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필자는 그의 고결한 삶 자체에 대해 폄하를 할 생각은 없다.
다른 무엇 보다도 그가 한센씨 환자들과 함께 한 반평생은 필자 역시
경외감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소설을 진실인 것 처럼 왜곡하여 그를 우상화하는
기독인들의 몰염치가 되겠다.
이글에선 손양원 전설 중 두가지 정도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로 하겠다.
1)종교적 순교인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인가?
산돌의 삶 중 가장 감동을 주는 대목으로....두 아들 동인,동신을 죽인 원수인 안재선의 구명을 탄원하여 양아들로 삼아 손재선으로 개명시켰으며 그를 개종시켰다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자 이러한 전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아 보기로 하자.
[‘여수 순천에 반란사건이 낫다에 얼골을 찦으리면서 놀랐고 순진한 두 학생이 순교를 했드라에 갸륵해서 놀랐고 그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해서 자기 아들 삼엇다드라에 놀랐고, 그 아이가 진실한 크리스챤이 된다드라에 무릎을 탁 치면서 놀랐다’ - 사랑의 원자탄 P.213 - ]
[공산군에 가담했던 동인의 친구들은 손동인이 기독학생회 회장이었기에 예수쟁이 두목이라 하여 그들이 죽이기로 한 명단에 동인의 이름을 가장 앞자리에 올려놨다. 이러한 음모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인은 평소에도 학교 토론시간이나 수업시간에 공산주의의 맹점을 예리하게 지적했기 때문에 좌익계 학생들에겐 동인이 눈의 가시로 여겨졌던 것이다. 10월 21일 동인의 같은 학교 친구들인 공산군들은 손동인, 손동신 두 형제를 끌어내어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팬 후 순천경찰서 뒤뜰로 끌고 가서 무참히 총살하고 말았다.
동인, 동신 두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딛고 또 한 번의 역경을 넘는다. 떨리는 가슴을 믿음으로 진정시킨 후 어린 순교자들의 장례식 날 9가지 감사문을 적어서 읽었고 두 아들 죽인 자를 사형장에서 빼내서 아들로 삼겠다는 선언을 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 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되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생략)
이 폭탄과도 같은 선언에 장례식장은 또 한 번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얼마 후 동인, 동신을 죽인 학생은 손 목사의 간청으로 사형되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출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아들로 받아들여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켜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손 목사는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 성자였던 것이다. ]....손양원목사의 일생 중 원수를 사랑한 목자에서 발췌
이 장면만 읽는다면,누구라도 눈물 찍, 콧물 찍....산돌의 큰 사랑에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필히 알아야 될 것은
첫째, 산돌의 두아들이 결코 순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민족의 비극을 초래했던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변증은 당시 반란군의 6개항의 기초 강령에도 나타나있는데, 종교 문제에 대한 거론은 일절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대목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1.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4.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5. 친일파, 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계획을 실시한다.
여순 사건은 이제 그 진상이 많이 밝혀 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학창 시절 배웠던 ...여순 반란 사건....은 잘못된
그리고 음모의 표현이었음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기독인들은 자신들의 전도라는 목적하의 음모인 ....순교 만들기를 중지하지 않고 있다.
동인,동신 두형제의 안타까운 죽음은 정치와 이데올로기라는 권력하에 살해되었을 뿐임을 기독인들도 이제는 인정해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한번쯤 생각해 보시길 권한다.
두 형제가 죽은 날인 10월 21일은 반란일(10월 19일)로 부터 겨우 삼일째
날이었다.
종교 탄압을 할 시기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실재 그당시의 기록 어디에도 반란군이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산돌의 두 아들은 이데올로기에 희생 당한 정치적
죽음이었지 결코 순교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2)안재선은 그후 기독인이 되었을까?
전설에 따르자면, 산돌의 양아들은 독실한 기독인이 되었어야 마땅하며, 그의 은혜를 사방팔방에 선전했어야만 했다.
그러면 지금도 생존해 있는 안재선씨의 아들 안경선씨의 육성을 들어 보기로 하자.
[“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를 고3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알게 됐습니다. 손 목사님의 유복자인 손동길 목사님께서 저를 찾아와 ‘내가 너의 작은아버지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그 책을 읽고서야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
[안 목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교회를 가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손 목사님의 가족과 아버지가 계속 왕래하고 지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가 되려고 하셨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눈총 때문에 이룰 수 없었고 결국 세상사람의 눈을 피해 숨어 사셨던 것입니다.” ]
손양원 목사의 권유에 따라 전도사까지 되었던 안재선씨는 그후 왜 기독인이 되기를 포기했을까?
그리고 왜 본래의 성씨로
돌아갔을까?
게다가 자신의 아들에게 조차 손양원 목사와의 관계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정답은 독자의 상상력에 맞기도록 하겠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에는 기독교가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선교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한다. 그리고
과장을 한다.
손양원 목사의 경우에도 이러한 음모가 예외가 될 수 없다.
기독인들이 바이블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는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이제 그대는 손양원 전설에도 쬐끔쯤 눈을 떴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