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지혜문학과 시편 시가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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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Re:지혜문학과 시편 시가의 이해

손오공 0 1,594 2004.05.18 07:48




 

지혜문학과 시편 시가의 이해


 



1.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이라고 하면 문학의 한 분야를 말하는 것 같은데, 왜 이러한 이름이 주어졌나요?

"

문학이란 거대한 말이다. 그것은 문자로 기록되거나 책으로 인쇄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는 유명한 정의와 같이, 여기서 말하는"문학""글로 씌어진 것"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 개념입니다. 사실 이런 쓰임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에서 "문학"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에 대응하는 "()"으로서, 문자로 기록된 문장이나 이와 관련한 모든 학문을 뜻해왔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거룩한 책이지만

, 동시에 인간적인 말과 글로 표현된 인간의 글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 전체는 일종의 문학작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에 일반 문학작품들을 연구하는 방법들이 동원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학작품이기도 한 성서는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 구약성서는 주제에 따라 법-, 역사-, 예언-, 지혜-, 묵시 문학 등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2.

성서적 의미의 "지혜"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지혜"라는 말마디는 무슨 뜻인가요?

지혜 또는 슬기를 사전식의 정의에 따라서

"사리를 바르게 판별하고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정도로 이해한다면, 성서의 지혜나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지혜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 고대 중동과 성서의 세계에서는 지혜 및 지혜를 갖춘 이, 곧 현인의 개념을 넓게 이해한다는 사실입니다. 최고의 현인이라 여기던 임금 그리고 왕실 고문, 정부의 고위 관리들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기술을 지닌 이들을 현인이라 부릅니다. 금속 세공인, 목수, 재단사 (출애 31,1-11), 천막 기술자(출애 36,8), 대장장이(이사 40,20), 선원(에제 27,8), 심지어는 곡()을 전문으로 하는 여자들(예레 9,16),점성가, 해몽가, 마술사등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만이 아니라 기술도 지혜라 했고, 온갖 종류의 학문을 총괄하는 개념이기도 했습니다(지혜 7,17-20 참조).

더욱 근본적인 차이점은 이스라엘의 종교관에 기인합니다

.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들의 전 존재를 포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초에는 종교와는 관계없이 지혜가 생성 발달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신앙 안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이 고유했기 때문에 그 지혜 역시 고유하고 유일한 것으로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중동의 지혜와 성서의 지혜를 비교하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3.

성서의 어떤 책들이 지혜문학에 속하나요?

유다인들은 구약성서를 율법서

, 예언서, 성문서(聖文書)로 분류하고, 이중 성문서(율법서와 예언서 이외의 기타 거룩한 문서라는 뜻)에 속하는 욥기, 잠언, 전도서를 지혜문학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제2경전에 들어 있는 지혜서와 집회서가 여기에 보태집니다.

그런데 아가

(雅歌)의 머리글(1,1)에 보면 이책의 저자가 솔로몬으로 되어 있어 때로는 이 책을 지혜문학의 대열에 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노래"라 할 수 있는 아가는 그 내용상 지혜문학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욥기·잠언·전도서·(아가)·지혜서·집회서가 본격적으로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을 이루는 셈이죠. 그러나 지혜문학은 이 책들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지혜문학은 구약성서의 시작에서부터 그 끝까지 이르는 하나의 사조입니다. 시편집에서는 지혜시편들이 있고, 구약의 그외 다른 책들에도 지혜문학적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4.

