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 기독교 개종의 교회사적 의미
손오공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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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9 07:19
게르만족 기독교 개종의 교회사적 의미
게르만인들의 기독교 개종은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 역사적으로 대종족으로 분류될 수 있는 종족 중에서는 세 번째의 개종이다. 바울에 의해 주도되었던 선교의 결과로 소아시아 지역 일대의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동양인들이 첫 번째 개종 종족이고, 두 번째는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으로 그 정점에 오른 로마인들, 즉 서양인들의 개종이었고, 현재는 서양인들과 섞였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졌지만 게르만인들의 개종이 세 번째가 된다. 이렇게 보면 동양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그리스 문화라는 동양 문화에서 두 번 지나고, 로마와 게르만이라는 서양 종족에서 두 번 지나면서 역사적 흐름을 이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해는 서양의 문화를 역사의 중심점에 놓고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방교회가 국가 교회의 모습으로 15세기까지 존속하며 발전했고, 이러한 동방교회 전통이 러시아 정교회를 통해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선교나 신학의 발전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로마 카톨릭을 중심한 서구 기독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 즉 비잔틴의 교회 역시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어쨌든 게르만인들의 개종은 기독교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시작이었고, 이들의 개종은 기독교 역사에서 지속적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이들의 개종 당시 기독교를 전해 주고, 전해 받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전해주는 로마 카톨릭 입장에서는 새롭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이 야만족들을 위해서 교육이나 계몽 등을 교회의 주요한 과제로 받아들여야했고, 또 게르만 사람들이 갖고 있는 법률이나 사회적 관습들의 영향을 받았다. 게르만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전통적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으므로 새로운 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살고자 노력해야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으므로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의 모습은 게르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아주 서서히 일어나서 클로비스의 개종 후 300여년이 지나서 나타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통해서야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 때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로마 사람들의 기독교와 게르만 문화가 하나로 합해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이 게르만 개종 사건을 "기독교의 게르만화(化)"(Germanisierung des Christentums)(Bernd Moeller의 위 책 132쪽)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게르만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므로 새로운 모습의 기독교 신앙형태가 나타나고, 여기에 기독교의 게르만화라고 까지 부를 수 있는 것은 게르만의 개종 과정에서 이미 잉태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게르만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엄격히 말하면 로마 카톨릭의 선교의 결과가 아니라 게르만인들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물론 아일랜드나 영국 선교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있는 패트릭이나 어거스틴, 대륙선교를 한 콜룸바누스나 보니파티우스 등이 로마 교회와 일정부분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 주요한 선교사들이 어거스틴을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영국교회가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로마 카톨릭의 서방교회를 따를 것인지를 놓고 논쟁했던 휘트비 회의에서 노스움브리아의 왕을 로마 교회 쪽으로 설득한 것은 교황에 의해 파송되기는 했지만 원 출생지는 동방교회인, 즉 바울의 고향인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테오도레(Theodore)였다. 그러므로 게르만인들의 기독교 개종이 로마교회의 선교의 결과라고 보고, 특히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건을 게르만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받아들이는 해석은 절반의 정당성을 가진다고 해야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게르만인들의 기독교는 로마인들의 영향보다는 자신들의 독자적 기독교로 발전 시켜 갈 상황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독자적 기독교란 물론 게르만인들 자신의 전통이나 문화가 새롭게 받아들인 기독교와 자연스럽게 융화됨을 의미한다. 우선 클로비스를 보더라도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그가 알레만덴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이 자신들의 전통적 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의 개종에서도 그들끼리의 전쟁이 큰 역할을 했고, 이긴 쪽이 기독교 신을 받아들이므로 영국의 기독교 개종이 이루어진다. 원래부터 호전적인 족속인 게르만족들은 전쟁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구체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초기 게르만인들의 그리스도 이해는 악마와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들을 괴롭히고, 파멸시키고자하는 대상을 대신 싸워 준다거나 물리치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들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그리스도가 승리한다는 것을 통해 기독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과 구체적으로 연관된 구원 사건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게르만인들은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기독교와 연합시켰다. 이것의 구체적 예는 콜롬바누스가 서유럽의 농촌지역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때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옛 축제들은 새로운 명칭 아래 계속 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소(聖所) 역시 계속 존숭되었다(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114쪽). 여기에는 기독교 성인에게 봉헌 된 거룩한 숲이 있었고, 물의 요정이 살고 있다고 숭배되던 샘은 마리아의 샘이나 성녀의 샘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계속 존속하였다. 신년이나 하지 등의 절기에 게르만인들이 갖고 있던 풍습 역시 그대로 살아 남았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의 일부는 아직도 서양 기독교에 남아있다.
