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에서 주장하는 영혼 그리고 사람의 구성요소
손오공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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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9 07:19
4. 사람의 구성 요소
사람이 진화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라는 사실이 확립되었다면, 이제 사람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살펴 보자.
역사상, 사람이 몸과 영과 혼의 세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소위 '삼분설'(三分說, trichotomy)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이 이성적 영, 동물적 혼, 그리고 몸의 세 실체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초대 교회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 다메섹의 요한 등의 교부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였다. 삼분설은 초대 교회의 어떤 이단자들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그노시스주의는 사람의 영이 신적 본질의 일부분이므로 범죄할 수 없다는 비성경적 주장을 하였고, 아폴리내리스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혼만을 가지셨고 신적 로고스가 그의 영을 대신하였다고 잘못 생각하였다.
사람이 몸과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는 소위 '이분설'(二分說, di- chotomy)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었다. 그것은 초대 교회의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중세 교회의 안셈, 종교 개혁 시대의 루터와 칼빈의 견해이었고 그 후 개신 교회들의 절대 다수의 견해가 되었다. 그러면 이분설의 근거는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정리해보자.
4-1. 이분설의 근거
이분설의 근거는 한마디로 영(spirit, 히브리어 루아크, 헬라어 프뉴마)과 혼(soul,?히브리어 네페쉬, 헬라어 프쉬케)이라는 두 말이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따라서 그것들이 한 실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 구체적인 예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경은 인간[혹은 인성] 전체를 묘사할 때 어떤 때는 몸과 영, 어떤 때는 몸과 혼이라고 말함으로써 영과 혼을 구별하지 않는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5:3, 5,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둘째로, 성경은 죽음의 묘사에서, 어떤 때는 영이 떠난다, 어떤 때는 혼이 떠난다고 말함으로써 영과 혼의 구별이 없음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23:46,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사도행전 7:59, (스데반) "주 예수여, 내 영혼[영]을 받으시옵소서." 창세기 35:18, (라헬)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셋째로, 성경은 죽은 자의 회생(回生)의 묘사에서도, 어떤 때는 영이 돌아온다, 어떤 때는 혼이 돌아온다고 말함으로써 영과 혼을 구별치 않는다. 누가복음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열왕기상 17:21, 22,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넷째로, 성경은 죽은 자의 묘사에서도, 어떤 때는 영들, 어떤 때는 혼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영과 혼의 구별이 없음을 증거한다. 히브리서 12:23,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요한계시록 6:9, "죽임을 당한 영혼들[혼들, 프쉬카이]." 요한계시록 20:4,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다섯째로, 흔히 삼분설에 의하면, 영은 보다 고상한 기능을 하는 것이고, 혼은 보다 저급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동물에게도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하나님께도 혼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영과 혼을 구별하지 않는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영, 루아크]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영, 루아크]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11:5, "여호와는 (악인을) . . . 마음[혼]에 미워하시는도다." 이사야 1:14, "내 마음[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이사야 42:1, "내 마음[혼]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예레미야 6:8,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혼]이 너를 싫어하고." 예레미야 9:9, "내 마음[혼]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아모스 6:8,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그 혼으로] 맹세하였노라."
또한, 성경은 사람의 종교적 활동들을 영에게만 돌리지 않고 혼에게도 돌림으로써 영과 혼의 기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누가복음 1:46, 47, "내 영혼[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이와 같이, 성경에서 영과 혼은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된다. 그것들은 별개의 두 실체들이 아니고, 한 실체를 가리키는 두 용어에 불과함이 분명하다.