지혜문학이라는 범주 속에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집회서의

"머리글"은 이렇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와 그 뒤를 이은 후대의 저서들이 우리에게 위대한 가르침을 많이 전해주었다. 이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민족의 학문과 지혜는 찬양을 받을 만하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의 지식을 쌓는 것에 머물지 말고 쌓은 지식을 말로나 글로 나타내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조부 예수가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분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우리 조상들이 남긴 다른 저서들을 열심히 공부하여 통달한 후 그 자신도 교훈과 지혜를 담은 책을 저술 하기로 하였다. 그 목적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가르침을 아울러 익혀서 율법대로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과 같이 삶의 지혜를 깨닫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의 일원으로서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려는 교육적 의도를 지닌 글을 지혜문학이라고 합니다

. 사실 일찍이 문자가 발명된 고대 중동에서는 이러한 문학을 글로 정착시키고 또 기존의 글들을 수집하는 노력을 매우 오래 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기록과 수집, 편찬, 이것이 고대 중동 지혜문학의 큰 특징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욥기·잠언·전도서·지혜서·집회서가 바로 전체적으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5.

그러면 지혜문학을 특징짓는 무엇인가가 있겠군요?

우리가 성서의 지혜문학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글이 대부분 운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 고대 이스라엘 현인들의 가르침의 내용과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그것이 시적인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은 가장 큰 외적인 특징입니다. 이는 고대 중국의 경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이죠.

지혜문학의 이러한 특징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유형이 바로

"경구" 또는 "금언"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잠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잠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구약의 책을 연상하게 됩니다만 잠언이 그 한 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선 알아두도록 합시다.

 



6.

지혜문학의 대표격인 잠언에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가장 큰 특징으로는 우선 대구법 또는 평행법으로 불리는 표현방법이 있습니다

. 절하나가 거의 항상 두 개의 행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같은 범주에 속하는 다른 한 면을 덧붙이는 방식입니다.

"

허위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하고/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는 빠져나가지 못한다"(잠언19,5). 이런 식의 표현을 동의적 대구법이라 합니다. 또한 반대되는 내용을 기술하기도 합니다: "불의의 보화들은 소용이 없고/정의는 죽음에서 구해준다"(잠언 10,2). 이를 반의적 대구법이라 하는데,예컨대 잠언 10-15장 사이에는 이 표현 방법이 거의 연이어 되풀이됩니다. 이 밖에도 이른바 점층적 대구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고/이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 18,21)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2행에서는 새로우면서도 1행에 이어지며 점층적인 내용을 추가하는 방법입니다.

대구법 외에도

"정의 속에 작은 것이/불의 속에 큰 소득보다 낫다"(잠언 16,8)와 같이 두 가지 사실을 비교하거나 또는 "정신에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파괴되어 성벽이 없는 성읍이다"(잠언 25,28)와 같이 두 가지 내용을 대비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잠언의 위와 같은 형식을 살펴가면서 그 내용을 음미해 나간다면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7.

이 밖에 또 다른 표현방법들도 있나요?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 중요합니다

. "그 어미에 그딸"(에제 16,44)처럼 우리 귀에도 익은 속담이라든지, 모든 민족에게 공통된 현상으로 수수께끼가 있고(판관 15,14), 수잠언(잠언 6,16)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물이나 사람들을 공통 분모에 따라 하나로 묶는 것이죠,그리고 교훈시도 있습니다.(15,17-35).

지혜문학의 표현 방법으로는

(때로 기도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는)시편의 형식도 있습니다. 탁월한 정치 풍자인 요담의 우화(판관 9,7-15),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저지른 다윗에게 자신의 죄악을 꼼짝없이 인정하게 만든 예언자 나단의 비유(2사무 12,1-15)도 있고, 듣는 이에게 흥미와 교훈을 주는 대화 유형도 들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대화의 형태로써 진리를 찾고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욥과 친구들 그리고 하느님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되는(운문으로 된)욥기의 중간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8.

이스라엘에서 지혜문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이스라엘은

, 먼 옛날부터 지혜문학의 꽃이 피기 시작한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화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방들에서는 그것이 매우 일찍부터 기록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왕이 세자에게 또는 왕실의 고위 관리였던 서기관이 자기 자식에게 업무와 생활에 관해 내린 가르침이 있고,또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철학서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서 삶과 죽음, 고통 등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심오한 생각들을 기록한 책들도 있습니다.

