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풀이를 즐겨 하시는 분들에게....예수의 씨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손오공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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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04 15:03
어떤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 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과 비슷한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표현 기법을 비유(比喩)라고 칭하는데 직유법,은유법,제유법,의인법,의태법....등이 있겠다.
바이블은 율법,예언,역사,시가 등 여러 가지 내용이 혼제된 작품이므로 부분적으로 비유법이 사용되어 있다해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그러나 바이블 전체가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억지 춘향격으로 끼어 맞추기를 하는 집단이 있는데 그 노력하는 바는 가상하나 문제는 그 풀이를 자위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데 있다고 본다.
이러한 비유풀이 집단에게 한 가지만 질문하겠다.
*야훼,예수,모세,바울,베드로 등 .....등장인물은 어떠한 의미의 비유인가?
그렇다.
바이블의 내용을 모두 비유 풀이로 하는 자체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자 ...그러면 바이블에는 어떠한 내용을 비유로 표현하고 있을까?
[씨뿌리는 자의 비유 / 가라지 비유 / 겨자씨의 비유 / 누룩의 비유 / 보화의 비유
진주의 비유 / 그물의 비유 / 두 빚진 자의 비유 / 포도원 품군의 비유
두 아들의 비유 / 악한 농부의 비유 / 혼인 잔치의 비유 / 무화과 나무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 달란트의 비유 / 양과 염소의 비유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밤중에 찾아온 벗의 비유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열매없는 무화과의 비유
잔치집 상석의 비유 / 잔치 비유 / 망대건축, 전쟁하는 임금의 비유
잃은 양, 은전의 비유 / 탕자의 비유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무익한 종의 비유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므나의 비유 ...]
복음서에서 예수를 화자로 하여 묘사한 글이 대부분인데 예수는 왜 이렇게 비유법을 즐겨 사용했을까? 이에 대해 묘한 내용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 준다. (마가 4:11) >>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예수께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누가 8:9,10) >>
*여기에서 "너희"는 누구이며 "다른 사람"의 범위가 문제가 되겠다.
*신천지 이만희는 자신의 신도들만이 그리고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 신도들은 역시 자기들만이 이 "너희"에 속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현실이 아닌가?
*2,000년 동안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이블을 하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로 그 오해와 고집때문이라고 사료된다.
*보편적 기독교가 주장하는 이신칭의하고도 결국은 위배되는 게 바로 이러한 선민사상이라고 보여 진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 얘기를 하기로 하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가 4장3-9절: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나왔지만 해가 뜨자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공동>>
#마태13장3-9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공동>>
#누가8장5-8절: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쪼아 먹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서 싹이 나기는 하였지만 바닥에 습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나무들이 함께 자라서 숨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잘 자라나 백 배나 되는 열매를 맺었다" 하시고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하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공동>>
*우선 주문같은 개역판의 번역과 공동번역의 내용을 비교해 보시라.
*책이란 읽기 쉽고 이해가 먼저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게 상식이 아니겠는가?
*개역판의 모호한 번역은 사실 사이비들의 좋은 밥그릇 노릇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지 아니한가?
다음으로 자칭 보혜사 신천지 이만희가 풀이하는 것을 인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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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측 비유풀이]
씨 뿌리는 비유
마가복음 4장 13절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다른 모든 비유도 깨닫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비유가 천국 비밀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하여 답만 간단히 알리니, 자세한 것은 본 신학원에 와서 배우기 바란다.
비유하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8:11), 뿌리는 것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막4:14). 좋은 씨는 진리요, 그 진리로 난 천국의 아들들이며(마13:38),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 곧 예수님이시다(마13:37). 반면 가라지(마귀 씨)는 비진리와 그 비진리로 난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마13:38),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다(마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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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에서 주장하는 비유의 중요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고 깨달아 지키라고 주신 편지이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읽어도, 가까워야 할 하나님 말씀이 무척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천국 비밀과 예언에 관한 부분이 그러하다. 마치 상상 속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 같다. 그러나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은 목회자들조차 그런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믿음만 강요한다는 점이다.
성경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많은 부분이 비유와 비사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비유와 비사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빗대거나 이끌어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비유와 비사에는 그 짝인 실상이 있기 마련이다. 실상이란 말그대로 비유와 비사가 아닌 실물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약 삼천 년 전 비유로 말씀하실 것을 예언하셨다(시78:2). 그후 약 천 년이 지난 초림 때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 곧 천국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마13:10~11, 34~35). 그러나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마13:14) 결코 깨닫기 쉬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비유를 깨닫지 못한 자는 이방인이요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막4:10~13). 그 이유는 비유 속에 감추어진 참 뜻을 모르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천국도 바르게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유의 말씀을 뜻도 모르고 읽는 사람은 마치 수박의 겉을 핥는 자와 같다.