성경에 삼분설을 보이는 듯한 구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보다 명확한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5:23,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은 인성 전체("온")의 성화를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하여 말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 .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깊은 곳을 꿰뚤어 감찰하심을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4-2. 영혼의 활동
그러면 영혼의 활동은 무엇인가? 이분설에서 볼 때, 몸은 비생명적, 물질적 실체이며, 영혼과의 결합으로만 생명체로서의 기능들을 할 수 있다. 몸의 죽음은 몸에서 영혼이 떠나가 버리는 것이며, 죽은 몸에서 몸의 특질을 본다. 그러나 영혼의 특질은 생명과 인격성이다. 사실, '영'이라는 말(루아크, 프뉴마)은 또한 '호흡, 생명의 기운'을 의미하며, 또한 '혼'이라는 말(네페쉬, 프쉬케)도 성경에서 빈번히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인간의 생명 원리인 영혼은 또한 인간의 인격적 요소를 형성한다.
마음(레브, 카르디아, heart)이란 일반적으로 영혼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의 활동들은 지식, 감정, 의지의 요소들로 요약되며, 그것에 양심이 덧붙여질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의지의 활동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의지가 인식이나 감정과 독립하여 움직인다고 본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의지는 그 자체 외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의지의 자결정성), 따라서 의지의 활동은 매 경우에 우발적이다. 이것을 '비결정론'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은 의지가 인식이나 감정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움직인다고 본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의지는 그 자체 외의 여러 다른 요소들, 예를 들어, 이유, 동기, 권면, 먼저 있은 일들 등에 의해 결정되며, 이와 같이 의지의 활동은 자신의 지식, 감정, 욕망, 경향, 성격 등과 관계된 영혼의 총체적 행위이다(영혼의 자결정성). 이것을 '결정론'이라고 한다. 물론, 영혼은 어떤 외계의 세력에 억압됨이 없이 자발적으로 동작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며, 따라서 그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가진다.
양심이란 도덕적 분별력과 선한 경향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에 심겨진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의 법정이다. 로마서 2:14, 15, "양심 . . .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그러나 양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선하고 깨끗한 마음이지만 더러워질 수 있고 심지어 완전히 마비될 수도 있다. 사도행전 23:1,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디모데전서 3:9, "깨끗한 양심." 고린도전서 8:7, "양심이 더러워지느니라".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영혼의 활동 혹은 마음은 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지식은 뇌와 감각 기관들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감정도 대개 몸의 감각 기관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몸과 분리된 영혼의 순수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육의 결합 상태에서의 영혼의 활동을 의미한다. 특히, 사람이 구원 받은 후에 성화의 불완전은 단순히 중생한 영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몸과 결합된 영혼 즉 영육의 통일된 인격체의 문제이다.
5. 개인 영혼의 기원
첫사람 아담의 몸과 영혼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면 그 후의 사람들의 영혼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가? 각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관하여는 역사상 세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나머지 둘에 관하여는 성경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지 확정하기 쉬워 보이지 보인다.
5-1. 선재설(先在說, Pre-existentianism)
첫째로, 개인의 영혼은 세상에 출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것을 선재설(先在說)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견해는 보통 각 개인의 영혼이 전세(前世)에서 범죄하였다고 본다. 역사상 플라톤, 필로, 오리겐, 칸트 등이 이런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선재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말라기 2:15에 배치된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有餘)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특히, 선재설은 인류의 단일성과 원죄의 교리에 배치된다.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더욱이, 사람은 전세(前世)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범죄에 대한 기억도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선재설은 명백히 잘못이다.
5-2. 유전설(遺傳說, Traducianism)
둘째로, 개인의 영혼은 부모로부터 출생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것을 유전설(遺傳說)이라고 한다. 역사상 터툴리안, 어거스틴, 루터, 델리취, 로버트 댑니, 윌리암 쉐드, A. H. 스트롱 등이 이런 견해를 가졌다.
유전설이 제시하는 주요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경은 자손들이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영혼이 조상에게서 전달됨을 암시한다고 한다. 창세기 46:26, "이는 다 야곱의 몸[야레크, 넓적다리, 허리]에서 나온 자며." 히브리서 7:9, 10,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오스퓌스, 생식기관의 자리]에 있었음이니라."
