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그러나 필자는 몇가지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암송은 하고 있겠지만 과연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까?
*현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 보면 상이한 종교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오늘은 시편23편이 기독인들을 어떻게 세뇌시키고 있는 지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1~6) >>....개역
1)우선 번역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을 하겠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의 귀절을 해석해 보시라.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내 머리에 기름을 발랐는데 왜 내 잔이 넘칠까?
그렇다.번역 자체가 운율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겠다.번역이 애매하다 보니 많은 목사들이 오해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다윗이 머리에 기름받은 왕이니 메시아 임직으로 풀이하고자하는 시도가 되겠다.
여기서 히브리어 원어 문제는 생략하자.
그러나 이 문장에 묘사된 장면 즉 장소를 생각해 보면 상기 풀이의 오류가 금방 발견된다고 본다.
시편 23편 5절에서 시인은 지금 야훼의 손님이 되어 그 식탁에 초대받고 있다는 표현이 아닌가?
이 문장을 해석하는 열쇠는 우선 그 장소가 야훼의 잔치집임을 기억하자.
그 다음에 유대인들의 잔칫집 관습을 이해하면 모든 게 해결되겠다.
고대 중동에서는 손님이 집으로 들어올 때, 주인이 입구에 서서 그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그를 정중하게 맞아들이는 풍속이 있었다한다. 때로는 들어오는 손님에게 향수를 뿌려 주기도 했다고 하고.....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이러한 풍습에 대해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 주었다. (눅 7:46) >>
*예수가 어떤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람을 초대해 놓고는 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예절을 생략했냐고 그 바라새인을 나무라는 장면이 되겠다.
그렇다.시편 5절에 묘사된 기름 운운은 잔치집의 의례적인 손님 대접이지 메시아의 기름부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봐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뒷 귀절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란 뜻도 정리되리라 본다.
사실 아주 간단한 내용인데 번역자의 주관이 너무 일방적이다 보니 이러한 오해도 발생하였다고 생각된다.자...그러면 다른 번역본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공동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표준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NIV
*시편 역시 시가의 한 장르임으로 운율의 중요성은 인정이 된다.그러나 그 뜻을 생략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게다가 오해를 해서야 ....
*물론 기독인들에게 바이블의 해석은 성령님이 다 알아서 해 주겠지만....
2)기본적인 의식의 문제점
다음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목자 즉 목동과 양...그리고 그 원수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보겠다.
***목동의 역활과 능력***
당연히 양을 보살피는게 그의 임무가 되겠다.그러나 목동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즉 골짜기를 헤메는 양을 인도하거나 늑대나 이리 한 두마리 정도로 부터는 보호할 수 있겠지만 만약 이리떼를 만난다면 그리고 사자같은 포악한 맹수를 만난다면 목동이 양들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능력에 한계가 있는 신이라?....그러한 야훼를 그대는 인정할 수 있겠는가?
(사실 야훼의 능력은 너무나 보잘 것 없음도 사실이겠다.)
목사니 교주니 신부니....모두들 능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언제나 기억하자.
***목동의 목적***
능력껏 목동은 양들을 보호할게다.그러나 양은 결국 목동의 재산임에 다름아니다.
잘 보호하고 키워 나중엔 목동의 식량이 되고 그 가죽과 털은 목동의 필수품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눈 어둡고 고집세며 어리석은 양을 키우고 보호하는 그 목적은 양이야 말로 그의 귀한 재산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양이 이쁘서 혹은 귀여워서 아니면 가여워서....그러한 목적으로 양을 목축하는 목동이 과연 있을까?
기독인들은 목자가 양을 보호하며 먹이를 주다는 사실만 의식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억하시라....목동의 최후의 목적을.....신도들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목사들의 최종 목적을!
***양의 속성***
양은 눈이 어둡다.그리고 순하다....그외 어리석다.....
이렇게 이미지화된 양을 신도로 정의하고자하는 게 기독교의 음모라고 생각한다.
왜 신도들이 그렇게 어리석고 길도 못 찾으며 고분고분해야만 하는가?
원래 양은 산에서 홀로 생존이 가능했던 산양이 그 선조라 한다.
기독인들도 목사들의 밥줄 역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 즉 자아를 되찾는 작업을 해야되지 않겠는가?
산양이 되길 권한다. 차라리 염소가 되길 권한다.
3)그외 문제가 되는 귀절
*내게 상을 베푸시고
이 귀절은 상급 (賞給)을 주다할 때의 상이 아님을 알자.밥―상(―床)을 차리다할 때 사용되는 그 床이란 뜻이다. 즉 내 원수들을 약 올리려고 야훼가 그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한상 거하게 나를 위하여 차려줬다는 뜻이 되겠다.
