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新川基徹'는 누구일까?
개신교 선교 150년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있는 사람 중의 한분....
세차례에 걸친 투옥 그리고 옥사한 주목사의 안타까운 죽음 자체에 대해 평가 절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겼더라도 그리고 선행을 실천한 사람이라도 혹시 우상화된 것은 아닌지 혹은 누군가가 그 인물을 과대 포장하여 어떠한 이득을 꾀하고져 하는 음모의 소산물은 아닌지 하는 의문은 인간 누구에게도 허용된 이성과 오성의 권리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들은 제3계명에서 열번째 계명까지는 무시하기를 즐겨한다.
그들은 조상에게 예를 표하는 제사를 거부한다.
주기철 목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기독교라는 일개 종교 종파의 입장 그리고 가족과 지인의 입장으로선 그의 순교 행위는 대단한 의미로 매김함에는 필자도 당연히 동의한다. 그리고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연민의 정을 보냄은 예의임에 틀림없겠다.
하지만 그가 과연 민족주의자 그리고 독립운동을 했느냐하는 것은 그의 순교와는 별도로 검토되어야할 사항이 아닌가하는 게 필자의 의문임을 밝혀 두겠다.
그의 최초 부임지 부산의 초량 교회는 전임 목사 정덕생이 약 10년 간 재직 시 백산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과 연계하여 독립 운동의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후 그의 행적에도 독립운동 혹은 민족운동에 기여한 공로는 전혀 없음이 사실이 아닌가한다. 게다가 그는 창씨개명에도 거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는 데,이는 국가로서의 일본 제국주의를 인정한 대표적 사례로 추증된다.
혹자는 그가 오산학교 출신이라서 민족주의 정신에 투철하였을거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오산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남강이나 고당같은 민족주의자였을까?
필자의 모교 선배로서 허삼수,허문도씨 같은 군부 정권의 탄생에 일조한 부끄러운 분들도 있지만, 이철 선배같은 분은 군부독재에 항거하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지 않았던가.....오산 출신 운운함은 너무나 서글픈 변명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제의 정책에 과감히 죽음으로 항거한 것은 단지 그의 종교적 양심 문제의 결과였다고 판단되는 데, 그러한 행위가 기독신자들에게는 추앙받을 행위였을지라도 , 어떻게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건국훈장이 추서될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박희도,정춘수,정인과,양주삼 등과 같은 친일 매국 기독인 혹은 목사가 아님은 분명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과연 우리나라의 독립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였는 지 한번쯤 의문을 가져 보시길 권유한다.
2)그의 목사직 복권은 왜 50년 동안이나 미루워졌을까?
1997년 장로회 통합측은 주기철씨의 목사직 복권을 결의하였다 한다. 그리고 통합측 목사복권 결정 6개월 전에 독노회라는 작은 교단이 주기철 목사복권을 결정하고 선언했다고 한다.
반세기 전 평양 노회에서 면직된 목사직을 왜? 이제서야 복원을 하니 마니 하고 우스꽝스런 작태를 연출했을까?
자신들의 오류 혹은 죄과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그저 자파 교단의 정통성 확보와 위상을 위해 주기철의 상품화에 골몰하는 즉 주기철 내편 만들기라는 통합측의 작태가 바로 기독교의 참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하나더:정말 인류가 그리고 우리 민족이 공감할 그러한 일부의 목사..... 정말 있을까,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국땅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