둘째로, 성경은 자손들이 죄 중에 출생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 영혼의 기원과 그것의 죄악성이 부모에게서 나옴을 보인다고 한다.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 외에도, 셋째로, 자녀 출산이 사람에게 맡겨졌다는 점을 든다. 창세기 1:27, 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넷째로, 성경은 하와의 영혼 창조에 대하여 침묵한다는 점도 든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고린도전서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다섯째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창조의 6일 이후 중지되었다는 점도 든다. 창세기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 . . 마치니." 여섯째로, 가정의 정신적 특성들이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점도 든다.
그러나 이러한 그럴 듯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유전설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점들도 있다. 첫째로, 유전설에서는 개인 영혼의 전달 방식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가능하여 보이지 않는다. 자녀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가? 부모가 자녀 영혼의 창조자인가? 아니면,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물질처럼 분할(分割)되는가? 혹은,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 안에 선재(先在)하였는가? 그 어느 대답도 적절하여 보이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들의 영혼들의 창조자라고 불리울 수 없을 것이다. 또 인간의 영혼들이 물질처럼 분할될 수 있다는 생각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또 자녀들의 영혼들이 부모의 영혼 안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둘째로, 유전설은 인류가 첫사람 아담 안에 실제로 존재했다고 가정하는데(즉 인류의 공통적 실체를 가정하는 것), 그러한 가정은 불합리해 보인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하였다면, 사람이 부모나 자식의 마음을 아는 공통적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성경은 각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독립적 인격임을 말하며, 따라서 비록 성경이 원죄에 대해 말할지라도, 선조들의 누적된 죄책(罪責)의 전가(轉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셋째로, 유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자녀의 영혼이 부모에게서 유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서 마리아의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겠는가?
5-3. 창조설(Creationism)
셋째로,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에 의해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것을 창조설(創造說)이라고 한다. 이것은 역사상 고대의 동방 교회의 견해이었고, 서방 교회도 제롬과 힐래리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이 견해를 수납하였다. 중세 교회는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취하였다. 피터 롬바드는 말하기를, "교회는 영혼들이 몸에 들어올 때 창조된다고 가르친다"고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성적 영혼이 출생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다"고 말했다. 종교 개혁 이후, 칼빈, 베자, 투레틴, 핫지, 박형룡 등 개혁 교회의 신학자들 대다수는 이 견해를 채택하였다.
창조설을 지원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민수기 16:22,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 전도서 12:7, "흙[몸]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사야 42:5,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영]을 주시는 하나님." 스가랴 12:1, "사람 안에 심령[영]을 지으신 자."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예레미야 38:16, (시드기야 왕의 말)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아사)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이 외에도, 성경은 아담 이후의 각 개인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말씀한다. 욥기 31: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 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욥기 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시편 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잠언 22: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사람의 몸뿐인가? 더욱이 사람의 몸의 기원만 하나님의 창조에 돌리고 그의 영혼의 기원을 부모로부터의 출생 방식에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설에도 어려운 점들이 없지 않다. 첫째로, 창조설은 죄의 책임에 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영혼을 창조하실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끗한 영혼을 창조하여 즉시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갖는 죄인이 되게 하심으로써 죄악의 간접적 책임자가 되시지는 않겠는가?