특히 에집트에서는 지혜가 하나의 신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 마아트라고 불리는, 상아로 된 이 여신의 조그만 모상들이 북부 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의 궁궐에서 9세기 경에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신이 이스라엘에도 알려졌던 것 같습니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활발한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 무역과 더불어 문물의 교류도 빈번히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대 중동의 상호 교류의 한 교차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역, 외교 관리와 국제 결혼(예컨대 솔로몬은 에집트의 공주와도 결혼했습니다)등을 통하여 당시 주변 국가와 민족들에서 발달한 문화 예술 역시 이스라엘에 전달되어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9.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문화적으로 더 발달한 외국의 지혜문학을 그대로 본뜬 것인가요?

 


잠언

2217-2314절은, 기원전 1150-2000년 사이에 기록된(에집트 행정관리였던) "아멘엠오펱의 지혜"를 직·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301-14절과 311-9절은 각각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굴""마싸의 임금 르무엘"의 잠언들로 전해지는데, 마싸는 아라비아 북쪽에 거주하는 한 족속의 이름입니다. 잠언의 이 두 작은 모음은 외국 현인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에서 우리의 큰 흥미와 관심을 끄는 인물인 욥도 외국인입니다(욥기 1,1).

이러한 사실은 곧 지혜문학의 국제성

, 진리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혜는 진리의 추구입니다. 진리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진리를 독차지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종족과 종교가 다르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혜의 보편성과 아울러 자기들 지혜의 고유성에 대한 자각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방적인 도입이 아니라 선별적이고 정화 과정을 거친 수용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10.

그렇다면 갈등도 있었겠군요?

그렇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곧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입각한 순수성을 고수하기 위하여(물론 때때로 실패하기도 했지만)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선두주자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연히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외국의 지혜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동포들에게 그 지혜의 한계를 똑바로 보도록 역설하였습니다.

"

소안의 고관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고/파라오의 슬기롭다는 고문관들도 미욱한 것들,/ 그런데 어찌 너희가 파라오에게,/"나는 현자의 문하생이요, 왕가의 후손입니다"할 수 있겠느냐?"(이사 19,11-12)라고 이사야는 에집트의 지혜에 희망을 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타합니다. 그리고 제2이사야는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 일을 다 아는 체하며/"이 세상엔 나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47,10)라는 말과 함께 교만에 빠진 바빌론에게 멸망을 예고합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바빌론이 자리잡은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외에 사해 남쪽의 에돔도 그 지혜로 유명했습니다.

이런 에돔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신탁을 선포합니다

:"에돔의 운명./ "나 만군의 야훼가 선언한다./데만에서 지혜가 사라졌느냐?/슬기롭다는 자들의 생각이 막혔느냐?/지혜가 메말랐느냐?"(예레 49,7).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사대주의에 빠져 자기들의 하느님께가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의 정치.군사적 힘에 의지하고 아울러서 자기들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훼손되거나 상실됨을 염려했고,또 사실이 그러함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11.

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혜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품은 적은 없나요?

, 있습니다. 예컨대 열왕기상 5장에 따르면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어떤 사람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하였고(1열왕 10,1-13),에집트의 어떤 현인도 풀지 못한 파라오의 꿈을 푼 요셉(창세 41),에집트의 마술사들과 현인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내보인 모세(출애 7,8-9,12) 그리고 바빌론의 모든 현인들을 제치고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의 이야기(다니 2; 4) 등은 이스라엘 지혜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인 우월주의가 아닙니다. 그 우월성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곧 솔로몬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지혜를 받았고(1열왕 5,9), 요셉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창세 42,18)으로서 그분의 보호를 받았으며(창세 39,2),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으로서 그분의 보장을 받았고(출애 3,12), 다니엘은 하느님께 간청하여 필요한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다니 2,18-19).

이스라엘의 지혜가 외국의 지혜보다 우월할 수 있었다면 그 근거는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오직 야훼 하느님께만 있었습니다

.

