엇을 믿기를 원하는지 알 뿐만 아니라, 미래에 하나님이 하려고 
계획 중인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을 어떻게 행할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대재앙이라는 종말의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무오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특별히 '언제'라는 점에 매료되었다. 
린지는 예수의 무화과나무 비유가 미래의 아마겟돈 전쟁을 예상할 수 있는 
암시라고 말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언제 '끝'이 올지 알고 싶어 하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24:32-34).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린지는 이것이 하나님이 직접 말한 무오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성경에서 '
무화과나무'는 흔히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는 데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메시지를 풀어놓았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겨울 동아 잠시 동면한 후에 소생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언제 소생했는가?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한 번 주권국이 되었을 때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바로 그 세대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수가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에서는 보통 몇 년을 한 세대로 보는가? 
40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가르침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의 국가 재건으로부터 40년 후인 1988년 이전 어느 때에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다."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대단히 강력하고 감동적이었다.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채 1988년이 이미 지나간 것을 감안하면 
지금은 이 메시지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어도 그 뜻이 잘 통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이들은 역사의 종말이 임박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예언과 관련해 
성서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티모시 라헤이와 필립 젠킨스의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에 대해 사람들이 
보여준 열광을 한번 생각해 보라. 
이 시리즈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 우리의 미래를 묵시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우리 때에만 6천만 부 이상 팔렸다. 
 성서를 우리의 신앙과 삶과 미래에 대한 무오한 청사진으로 받들어 읽다가, 
이제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쓰인 인간적인 책으로 보는 것은 
아주 급격한 변화다. 
다양한 인간적인 관점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이 가운데 어떤 관점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무오한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마침내 도달한 사고의 전환이며, 
지금 나는 여기에 푹 빠져 있다.  
 
나는 종종 이렇게 쓰인 범퍼 스티커를 본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믿는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하다." 
 나는 그런 말에 이렇게 응답한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전해주는 책이라고 당신이 옆에 끼고 다니는 책이 
만일 인간의 말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서가 낙태 문제와 여성 인권 문제와 동성애 문제와 종교적 패권주의 문제와 
서구식 민주주의 문제 등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성서를 거짓된 우상으로 삼지 않고, 또한 전능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삼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서가 우리 삶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무오한 지침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명백한 이유는 많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지적해온 것처럼, 학자이건 일반 독자이건, 
우리는 성서의 본래의 문자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이와 같은 인식으로 나는 신약성서 사본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본문비평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사본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본문비평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성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흥미로우면서도 가치 있는 학문이라고 확신한다. 
문자주의자든, 문자주의로 회귀한 사람이든, 평생 한 번도 문자주의자였던 
적이 없는 사람이든, 심지어는 기독교 신앙 없이 그저 성서를 역사적으로 
문화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는 외부인이든, 이 모든 사람들에게 본문비평은 
참으로 중요한 학문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거의 모든 성서 독자들이 본문비평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또 성서에 관심이 잇는 사람들, 
심지어는 성서학에 관심이 잇는 사람들도 본문비평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서무오성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본문비평이 3백년 이상 지속되어온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을 위해 쓰인 본문비평 서적이 거의 한 권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비평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심층적인 본문 연구에 필수적인 그리스어와 기타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 
본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 
하지만 그 문제들이 어떤 것이며 학자들이 그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 이런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 없다는 것이다. 

 ㅇ 신앙의 여정을 위하여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 책이 그런 목적으로 쓴 최초의 책인 것 같다. 
본문비평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지만, 필사자들이 성서를 어떻게 
변개시켰으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다. 
이 주제에 대해 나는 30년 동안 고민했고, 이 책은 바로 그 30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쓰였다. 
성서에 대한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겪은 이후, 
내가 지금 가지고 잇는 시각에 따라 책을 썼다. 
신약성서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어쨌던 어떤 경우에는 저자들이 처음 기록했던 문장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 어떤 과정에서 다양한 이문이 생기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다소 철저한 학문적인 분석 방법을 사용해 
어떻게 원본문을 재구성할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잇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책이다. 나의 긴 신앙 여정의 
최종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도 그들의 여정의 일부가 될 수도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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