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올렸던 필자의 글 "….매우 사소한 <옥의티>"라는 글을 읽어보신분이라면,
"그냥 마가가 실수 했겠지"라는 결론부분의 열글자를 기억할것이다.
성경에는 "저자의 실수가 있다"는 아주 간단한 명제에서 출발해서,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 "성경에는 변개된 부분이 있다"->
"셩경은 의도적으로 변개한 부분이 있다"로 확대 될수 있다.
일반인이 보기에 매우 당연한 명제이지만, 기독교인(특히 근본주의 기독교인)에게는 세려 받으면서 "봉인해버린 이성"을
흔들어 깨울수 있는 위험천만한(?) 명제일수 있다.
인간에 의해, 인간의 의도로, 추종하는 인간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성경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위의 매우 사소한 "옥의티"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울림을 담고 있는것이다.
<변개된 성경>
“사본들이 지나치게 많은 차이가 난다. 이것은 일부 필사자들의 부주의와 일부 필사자들의 그릇된 뻔뻔함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베낀 것을 한 번 더 검토하는데 소홀하거나, 아니면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덧붙이거나
삭제해버렸다.” -볼트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중에서
초기 기독교에는 "케릭스"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목소리가 카랑카랑 하고 글을 읽을줄 아는 사람들로, 글을 읽을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울의 편지"라든지
"각종 복음서"를 낭송해주는 과거 우리나라의 "변사"와 비슷한 사람들이였다.
초기 기독교 예배라는것이 요즘처럼 목사가 나와서 온갖 현란한 연기술로 "설교"를 하는것이 아니라,
"케릭스"가 읽어주는 "감동적인 예수 이야기"가 전부였다.
신약성경 곳곳에도 이런 낭독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케릭스에게 본문을 잘 이해할것을 당부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가 13장 14절
디모데 전서도 성경 낭독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ㅡ디모데전서 4장 13절
바울도 케릭스에게 자기 편기를 읽어 주길 부탁한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ㅡ데살로니가전서 5장 27절
이렇듯 성경낭독 문화가 점점 확산되고, "예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되자 더 많은 성경이 필요하게 된다.
인쇄술이 없었던 당시에는 오직 필사하는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전문적인 필사자는 4세기경에 나왔지만, 초기 기독교 에서는 주로 "케릭스"들이 필사 했다.
투철한 사명감이나 프로정신이 없었던, "케릭스"들은 필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 입맛에 맞게 고의적인 변개도 스스럼 없이 하게 된다.
그런일이 가능했던 사유는 당시 성경이라는것은 "구약"을 지칭하는 말이 였고, 지금의 "신약"은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던
기독교와 관련된 수많은 문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일이 약 200년 이상 진행되다보니 원본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담고 있는지 도데체 알수 없게 되고, ]
또한 그것이 읽혀지던 그당시 공동체 상황에 맞게 제멋대로 변개되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교리"라는것이 없었다.
다만, 여러가지 상상력에 의존하는 "견해"가 있었을 뿐이다.
예를들면,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며, 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했다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견해뿐 아니라,
하나님이 둘이라느니, 열둘이라느니 하는 주장,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한것이 아니라, 우주적 재난으로 악한 세상이 탄생했다는
주장, 열등한 하나님과 참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주장등 다소 엉뚱해 보이는 여러가지 견해가 상생하고 있었다.
처음 "케릭스"들에 의해 성경이 변개 될때만 하더라도, 동사를 오인해서 문맥의 뜻이 반대로 된다는 등의 사소한 실수나,
각 복음서간의 차이나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 몇몇 구절을 첨가하는등의 이해할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였으나,
위의 예에서 보듯이 다양한 견해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면서 부터, 교리 논쟁으로 확대되게 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매우 뻔뻔한 변개를 자행하게 된다.
"변개된 성경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