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60년 4.19 당시 온국민이 외쳤던 구호를 기억해 보자.
'방관자여, 그대 이름은 비겁자니라.'
그러하다.
우리가 아름다운 조국에서 살기 위해서는,자주적으로 당당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불의한 권력에 당당할 수 있는 참여가 필요하다.
무관심과 방관은 우리의 생존권과 자존심을 포기하게 하는 비극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은 지구촌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용기와 당당함은 반드시 소멸되어야할 기독교 자체내에서도 요구하는 덕목이 되는 역설도 성립되는 바, 그들 역시 순교자들을 아름답게 포장하길 즐겨 한다.
바이블 그리고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지만.....바울이니 야고보니 베드로니....모두들 순교를 하였다고 거짓 증거를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좋다. 그들이 순교를 하였다는 억지 정도는 용납할 용의가 있다. 실재로 예수라는 잘못된 관념적 존재 때문에 목숨을 포기한 사람들은 분명 있었으므로....
순교자들의 본질은 그들이 신봉하는 신앙 혹은 신념에 용감하였다는 것 정도가 되겠는데
무엇보다 우울한 것은 그들이 예수의 정체를 제대로 알았으면 과연 그렇게 몸바쳐 전도를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이다.
불의한 권력 혹은 상황에 처했을 때,예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오늘은 예수가 얼마나 비겁한 존재였는 지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다.
1)요한의 죽음을 보고 도망가는 예수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그러나 여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육로로 따라 왔다. (마태 14:12,13) >>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 스승의 죽음을 왜 예수에게 알렸을까?
아마 스승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예수의 신적인 권능으로 복수를 해주길 원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고,그저 위로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이도 그리고 예수의 안위를 걱정하여 도피하길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았다. 예수는 요한의 억울함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보여 주지 않았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두려워 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도망치기 바빴음을 바이블은 증거하고 있다.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탁자를 뒤엎던 그 용감했던 예수가 왜 안티파스에게는 충고 한마디하는 용기를 보여 주지 못했을까?
2)고향 사람이 두려워 도망가는 예수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 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마태 13:57,58) >>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자 변명하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나 서글프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대학(大學)》의 8조목(八條目)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인류의 구원 운운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던 설득을 하던, 예수의 공생애는 자신의 고향에서 부터 시작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믿지 않아서...라는 변명 한마디만 남기고 고향 사람들을 포기하고 만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가 폭로될까봐 다른 마을로 도망가는 예수에게서 그대는 무엇을 느끼는가?
3)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22:21) >>
야훼 혹은 데오스가 만일 모든 만물에 선재하는 궁극적 실재임을 예수가 진실로 믿었다면 과연 이러한 변명이 필요했을까?
상기 글을 그대로 인정하자면 카이사르와 창조주가 동격이라는 의미가 되지 않겠는가?
예수는 좀더 솔직해야만 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터이니 나자신의 포교 행위 쯤 눈감아 달라고....
아니면 용감하게 ....모든 것은 즉 로마의 권력도 야훼에게 속한다고 하던가.
비겁한 예수의 교언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4)게세마네 기도의 현장
<< 예수께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그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마태 26:38) >>
예수는왜 마음이 괴로웠을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 첫번째 요인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외 그에게 양심이 있었다면 유다를 배신자로 만든 자신의 과오에 대한 후회도 있었을 터이고...
문제는 그가 진실로 용감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용감하게 대처하였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비겁하게도 자살을 선택하였다.
예수는 말로만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 내다가 행동에 대한 자신과 확신이 없자 비겁하게도 죽음을 선택한 옹졸한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하다.
그러하다.
예수는 안티파스의 부당한 횡포에 대해 외면을 하였으며
가장 가까웠던 고향 사람들의 구원에는 냉담하였다.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침략,통치했던 로마의 권력에는 굴종 혹은 타협하기 바빴으며
자신의 행동에 마저 당당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방관자 그리고 비겁자라고 부른다.
소위 순교자들은 의미없는 한편으론 억울한 죽음을 자초했음이 틀림없다.
저도 처음 한토마에서 손오공님 글을 읽고
그동안 갖고있던 선입견으로 이렇게까지 ,,하는 의심도 있었읍니다
그후 수 십편의 글을 보면 예수가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미화되어 알려졌는가를 깨닫게 되었읍니다
개독들의 줄기찬 왜곡과 P.R로
보통 정도의 상식인이라면 그 허구를 타인의 도움없이도 능히 간파할 수 있었을 터인데 워낙 허상이 깊이 심어져 진실을 알기가 어려웠읍니다
종교적 색채가 덧칠해져서 겠지요
그동안 손오공님의 글을읽고 덧칠을 베낄수있었읍니다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