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김은희의 간증(2) .....재탕

bs5.gif ar.gif


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Re:Re:김은희의 간증(2) .....재탕

손오공 0 1,837 2004.05.09 07:41
김은희간증(2)



첫 번째 불륜사건 이후 다시 두 번째 불륜관계가 시작된 것은 제주도로 이사한지 2년도 못 되어 일어났습니다.



1998년 서울 숭실대학교에 CCM학과가 새로 개설되면서 최덕신은 그곳 강사로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학과 오디션때 지금의 간통고소가 돼있는 김앵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덕신과 김앵은 그의 12번째 앨범인 “갈망”의 10번째 곡인 “나의기도”를 함께 부르면서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로인해 또다시 최덕신은 가정을 소홀히 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최덕신에게 가정을 지켜달라고 수차례 권유하였으나 최덕신은 되려 저를 이상한 여자로 취급을 하였습니다. 저는 더 이상 가장이 없는 가정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잠시집을 나온 저는 몇분뒤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다시 들어간집은 조금전과 달리 조용하였고 저는 남편과 아이들이 없는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최덕신은 김앵과 함께 아이들과 놀이동산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방에서 나오는 저를 보고 최덕신과 김앵은 모두 기겁을하며 당황하였습니다.



최덕신은 남편의 외도에 지친 제가 집에서 영원히 떠난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 상황속에서 침착하게 김앵을 맞이하였으며 잘 돌려보냈습니다.



그날이 김앵과 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저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남편인 최덕신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화를 내며 이성을 잃었습니다.



다시는 우리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며 짐을 싸 가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울면서 가장인 최덕신을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집에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교회 관계자들을 속이고 지구촌 교회와 온누리교회에서 찬양집회를 계속하였습니다.







어쩌다 가끔 집에 들어오면 제가 누구와 통화했는지 ,전화국에서 통화내역을 조사라도 한 사람인양 협박하며 다구쳤고, 자신의 만행이 외부에 알려 질까봐 두려워하며, 저와 아무하고도 통화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한번은 찬양사역자 s양과 통화한 사실을 알아내어, 저를 죽일 듯이 몰아세운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s양과 그냥 안부통화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기가 막힌건 김앵의 행패였습니다.



김앵은 저에게 며칠씩 새벽이고 밤이고 낮이고 몇 십번씩 전화벨을 울려댔습니다.



어쩌다 통화가 되면 김앵은 제게 최덕신을 포기하라며 반말과 함께 상스러운 갖은 욕과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조심하라는 협박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두려워서 식구들에게조차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느 곳에 나서야 할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렇게 겁에 질려, 어찌 할 바를 알 수 없는 무력한 생활 가운데 ,더 힘들었던 것은 생활비조차 전혀 없이 지내야 하는 가정 형편 이였습니다.



이렇게 5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갑자기 최덕신은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들어갈 상황이 생겼다고 하며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동안 받은 정신적인 쇼크로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전 또 다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반 강제적으로 ,무작정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조차 최덕신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았습니다.



매일 밤마다 작업을 핑계로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국에 있는 김앵에게 전화를 걸어 말로 표현하기 조차 거북한 언어들과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가며 폰섹스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크리스마스앨범 임마누엘 작업할 당시였는데 ,항상 그중 “오 거룩한밤”의 반주부분만을 계속 반복시켜놓고 폰 섹스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 다음날 제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휴지통을 뒤져보면 정액 묻은 휴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모르는 줄 알았겠지만, 저는 그의 작업실 앞을 지날 때마다 들려오는 음란한



신음소리 때문에 얼마나 가슴아파했는지 모릅니다.



포르노와 폰 섹스에 이제는 그만 심취해 있었으면... 하는 저의 권유에도 그는 저를 윽박지를 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다 그렇다며 말입니다.



그러던 중 최덕신은 한국에 사역이 있다는 핑계로 가족만 남겨두고 미국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몇 달간 있다가 비자가 끝날 무렵 다시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겨우 핸드폰 연락처를 알아내서 남편에게 안부전화를 하면, 김앵이 전화를 뺏어 받아 되려 최덕신의 부인인 저에게 마구 폭언을 하였습니다 .



김앵의 폭언은 계속해서 밤,낮이고 새벽2,3시고 미국 집으로 성이 찰 때까지 걸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는 전화 벨소리만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을 당시 L.A 교회에서 한국에서의 최덕신의 행각들이 알려져 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켰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성도들이 많이 교회를 떠나는등 ,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게 되자 최덕신은 새로운 거처를 뉴 저지로 옮겼으며, 뉴져지 열린문 장로교회에서 찬양예배 인도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최덕신은 그곳에 간지 한 달 만에 또 다시 한국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몇 달동안 가장인 최덕신의 행방도 모른체, 저와 아이들은 월세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구두 샵에 직원으로, 병원사무원으로, 음식점 주방원으로 일하며 겨우겨우 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두 아이를 여자의 몸으로 홀로 양육하고 생활하기에 너무도 힘들었기에 저는 여기저기 돈까지 꾸어야만 했습니다.