*원수의 목전이란 표현
상기 시편은 다윗이 60세 가량되었을 때 발생한 맏아들 압살론의 반란이 그 배경이라고들 한다.
아들과의 권력 투쟁에 승리한 다윗이 그후 10년 정도 더 왕노릇했음을 야훼에게 찬미했다는 전설인데....그러나 아들이 애비를 배반했기로서니 꼭 적이란 표현을 사용했어야만 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사기치는 예수의 위선이 생각난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야훼란 그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한다는그 목적의식이 참람하기만 하다.
의의 길은 야훼의 이름만을 찬미해야한다는 그 선민의식이 역겹기만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울의 이신득의의 도그마와도 배치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믿음만이 의에 이르다는 사상과 야훼의 신적 존재를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한다는 관념은 전혀 다름을 인정하시겠는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영혼의 부활이 되겠는데....미안하지만 다윗 당시는 부활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상기하시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앞 귀절에선 푸른 초장이니 쉴 만한 물가니 하며 목가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다가 갑자기 사망이니 원수니 하는 살벌한 단어가 나오는 댓귀로 이 글은 구성되어 있다.
아마 바빌론 유수 당시 미트라교의 지옥 관념이 유입된 게 그 원인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윗 당시 죽음의 개념은 그저 잠잔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았겠는가?
이 귀절을 보면 다윗의 저작설은 신빙성이 감(減)해진다고 사료된다.
4)기복 신앙의 위험성
목자 즉 야훼만 잘 믿고 따르면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겠고 죽음도 두렵지 않으며 원수되는 무리들도 알아서 처리해주며...게다가 잔이 넘치도록 축복도 해주니 나는 영원히 야훼의 집에 살겠다....하는게 이글의 주제가 되겠는데
전형적인 기복 신앙이 아닌가 한다.
신을 믿는 이유가 복을 받고자하는 게 그 원래 목적이던가?
시편 23편은 그 운율의 교묘함으로 인해 많은 기독인들이 거기에 감추인 음흉한 모략을 모르고 암송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람이 세뇌된다는게 이러한 경우라고 판단되지 않은가?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꾸 암기만 하다보면 문자의 노예 즉 세뇌가 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다시 한 번 그 뜻을 생각해 보며 시편23편을 상고해보시길 권유하노라....
사족:아래 우스개글들이 개역판 보다는 번역이 잘 되었다고 판단되는 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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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전라도 버젼]
아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의 부족함이 있겄냐?
그분이 나를 저 푸러브른 초장으로 뉘어불고 내뻗친 다리 쪼매 쉬어불게 할라고 물가상으로 인도해뿌네! 어쩨쓰까 징한거...
내 영혼을 겁나게 끌어 댕겨불고 그분의 이름을 위할라고 올바러븐 길 가상으로 인도해부네~! 아따 좋은거....
나가 산꼬랑까 끔찍한 곳에 있어도 겁나불지 않은것은 주의 몽댕이랑 짝대기가 쪼매만한 일에도 나를 지켜준다 이거여~!
아따~!! 주께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 앞에서 내게 밥상을 챙겨 주시고 내 대그빡에 지름칠해 주싱께로 참말로 나가 기뻐블그마이
내가 사는동안 그분의 착하심과 넓어브른 맴시가 나를 징하게 따라 당깅께로 나가 어찌 그분에 댁에서 묵고 자고 안 허겄냐.
[경상도 버젼]
여호와가 내 목자 아이가! 내사마 답답할끼 없데이
시퍼런 풀구딩에 내디비지고 저쓴한 또랑까로 낼로 이끄신데이
내정신 챙기시사 올켸 살라카심은 다 저그체면 때문이라카네
내 죽을뻔한 골짜구 디기 껌껌한데서도 간띠가 부어 댕길수 있음은 그빽이 참말로 여간 아이라! 주의 몽디와 짝대기가 낼로 지킨다카네
내 웬쑤 죽일놈 문~디자슥 앞에서 낼로 팔팔 키워 주시네
내 인생이 아무리 복잡타 케싸도 저양반이 맨날 지켜줄끼니까 내사 우짜든지 그옆에 딱 붙어갖고 죽어도 안떠날끼다.
[충청도 버젼]
여호와는 염생이 같은 지를 키우시고 멕이시는 분이시니 지가 부족한 것이 없네유.