 


 



12.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외국의 지혜문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 "야훼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이 바로 이스라엘의 지혜를 여타의 지혜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요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혜란 결국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집회 1,1). 때문에 인간 쪽에 요구되는 지혜의 바탕은 올바른 종교적 자세, 곧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서 자녀와 같은 공경의 자세입니다.

"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요,/거룩하신 분을 앎이 곧 깨달음이니라"(잠언 9,10)라는 말씀과 같이 지혜의 근본은 주님을 경외함입니다(잠언 1,7; 2,5; 15,33; 욥기 28, 28; 시편 111,10 등 참조). 이 근본이 없을 때, 인간적인 지혜를 아무리 많이 쌓았다 해도 결국 모래 위의 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문학에서 자주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일반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우둔한 자이고, 하느님을 부정하며 살고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악인인 것입니다.

 



13.

지혜문학에서 주로 가르침이 많은 걸 보면, 지혜를 가르치거나 기록한 이들은 지위가 높았나보지요?

예레미야

1818절에 언급되어 있는 사제, 현인, 예언자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 부류의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인들은 왕실과 국가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는 관리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지혜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서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잠언들을 수집,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사절로서 직접 외국에 나갈 수도 있었고,외국의 사절과 문물에 누구보다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외국의 지혜문학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잠언 25-29장은 이들이 수집 또는 필사한 것입니다(잠언 25,1). 그렇지만 지혜의 가르침과 기록이 이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지혜를 가르친 이는 우선 부모입니다."....네 아비의 교훈을 들어라,/네 어미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잠언 1,8)라는 말씀과 같이 옛날 이스라엘에서도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혜를 가르치는 다음 주체로서 (옛날 우리 나라 사정과 별로 다르지 않게)마을의 원로와 스승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잠언

18절은 "내 아들아!"로 시작하는데, 지혜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 호칭은 일반적으로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것입니다. 지혜문학의 보존과 전달 장소로서 왕실 이외에 학교가 또 있었던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스승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쓰기 공부를 통해서도 조상 전래의 금언·격언·속담 등 지혜문학적 민족의 슬기가 전수되었습니다.

 



14.

그렇다면 옛날 이스라엘에도 학교가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 "학교"라는 낱말은 구약성서 말기에 저작된 집회서 5123절에 딱 한 번 나옵니다. 그러나 문명이 더욱 발달했던 이웃 나라들이나 구약성서 자체의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학교 교육이 있었다고 거의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상 1419절이나 29절 등을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에는 왕조실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서기관들과 이들의 신분 계급을 전제합니다. 글을 배우고 문학적 재질을 연마하기 위한 일종의 서기관 학교가 있었다는 것이죠. 특히 국가 체제의 일대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던 솔로몬 치하에서는 많은 관리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양성하는 관리 학교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읽고 쓰기를 잘해야 했고,사제가 되기 전에 종교 의식에 대한 일가견을 가 지고 있어야 했는데, 이는 일종의 사제 학교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5.

어떤 사람이 지혜를 얻을 수 있었나요?

옛날의 실제 상황을 고려할 때

, 지혜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임금 다음으로는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있듯이 조정의 고위 관리들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누구나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지혜가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사회 상류층에만 한정되지 않은 선택된 백성 전체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혜는 상류 계급을 벗어나서 이를테면 민주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지혜를 배우는 주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경험과 지식이 없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쉬 받아들이고, 지혜에 의해서 선으로 권유받기도 하고 악한 자들에 의해서 악으로 유인될 수도 있는, 아직 교육을 받지 않아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현인들의 교육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잠언 1,4; 9,4,16등 참조).

 



16.

가끔 지혜가 사람인 것처럼 표현되던데 지혜는 어떤 존재인가요?