예수께서는 비유와 비사로 말씀하신 것을 때가 되면 밝히 일러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요16:25). 그러므로 정한 때가 되어 비유가 풀리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이 바로 약 이천 )년 전에 예수께서 비유로 약속하신 말씀이 실상으로 응하여 풀어지는 때이다. 이 소식을 듣고 참으로 그러한가 아닌가 알아보는 자가 진정 살아있는 신앙인일 것이다.
구분 구약 시대 초림 때 오늘날
천국비밀 감추어 두심 비유로 말씀하심 밝히 드러내심
성경을 편식하듯 골라서 보는 자는 위험한 신앙인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비유한 말씀과 예언서를 등한히 하고 역사와 교훈의 말씀에만 치우쳐 있다. 예수께서 천국 비밀과 장래사를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비유로 말씀하신 것 그것을 이루실 때 믿게 하려 하심이다(요14:29). 더욱이 성경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제 더 이상은 비유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바르게 깨닫기 바란다.
앞으로 본 하늘의 신문고(02-503-9637)에서는 새 언약 곧 신약 성경의 말씀과 비유 풀이를 주로 논할 것이다. 새 언약은 첫 언약이 파하여진 후(렘31:31)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요 비유 풀이는 새 언약을 여는 열쇠와도 같기 때문이다. 자세한 비유 풀이와 첫 언약 곧 구약 성경 말씀은 시온기독교신학원에 와서 설명을 듣고 깨닫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말한 ‘비유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 비유의 중요성
1. 비유한 말씀은 천국 비밀이다(마13:10~11)
2. 비유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이방인으로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막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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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짜집기한 소위 비유풀이를 깨닫지 못하면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사기치고 있다.
*상기 내용도 마가복음의 내용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가복음 4장 10절 부터 13절에 죄사함이란 내용이 어디에 묘사되어 있는지....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결국 결론은 자기들 신학원에 와서 신천지 신도가 되라는 교묘한 음모일 뿐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면 기존의 보편적 기독인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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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씨뿌리는 비유(마13:1-23,막4:1-25,눅8:4-18)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비유로 말씀한것임.
1)길가와같은 마음에는 복음의 씨앗이 살아나기도 전에 마귀에게 빼앗기고
사람들에게 밟혀 없어지게 된다는 것임.
2)돌밭같은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것 같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마는
신앙상태를 말함.
(흙이 얕은 곳에서 싹이나다가 돌때문에 더이상 뿌리를 내리지못하는 것처럼 )
3)가시덩굴속 같은 마음은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일락을 의미함(눅8:14).즉 믿음이 성장하는것 같지만 어떠한환란이나 시련에서는 시험에들고마는 확신없는 믿음과 같은것임.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다가 아래를 보고 두려워하다 빠진것처럼 세상 풍파에 견디지못하고 마는 신앙상태임.
4)좋은땅은 옥토라고 하듯 이런마음에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임니다.많은 결실을 맺는것.나만 믿는게 아니라 증거하여 결실맺는 신앙,확신있는신앙,승리하는 신앙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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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리는 것도 없다.
*그러나 비유풀이가 본격적으로 시도되는 요한계시록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주지하시기 바란다.
문학비평적 관점을 가진 신학자의 해석도 참고로 인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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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씨는 누구일까? (문학-역사비평적 성경읽기의 한 예)
최 원 준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 /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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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이 글은 앞서 오덕호 교수가 제시한 새로운 성경읽기의 한 방법인 '문학-역사비평'에 따라 성경본문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수 있는지 그 실례를 보여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따라서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덕호 교수의 글을 읽어야만 한다). 필자가 선택한 본문은 마가복음 4장 13-20절에 기록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설'이다. 이 글은 본문에 나오는 네 가지 종류의 씨(혹은 그 씨가 뿌려진 곳)가 마가복음에 나오는 등장 인물중 각각 누구를 암시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 비유를 해석하며 저자적 독자는 자연스럽게 씨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저자적 독자는 그 씨가 자신이 속한 교회의 사람 중에서는 누구를 가리킬지, 또한 마가복음의 등장인물 중에서는 누구를 가리킬지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 중에서 필자는 지면관계상 마가복음의 등장인물과 관련된 부분만, 저자적 독자의 독서 행위 중 특별히 예상 및 회상방법을 중심으로 하여 찾아볼 것이다. 따라서 이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 글에 사용된 성경읽기의 방법이 문학-역사비평적 성경연구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또한 지면관계상 필요한 각주를 생략한 것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네 종류의 땅, 네 종류의 인물들
문학-역사비평 연구는 순수한 역사비평과는 달리 현재의 본문을 최종본문으로 간주하며, 어떤 특정본문은 전체 문맥과의 유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특정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은 전체를 다 읽고 나서야 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소위 저자적 독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외부지식과 내부지식에 의한 틈메우기, 그리고 예상 및 회상에 의해 글을 읽는다고 문학-역사비평 연구는 가정한다.