주변인들을 통해 들은 한국에 있는 최덕신은 그 당시 찬양집회를 계속 한 상태였으며, 그 후로도 “송명희와 친구들 ”앨범을 내는 등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앵 또한 여전히 공갈 협박 전화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쩌다 제 아이들이 전화를 받을 때면 전 너무도 당혹스러워 결국엔 아예 코드를 뽑아버야만 했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온 최덕신은 너무 잦은 한국행으로 인해 교회 일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소문들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날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최덕신은 다시 자신의 무능력함을 핑계로 제게 이혼을 요구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정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살아가자고 애원했습니다.



이후 최덕신은 다시 테네시주에 있는 음악의도시 네쉬빌에 집을 얻었습니다.



그는 집안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이혼하려했던 태도를 바꾸어 평생을 우리 가족을 위해 살 것처럼 제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그를 다시 한번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집에서도 밤낮없이 김앵의 전화가 매일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마다 최덕신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김앵이 스토커다. 싸이코다. 정신병자 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고는 혼자 밖으로 나가 다른 곳에서 핸드폰으로 몇 시간씩 김앵과 통화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최덕신은 다시 한국에 나갔다가 미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상습적인 비자 연장으로 결국 미국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하였습니다.



시애틀 공항에서 여권과 비자를 압류당한 최덕신은 곧바로 한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이 사건 당시 저와 아이들은 미국에 관광비자로 들어와 불법체류를 한 상태로 이미 미국에서 영주권 신청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한번 나가게 되면 다시는 미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 그동안의 수고들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최덕신에게 제가 미국에서 계속적으로 직장을 잡고, 집을 줄이고, 아이들 양육을 책임지고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덕신에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에서 다시 비자를 만들어 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최덕신은 한국에서 사역을 하면서 생기는 무수한 소문들과 자신을 향한 질타와 의심들을 모면 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방패가 가까이 있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무척이나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최덕신은 저와 아이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또다시 가정과 가족들에게 충실하겠다고 저를 계속 설득 시켰습니다. 그 설득에 저는 마지막으로 남편을 믿고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 간지 3년도 채 안 되어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한국에 들어와 보니 최덕신은 경기도 양수리 산속에 카페를 집으로 거의 얻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순간, 저는 옛날 벽제 산속에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최덕신의 약속을 믿고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얼마 안 되어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집에는 가끔 사람들을 초대 할 때만 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제게 손님 접대를 준비해 줄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럴 때 마다 아이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아무렇지 않은 듯이 2,30명의 손님들을 접대 하여야 했습니다.



손님 접대가 끝나면 최덕신은 그날 밤으로 다시 집을 나갔습니다.



가정은 버려둔 채 그는 계속해서 찬양집회를 하였고, 음반회사를 차려 운영하였으며, 그의 삶과 가정생활들이 아무문제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러한 이중성을 연극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최덕신은 이런 저와 함께 기독교 방송 프로인“ CCM다큐”를 촬영하고, 가끔 찬양 집회 때 함께 찬양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거짓된 모습으로 사람들과 교제를 하였고 그때마다 제 마음은 항상 울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가정이 하나 되길 원하였는데, 계속되는 거짓된 가정생활과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저의 삶은 거의 절망 상태였습니다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494 바이블에 서술된 자살에 관한 소고 손오공 2004.05.09 1320
493 사단을 경배하는 캐롤송...고요한 밤 거룩한 밤 손오공 2004.05.09 1550
492 기독교 정당 출범에 즈음하여 손오공 2004.05.09 1263
491 기독교의 천박함 그리고 캬바레 손오공 2004.05.09 1682
490 죽은자에 대한 너그러움 그리고 예수에 대한 관대함 손오공 2004.05.09 1756
489 Re:김은희의 간증(1) .....재탕 손오공 2004.05.09 1739
열람중 Re:Re:김은희의 간증(2) .....재탕 손오공 2004.05.09 1838
487 Re:Re:Re:김은희의 간증(3) .....재탕 손오공 2004.05.09 1922
486 루터와 칼빈에 대한 소고 손오공 2004.05.09 1777
485 용과 사탄 그리고 청와대 손오공 2004.05.09 1486
484 기독인의 위선 손오공 2004.05.09 1506
483 첫 4세기동안의 기독교(2) 손오공 2004.05.09 1423
482 [위선]목사 설교 중 ......질문하기 운동을 제창하시길 바랍니다. 손오공 2004.05.09 1644
481 (4)일반 오류 손오공 2004.05.09 1880
480 시련과 유혹 손오공 2004.05.09 1797
479 .. 다니엘사관학교, 100일만에 문닫은 사연 손오공 2004.05.09 1575
478 매일 매일 창조하는 한국 기독교 손오공 2004.05.09 1366
477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한국 기독교 손오공 2004.05.09 1327
476 피를 먹고 자라는 기독교(부제:드라큐라는 야훼의 또다른 이름) 손오공 2004.05.09 1625
475 娼婦같은 기독교 손오공 2004.05.09 1636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182 명
  • 오늘 방문자 3,472 명
  • 어제 방문자 5,217 명
  • 최대 방문자 5,411 명
  • 전체 방문자 1,582,974 명
  • 전체 게시물 14,416 개
  • 전체 댓글수 38,042 개
  • 전체 회원수 1,668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