그분이 지를 무지무지 파란 풀밭에 어푸러지게 하시며 니나노 하기 딱좋은 둠벙 가생이로 인도하여 주셔유
지 영혼을 살려주시구유, 그분의 함짜를 위하여 의의 질루 인도하시는 것이지유
지가 죽어 나자빠질도 모를 깡깜하고 칙칙한 골짜구니로 댕겨두 해꼬지를 무서않는 것은 주님께서 지와 같이 하시기 때문이지유. 하마 주님의 지팽이와 막대기가 지를 지켜주시네유
주님께서 지 웬수의 면전에서 상다리가 부러질정도로 잔치를 여시구 지름으로 지 머리에 발라주시니 지가 몸둘바를 모르겠네유 시방두 지 잔이 넘치네유
지 평생동안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참말루 지를 따라댕길 모냥이니 지가 여호와의 집에 아예 푹 눌러 살것시유.
[강원도 정선 버전]
여호와가 내 목자래요 있자나요, 내가 몬자라능기 항개도 엄써이요 그부이 나를 시퍼런 풀박까로 델꼬가서 자뻐띠리고 펜안한 물가에서 푹 쉬라고 하시자나이요. 내 영혼을 글쎄 벌떡 이르케 세우시고 자기 이름을 우해서 똑빠른 길로 가라고 하세이요. 내가 기가 맥힐 시커먼 고라데이, 짜들배기로 댕긴다 해도 아무 탈도 엄는 거는 그부이 지패이 하고 짝때기를 가주고 나를 가만 나두지 않하기 때무이래요 우리 아부지가, 호래이가 콱 물어갈 저 나뿐 눔들 앞에서 잔치싸을 채래주서서, 지름으로 내 골에 버서 발러 주섰쓰니 내 바가지가 넘챘써이요. 내 펭새애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말로 나하고 같이 댕기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있쓸끼래요. 거럼요
[피양버전]
아 여호와가 내목잔데 뭐~이가 부족하간~`? 거저~ 시~퍼런 풀밭에 쉬라딜 않나 목마르문 거저 물가로 데리가딜않나 야, 뭐~이가 부족하간? 내 이 영혼 소생시켜 주시디, 거저 똑바루 살라 하시디, 긴데 건 자기 이름 땜에 기러시는 거래두만. 음침한 골짜기 가봔? 넷날엔 거이 무서워뜨랜는데 거 이젠 하나두 안 무서워 야 거 주님이 거저 지팡이랑 막대기! 거이루 지켜주디 않니~ 거저 나 안~심이야 야 ..거럼! 보라우 거 아구 악~척같은 웬수놈들 있디? 아 그놈들 보란듯이 거~저~~ 아, 우리 주님이 내 앞에다 거저 잔치상을 떡!하니 벌려주디 않앗간? 거저~ 잔이 콸~콸 넘치게 따라주시면서 거저 귀한 손님 대접하듯 하는 거야 야 기리니끼니 거저, 생각해 보라우 얼~마나 이 속이 시원했간..이? 기티 않았가서? 긴데다가 야 또 보라우 기거이 한번만 기러는거이 아니래 야 거저 내 평생 내편이래 야 내래 거저 평~생 우리 여호와 하나님 집에 살기루 해서.
[TV 버젼]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나로 하여금 편안한 자세로 앉게 하시고
가벼운 오락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 육신을 기름지게 하시며 그의 이름을 위하여
아무 할일없게 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여가의 시간을 보낼지라도 일어나 애쓸 필요가 없음은
해야할 모든 일들을 잊게 하여 주시고 모든 재미 거리를 안겨 주시는도다
세상에 잡다한 것을 무수히 알게 하시며 모든 자극으로 부터
무디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멀게 하시며 기도의 시간을
빼앗아가시니 내잔이 텅텅 비어 가나이다
그런대로 재미있고 흥미있는 일들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TV앞에 영원토록 거하면 안되는줄 알면서도 거하게 되는도다
[이 게시물은 꽹과리님에 의해 2004-06-07 20:07:39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어찌하여 사막의 유대 개잡신이 이나라의 사랑이 폴폴 넘치는 하늘님(?)이 되었는지... 손오공님의 글 항상 주의깊게
그리고 즐겁게 읽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양은 눈이 어둡다.그리고 순하다....그외 어리석다.....
이렇게 이미지화된 양을 신도로 정의하고자하는 게 기독교의 음모라고 생각한다.
왜 신도들이 그렇게 어리석고 길도 못 찾으며 고분고분해야만 하는가?
원래 양은 산에서 홀로 생존이 가능했던 산양이 그 선조라 한다.
기독인들도 목사들의 밥줄 역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 즉 자아를 되찾는 작업을 해야되지 않겠는가?]
산양이 되길 권한다. 차라리 염소가 되길 권한다.
***그 또 다른 근거***************************************************
[고린도전서 1:27~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