둘째로, 창조설은 원죄(原罪)의 진리와 조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창조된 영혼은 어떻게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게 되는가? 특히, 원죄의 부패성은 부모에게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그것이 단지 자녀들의 몸에만 전달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자녀들의 영에도 전달된다면, 언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셋째로, 가정의 정신적 유전 문제도, 비록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긴 하지만, 창조설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의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 선재설(先在說)은 성경적 근거가 없고 성경 진리들에 배치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유전설(遺傳說)과 창조설(創造說)은 둘 다 상당한 성경적,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카이퍼나 바빙크 같은 신학자들은 어느 한 쪽의 근거도 결정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우리는 둘 중에서 창조설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의 출생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과 인간 부모의 역활은 신비하게 상호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혼을 창조하시되 부모를 통하여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6. 하나님의 형상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1:26, 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6-1.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선,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말은 의미상 차이가 없다고 본다. 성경에서 '형상'(히브리어 첼렘, 헬라어 에이콘)과 '모양'(히브리어 데무트, 헬라어 호모이오시스)은 의미상 차이 없이 사용된다(창 1:27; 5:1; 9:6; 고전 11:7; 골 3:10; 약 3:9).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6-2. 지식과 도덕성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특성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아는 것을 말하며, 그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여 행동하는 지혜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땅의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지식과 지혜가 있음을 증거한다. 과연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의 지식과 지혜를 잘 나타내 보였다(창 2: 19, 20).
도덕성은 이성적 판단과 의지적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사람이 본래 가졌던 거룩과 의(義)이다. 이것을 흔히 '본래의 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전도서 7:29은 증거하기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을 부여하셨고"라고 진술하였다.
어떤 이들은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도덕적 중립 상태에 있었다고 추측하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지켰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 동안 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이었다. 첫사람은 얼마 동안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이상 두 가지의 요소는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다. 사람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여전히 지혜롭고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인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 참 지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도덕성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사람은 본래의 그 거룩과 의를 다 잃어버렸다. 사람은 지금 심히 죄악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 두 요소의 회복에 촛점이 있다. 골로새서 3:10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말씀했고, 에베소서 4:24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증거했다.
6-3. 그 밖의 요소들
그러면 범죄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성경에는, 타락 이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9:6에는,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씀했다. 또 고린도전서 11:7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씀했고, 야고보서 3:9에는, "이것[혀]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는 말씀도 있다.
타락 이후에도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지식과 도덕성뿐 아니라 또한 그 외의 요소들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킬 그 외의 요소들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사람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그 밖의 독특한 점들을 거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독특한 점들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성, 인격성, 양심 등을 포함할 것이며, 또 사람의 몸도 영혼의 활동 기관 혹은 표현 기관이라는 점에서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특별히 창세기 9:6에 살인을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것으로 정죄한 것을 보면, 사람의 몸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다는 사실과 사람이 생물들을 다스리는 권한 혹은 의무를 가진다는 사실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사람에게 주신 생물 통치권도 포함됨을 보이는 것 같다. 우주 통치권은 하나님의 고유적 권한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그 권한의 일부를 부여하신 것이라고 볼 때, 생물 통치권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
6-4.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
역사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구별하며,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성, 의지의 자유 등 자연적 재능들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모양은 사람의 욕망들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스 정통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뿐이며 도덕성은 제외된다고 본다. 루터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본래의 의와 거룩뿐이라고 본다. 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우스주의, 및 합리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 의지의 자유, 및 종교적, 도덕적 성질을 가리킨다고 본다.
6-5. 사람의 본래의 상태
사람의 본래의 상태 즉 타락 전 사람은 성숙한 인격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 시절이 없는 성인이었고,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이었다. 그들은 지정의를 조화 있게 조절하는 인격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과 평강을 누렸을 것이다.
또한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몸은 완전하고 아름답고 건강하였음에 틀림 없다. 그들의 몸에는 허약과 피곤과 질병과 고통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범죄한 이후 형벌로 내려진 것들이었다. 또 비록 죽음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몸은 죽지 않을 수 있는 몸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몸으로 에덴 동산에서 얼마 동안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건강한 몸으로 생물들을 다스리는 그의 직무를 잘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 전 본래의 상태는 최종적으로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의 의와 거룩은, 이미 그들이 미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상태는 예비적 시험 단계이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그 시험하신 첫명령(창 2:16, 17)에 순종하였다면, 그들은 더 큰 존귀와 영광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다시는 범죄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렸을 것이다.