잠언

120-33절과 8, 91-6절에 보면, 지혜는 의인화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화한 지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로서 아직도 토의가 계속되고 있지요. 우선 실제적 인격체와 시적(詩的)인격체가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 말에서는 구태여 시적 문장이 아니더라도 비인격체와 무생물이 곧잘 인격체로 그려집니다. 이 둘 사이에 위치한 지혜는 인간의 속성도 아니고 하느님의 속성도 아니며, 인간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닌 제3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는 생각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에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와 같이 신또는 신적인 존재라고,혹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개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엄격한 유일신 사상이 용납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의인화한 지혜는 비록 중개자는 아니더라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 하느님 쪽에서 인간을 위해서 인간에게로 보낸 그 무엇이 바로 의인화한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한없이 초월하시는,그러나 이 세상에 특히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라는 맥락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17.

욥기의 어떤 부분은 산문으로, 어떤 부분은 운문으로 되어 있군요?

그렇습니다

. 구약성서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며 세계문학사 안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욥기는 산문과 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문으로 된 머리말과 맺음말에서는, 욥이라는 사람이 어떠한 고통을 영웅적으로 감수하고, 어떻게 행복을 되찾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운문으로 된 부분은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욥과 하느님 사이의 대화를 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선은 산문과 운문으로 된 두 부분을 서로 떼어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욥기의 구성을 보면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욥 이야기의 원바탕은 일종의 민간 설화로서 이미 기원전

2천 년대 말기부터 중동 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욥기의 저자가,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도 알려져 있던 이 욥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운문으로 된 대화 부분을 지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원래의 욥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윤색했을 것입니다.

성서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님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이는 이상한 일도 아니고 또 그 가르침이 약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욥기의구성

)

 



머리말

(산문)

1-2


대 화

(운문)

 


3-42,6


*

욥의 독백: 3

 


*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4-27

+--------------------------------------------------------------


| 첫째 차례

: 4-14장 둘째 차례: 15-21장 세째 차례: 22-27

+--------------------------------------------------------------


| 엘리바즈

(4-5) 엘리바즈(15) 엘리바즈(22)

| 욥

(6-7) (16-17) (23-24)

| 빌닷

(8) 빌닷 (18) 빌닷 (25)

| 욥

(9-10) (19) (26-27)

| 소바르

(11) 소바르 (20)

| 욥

(12-14) (21)

+--------------------------------------------------------------


 


* (지혜 찬가: 28)

 


*

욥의 독백: 29-31

 


*

엘리후의 발언: 32-37

 


*

주님과 욥 사이의 대화: 38,1-42,6

+-------------------------------------------------------------- | 주님의 첫째발언

: 38,1-40,2 주님의 둘째발언: 40,6-41,26

| 욥의 대답

: 40,3-5 욥의 대답: 42,1-6

+--------------------------------------------------------------



 


맺음말

(산문)


42,7-17.



18.

욥과 그의 친구들은 왜 논쟁을 벌이나요?

욥은 고통에 못이겨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느님께서는 왜 생명을 주셔서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하는가 하는 한탄과 원망 섞인 욥의 독백에 이어, 그와 친구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됩니다. 대화는 자연히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둘러싸고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자기 쪽에서는 당연한 것을 상대방이 부정하기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데 선행에는 행복이, 악행에는 불행이 자동적으로 따른다는 전통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이 논란의 배경입니다. 욥은 지금 고통중에 있으니 원인은 둘 중 하나입니다. 욥 자신이거나 아니면 하느님이십니다. 친구들은 욥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 욥에게 있다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이런 설명과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 고통과 죄악을 잇는 직선적 관계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비록 젊은 날에 하찮은 죄를 조금 지은 적은 있지만, 지금의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할 어떠한 죄악을 저지른 바가 없으므로(31) 죽어도 자신의 무죄함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27,5).

그러니 욥에게는 자신의 고통에 대한 원인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자기를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처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욥의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였습니다. 그것은 신성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는 자연히 격정을 더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

그러면 욥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욥이 바라는 것은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도

, 행복했던 시절의 복구도 아닙니다. 욥기의 산문과 운문은 각각 막다른 처지에 몰린 인간의 품위와 긍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산문의 욥은 "알몸으로 어미 배에서 나온 몸/알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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