이와 같은 가정에 따를 때, 문학-역사비평에 의한 막 4:13-20 읽기는 다음 몇 가지 전제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첫째, 기존의 역사비평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설명'을 복음서 기자가 그들이 처한 삶의 정황에 따라 후대에 삽입한 '알레고리'라고 보고, 원래 역사적 예수의 삶의 자리를 추적한 후, 그것에 근거하여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본래 의미를 찾았다. 학자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Bultmann, Dodd, Jeremias 등과 같은 학자들에 따르면 이 비유는 예수님의 활동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던 자들에게, 예수님이 적대자들에게는 자신의 사역을 변호하고, 제자들에게는 격려하기 위해 들려준 비유라고 해석한다. 즉 처음에는 실패한 것 같지만, 결국은 놀라운 결실을 얻게 될 것을 말하는 비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역사비평적 연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며, 그렇기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해석은 13-20절에 따라야 한다고 전제한다. 물론 문학-역사비평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세 땅과 맺는 한 땅의 비교를 통해 '변호'와 '격려'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13-20절에 나오는 알레고리적 해설 자체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보기 때문에 그 이상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해설에 따르면 네 가지 종류의 씨가 뿌려진 네 종류의 땅은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씨는 원래 중성이지만, 씨 뿌리는 자의 해석에서는 네 종류의 씨 모두 남성복수명사로 나온다. 즉 비유해설부분은 씨가 말씀을 지칭하면서도 동시에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고, 또한 땅도 씨를 받아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을 가리키도록 고안되어 있는 것이다.
또 저자적 독자는 씨를 뿌리는 자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비유 해설에서 씨 뿌리는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씨 뿌리는 자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저자적 독자의 외부적 지식과 내부적 지식 모두에 근거한다. 먼저 당대에 씨 뿌리는 자는 하나님이나 선생님을 가리켰다(외부적 지식). 또 독자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부각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내부적 지식). 먼저 저자적 독자는 1장 21, 2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바닷가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2:13), 특별히 4장 시작부분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셨다는 언급이 2회 나온 것을 기억할 것이기에, 씨 뿌리는 자를 예수님으로 볼 것이다.
셋째, 저자적 독자는 네 종류의 씨가 가리키는 사람들을 그들이 듣고(읽고) 있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각각 누구를 가리킬지 예상하고 회상할 것이다. 저자적 독자가 씨 뿌리는 사람을 예수님으로 생각하였다면, 그는 여러종류의 씨를 전후 문맥과의 연결 속에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관련시킬 것이다. 자, 그렇다면 네 종류의 땅은 각각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길가에 뿌려진 씨
첫 번째는 길가에 뿌리워진 씨이다. 이 씨는 씨가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에 의해 먹힌다. 즉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 말씀이 제거되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말씀에 대해 대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자적 독자는 이러한 예에 해당하는 자로서, 4장 13-20절 앞에 나오는 인물 중 서기관들, 헤롯당원들, 바리새인들을 생각할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마음이 굳어져 있었다. 먼저 서기관들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고 그를 고친 예수님을 대적하였다(2:6, 7). 또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 및 세리들과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을 보고 그를 비판하였다(2:16).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죽일 음모까지 꾸몄다. 예수님은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3:5)시기까지 하였다.
또 길가에 뿌리워진 씨는 사단에 의해 말씀이 즉시 제거된 자들로서, 이들은 사단과 연합한 자 혹은 사단의 편에 서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3장 20-30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힘입어 사역하시는 자신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모욕하는 서기관들을 사단의 세력으로 규정짓는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저자적 독자는 길가에 뿌리워진 씨가 가리키는 인물로서, 앞서 나온 서기관들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적 독자는 7장 1-23에 가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외식하는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7:13)이며, 모든 악한 것을 속에 간직하여 실상은 더러운 자(7:20-23)임을 알고, 앞서 4장 15절을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길가에 뿌리워진 씨는 서기관일 것이다)을 회상에 의해 확인할 것이다. 또한 길가에 뿌리워진 씨가 가리키는 인물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 살해의 주동자들이기 때문이다(8:31; 11:27; 14:43, 53; 15:1).
마지막으로 길가에 뿌리워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본 후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6:2)라고 반응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배척"(6:3)한다.