7. 행위언약
사람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한 명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독특한 명령이었다. 이것은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순종,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 영을 가진 존재임을 증거한다.
7-1. 첫 명령의 언약성
하나님의 이 첫 명령을 흔히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은 진술하기를, "사람과 맺으신 [하나님의] 첫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는데, 그 언약에서 아담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그와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했다.
이 첫 명령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첫 명령은 언약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 명령에는 언약의 두 당사자, 언약의 조건, 언약의 내용, 벌칙 등의 요소들이 있다. 둘째로, 호세아 6:7은 "저희가 아담처럼(케아담) 언약을 어기고"라고 증거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 첫 명령을 가리키고 그것이 하나의 언약이었음을 증거한다고 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의 실패에 근거한 것이다. 넷째로, 로마서 5:15-21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는 행위언약의 개념을 증거한다. 한 사람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였으므로 그의 범죄는 온 인류의 범죄와 죽음이 되었으나, 한 사람 그리스도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을 대표하였으므로 그의 의와 순종의 행위가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의와 생명이 되었다. 한 사람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의 위치에 있었던 사실이 행! 위언약을 증거한다.
7-2. 행위언약의 요소들
행위언약의 요소들을 좀더 살펴 본다면, 첫째로, 언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아담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 언약,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 조치이었다. 행위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삼중적이었다. 첫째, 피조물인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위치에 있었다. 이것은 본질적 관계이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본질적 관계 위에 약속의 한 명령을 주심으로써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써만 가능한 관계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1은 적절히 진술하기를,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로서 그에게 마땅히 순종할 의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를 기뻐하신 하나님 편에서의 어떤 자원적인 낮추심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에게서 나온 어떤 성과도 그들의 행복과 상급으로 결코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 셋째,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아담 개인! 과의 언약이 아니고, 인류 전체와의 언약이었다. 아담은 이 언약에서 온 인류를 대표한 언약의 대표자로 서 있었다.
둘째로, 언약의 조건은 순종이었다. 그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순종이어야 했다. 이 원리는 구약의 도덕법에서 다시 강조되었고 신약성경에서도 다시 확증되었다.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또 갈라디아서 3:10와 야고보서 2:10 참조. 이 순종의 명령은 시험의 일정한 기간에 제한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 시험이 일정한 기간에 제한되지 않았다면, 아담은 비록 그 기간 동안에 범죄치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장차 누릴 것과 같은 영생 즉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영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시 잃어버릴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을 주시기를 의도하였음을 보이며, 그 의도는 일정한 시험 기간을 요구한다.
셋째로, 언약의 내용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것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벌칙의 경고 속에 암시되어 있다. 즉,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정하신 시험 기간 동안 하나님의 금하신 그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살았을 것이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아담이 본래 소유한 생명과 다른 점은, 그 약속된 생명이 다시 범죄하거나 죽을 수 없는 생명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생명은 아담이 이미 소유한 생명보다 더 영광스러운 생명이었다.
넷째로, 언약의 벌칙은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대로, 영적 죽음(하나님과 분리됨), 육신적 죽음(영혼과 몸의 분리), 영원적 죽음(지옥 형벌, 둘째 사망)을 다 포함한다.
다섯째로, 언약의 표는 생명나무이었다. 동산 중앙에 있었던 생명나무는 약속된 생명을 상징하였다. 생명나무의 열매 자체가 어떤 효능을 가졌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사람이 타락 전에 그 열매를 먹었는지도 단정키 어렵다. 창세기 3:22에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나 혹은 풍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7-3. 행위언약의 영속성 문제
그러면 이 행위언약은 오늘날도 유효한가? 행위언약의 영속성의 문제는 이중적으로 관찰된다. 우선, 행위언약은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폐지되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믿는 자는 이제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로마서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러나 다른 한편,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으로서는 영원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순종의 기본 의무를 보이고,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의 정당성을 증거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