이렇게 해서 게르만인들에 의해 변화된 기독교의 모습을 몇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고해성사의 일반화를 들 수 있다. 원래 고해성사는 동방교회에서 대 바실(Basilius)에 의해 헬ㄹ 수도원에 도입었다가, 6-7세기 아일랜드 수도원에 전해졌던 것인데, 이것이 게르만인들 사이에는 그리스도인의 외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를 처음으로 접한 게르만인들에게 어떤 외적인 표현, 즉 자신의 죄를 직접 고백하게 하는 이 방식은 교회나 개인에게 매우 유용한 방식이었다. 왜냐하면 이 방식을 통해서 게르만인들은 원래 자신들의 성소에서 행하던 의식, 즉 축복을 바라고 어떤 의식을 행하던 것을 교회에서 계속하므로 교회를 통한 축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교회는 그들에게 기독교인으로 종교적, 윤리적 통제를 하는 수단으로 매우 유용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참회에 이해이다. 원래 게르만의 전통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 역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법적 관계처럼 관계를 손상시킬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이것을 다시 원 상태로 복구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행위를 요구했다. 그래서 게르만인들 사이에는 신앙적으로 어떤 범죄를 했을 때 이것을 물질적 부채관계로 이해하고, 물질적 수단을 이용해서 이 부채 관계를 청산하는 관습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서방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마침내 면죄부 판매라는 오류가 나타나고, 종교개혁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교회가 세속적 삶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게르만인들이 기독교화 하는 과정은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사회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했던 것과 관계가 있다. 게르만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교육이나 문화, 즉 건축이나 예술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었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동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초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이 교회와 수도원에서 시작되었고, 수도원이 고대문화의 전승자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이들 역사에서는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일반 교육은 곧 기독교 교육이 되었다. 교회를 통해서 하는 교육, 수도원이 마련하고 잇는 교육 프로그램이 기도교적이요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속 교육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중세 문화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중세의 전체는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이다. 모든 것을 신 중심, 교회 중심으로 이해하는 문화적 배경이 게르만의 기독교 개종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게르만인들에 의해 변했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위상이나 역할의 변화라고 이해해야할 것이지만, 게르만적 문화 배경에서 나타난 특징이다. 언어를 통한 문화의 전승역할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를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 언어는 어떤 문화를 수용하고 저장하고 전달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게르만인들은 자신들 고유의 언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개종하면서 언어도 라틴어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라틴어는 사실 일상어가 아니라 교회의 언어, 종교적 언어였다.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되는 라틴어는 게르만인들에게 예배와 마찬가지로 생소함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이유로 라틴어는 고귀한 언어로 대접받게 되고, 중세에 계속해서 살아남음으로 로마의 전통과 문화가 게르만과 하나가 되고, 서유럽이 하나의 라틴문화권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것은 교회가 중세 문화의 중심점으로 발전할 배경이 된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 네 번째로 언급할 것은 교회와 봉건주의의 결합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원래는 농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헬라문화권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도시적 배경을 가지고 성장했다. 로마의 기독교 역시 도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게르만인들의 문화적 배경은 농촌이었다. 더구나 7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입으로 서방과 동방의 관계가 거의 단절되면서 경제적 수단은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체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도시교회에서 교구를 만들고, 각 교구마다 성직자를 파송하는 로마교회의 틀과는 달리 농촌지역의 대토지 소유자인 봉건 영주가 자신의 땅에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성직자를 고용해서 자신들을 위해 예배하게 하는 독특한 형태의 교회가 발전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다를 때는 보통 "독자교회체제"(Eigenkirchenwesen)(Moeller의 윗 책 140쪽)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이들 영주들에게 교회는 판매하거나 전당 잡힐 수 있는 재산이 되었고, 교회를 통해서 들어오는 수입은 영주의 것이 되는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로써 중세 서방교회의 특징 중 하나인 세속적 권력자가 성직자의 목회 활동에 책임을 진다거나 성직자를 임명하고, 교회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당연한 기독교 문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결국 세속세계와 종교 영역을 하나로 통합해서 단일한 공동체로 생각하는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배경이 된다. 이런 이해는 사실 동방교회, 즉 비잔틴 제국에서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동방교회는 황제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서 중세 서방은 교황이 그 정점에 있었다는 것이 큰 차이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바탕이 또한 서방교회가 스콜라 신학이라는 그들만의 신학을 만들어 내는 배경이 되었다.
그 외에도 교황이 베드로의 직위를 계승했다는 사상이나 구원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차이 등 다른 요소들 역시 지적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부적인 것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게르만의 기독교 개종을 통해서 초대교회와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 문화가 만들어 졌다는 것일 것이다. 바울에 의해서 로마까지 전해진 기독교는 헬레니즘, 또는 로마 문화와 결합하면서 자기만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었다면 이제 중세의 유럽 역시 새로운,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새로운 기독교 문화,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게르만의 기독교 개종의 교회사적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