돌밭에 뿌려진 씨
네 가지 씨 중에서 그 설명이 가장 긴 '돌밭에 뿌리워진 씨'의 특징은, 첫째,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둘째, 말씀을 인하여 박해가 올 때 '곧' 넘어진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로 저자적 독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할 것이다. 그 근거는 먼저 4장 17절에 사용된 '넘어지다'(skandali,zw)는 단어가 14장 27, 29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베드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skandalisqh,sontai)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나중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돌밭에 떨어진 씨의 대표적 인물은 베드로이다. 또한 '베드로'(Pe,troj)라는 이름이 '바위' 혹은 '돌'(pe,tra)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온 것이란 점을 상기할 때, 베드로는 돌밭에 떨어진 씨를 대표한다. 그 외에도 4장 이후에 제자들이 보인 모습, 즉 마음이 둔해져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막 6:52)이나 다른 길로 가려고 하는 모습들(막 8-10장 참조)도 제자들이 돌밭에 뿌리워진 씨에 해당한다고 저자적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러나 저자적 독자는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나중에 그들의 배반과 무지를 회개하고, 변화하여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적 독자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밭에 뿌리워진 씨로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그들이라 할지라도, 일시적으로는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박해가 올 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영생의 길을 찾아 예수님께 왔다가 재물에 대한 욕심과 염려 때문에 예수를 따르지 못한 부자 청년(막 10:17-22)을 들 수 있다:"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10:22). 저자적 독자는 부자 청년이 재물에 대한 욕심과 염려 때문에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에게서 결실치 못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의 특징은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한 점이다. 어찌보면 매우 단순하다. 단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결실하였다'는 설명외에 다른 언급이 없다. 저자적 독자는 과연 좋은 땅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들으로 누구를 생각할 수 있을까? 우선, 이 땅이 이미 '좋은' 땅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땅이 결실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 땅이 '좋은' 땅이기 때문이다. 결실의 1차 원인이 그 땅 자체의 원래적 성격에 있는 것이다. 말씀을 받아들인 것 외에 결실을 위해 그 땅이 행한 어떤 것도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마가복음 내에서 좋은 땅에 해당하는 자들을 살펴본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혹은 능력을 '믿고' 받아들여 치유의 이적을 경험한 자들이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적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특징은 예수님의 이적 행사가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을 때에, 예수님은 비로소 이적을 행사하실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하는 나사렛 고향 사람들에게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6:5)었다. 반면에 열 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과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치유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34; 10:52). 열 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자, 곧 자신이 치유받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경 바디매오도 그가 길가에 앉아있을 때에 지나가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10:46)렀기 때문에, 또 예수님이 그를 부를 때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10:50) 왔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그 발 아래 엎드"(7:25)렸을 때 자기의 딸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음을 전제한다. 결국 그녀의 믿음이 자신의 딸을 치유하는 결실을 거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마가복음에서 이적은 믿음의 '원인'이 아니라 믿음의 '결실'이다. 치유의 이적을 경험한 자들은 먼저 그들 자신에게 믿음이 있었기에 치유의 결실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적 독자는 이상에서 언급된 인물들, 즉 믿음으로 예수님을 대하여 이적을 경험한 자들이 좋은 땅에 뿌려진 씨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맺는 말
역사비평적 연구와는 달리 문학-역사비평적 연구는 현재 본문을 최종본문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한국교회 신앙적 분위기에 잘 부합한다. 아울러 특정 한 문단도 전체적 맥락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통전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더욱 연구되어 활용할 만한, 새로운 천년기의 좋은 성경읽기 방법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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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상기 인용하는 바와같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비슷한 예화가 있음도 필히 기억해야만 하겠다.
불경『슛타니파아타』『아함경』『미린다 왕문경 6장』에서 석가모니가 자기 자신을 농사짓는 농부로 비유하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고 설법한 것은 예수가 자신을 씨뿌리는 인자라 비유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예수가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돌밭에 뿌려진 씨앗''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든 것과 똑같이 석가모니도 '돌과 나무가 무성한 황무지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들어 잘못된 신앙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점은 불경과 성경이 똑같은 비유,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자.
바이블을 읽고 이해하는 방법은 각 개인의 관심도와 지식 그리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이블을 우상시하고 그 기록된 내용이 신의 말씀이라는 오해가 전제되어 버리면 결국 자신의 이성과 자아를 포기하는 불행에 빠져 버린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다시 한 번 부언하지만
<바이블에서도 신의 말씀을 찾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권한다.
그러면 필자의 경우는?
본인은 바이블보다는 길가의 풀잎 향기 그리고 밤하늘의 안타까운 별빛들 흔들림에서 신의 정체성에 대해 훔쳐 보기를 즐겨함을 고백한다.
사족하나:천국의 비밀이 왜 그렇게 궁금할까?....아직도 천국의 건설이 미완성인지라 예수의 재림이 늦어 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는데....야훼와 예수는 이천년 동안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그것은 쬐끔 궁금하기는하다만....
사족둘:예수는 천국을 비유로 밖에 설명 못했는데 계시록 기자는 어떻게 천국의 모습을 그렇게나 상세하게 설명했을까?
[이 게시물은 꽹과리님에 의해 2004-06-04 18:10:19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