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신약에 등장하는 주연은 누구일까?
당연히 예수가 첫째요 바울이 두번째겠다.그다음이 베드로와 세례 요한 정도가 되겠는데 이상한 것은 이 주요한 인물들이 복음서와 바울 서신 그리고 공동 서신에서 그 배역의 중요도가 자꾸 바뀐다는 사실이다.
특히 세례요한은 4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 까지는 예수의 라이블 정도로 까지 인식될 정도로 자주 등장하지만 로마서로 시작되는 서신서 부터는 갑자기 퇴장 아니 완전히 증발해 버린다.
세례는 기독교인의 입문 과정으로서 아직까지 그 의식의 중요도가 인정되고 있으며 더우기 예수 자신도 세례 요한에게 그 입문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세례 요한에 대해 서신 기자들은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있다.
복음서 주인공의 하나로서 맹활약했던 인물이 조연으로도 아니 엑스트라로도 등장하지 못하고 완전히 출연금지까지 된 그 사연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초기 기독교 당시의 이념 투쟁의 결과를 생각해 보면 그 열쇠가 있다고 생각한다.주지한바 신약은 야고보(마태)공동체,바울공동체,요한공동체간의 대립과 화해의 부산물인 점을 상고해보면 예수 이전의 강력한 공동체였던 세례요한 공동체는 결국 최종적인 이념 전쟁에 패배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결국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바울 공동체와는 화해를 못하고
마태 그리고 세례요한공동체와는 연합을 하지 않았나하는게 필자의 견해가 되겠다.
바울이 외면한 세례요한
그는 누구일까?
바울은 왜 그를 철저히 무시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울이 세례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나하는 게 첫번째 열쇠가 되겠고 두번째는 요한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그리고 예수는 요한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나에 대한 답변을 찾으면 해결이 되리라고 본다.
우선 바울의 세례관을 살펴 보기로 하자.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당시 초창기 기독교의 분열상을 그대로 보여준다.즉 바울파,베드로파,아볼로파,그리스도파 등으로 헤게모니 다툼이 극심했음을 묘사하고 있는데 주요한 논쟁으로서 세례 문제가 언급되고 잇음을 알 수 있다.세례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명쾌하다.
즉 자기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는 했으나 극히 일부에 한하였으며 그 행위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게 바울의 관점이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읍니다..(고전 1:17) >>
즉 바울은 세례 행위와 믿음 즉 신앙과는 별개의 의미로 단절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바울교 입장에서의 세례 행위는 율법 즉 가식 행위의 하나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고 유추된다.
*그리고 바울파의 세례에 대한 인식은 영적 행위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읍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골 2:12) >>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읍니다..(롬 6:3,4) >>
*부언하자면 바울에게는 물로하는 세례 혹은 침례의식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겠다.
*아직도 침례 만이 완전한 의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바울은 무어라고 답을 할까?
*세례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바울이 세례요한을 전혀 언급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은가?
그러나 마태공동체의 다른 작품인 베드로전서를 보면 세례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디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벧전 3:21) >>
*노아의 홍수를 예를 들면서 그 의식의 중요점을 강조하고 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하나?....짜집기 종교 기독교의 한계가 아닌가한다.
*침례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4복음서의 여러 귀절과 베드로전서의 귀절을 인용할 것이요
*그 행위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교파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지 않겠는가?
[사족:어떤 기독인들은 안티들과 논쟁할 시 바이블은 일부만 봐서는 안되며 전체의 흐름을 봐야한다고 강변하는데 이말은 전적으로 옳다.바이블의 전체 흐름을 볼 줄 알면 기독교가 짜집기 종교임을 확실히 이해되리라 확신한다.]
다음으로 세례요한이 예수에게 어떤 의미의 사람이었는지 알아 보기로 하자.
4복음서에 서술된 세례요한 각 복음서 마다 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등장한다.이글에서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비교해 보기로 하겠다.
1)요한은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마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마태 11:3) >>
*세례요한 역시 예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였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그러나 예수는 애매하게 답변을 회피하는 비겁함을 보여 준다. 그저 자신의 이적 행위를 선전하며 의심하지 말라고 강요만 한다.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 11:6) >>
*세례요한은 과연 행복했을까?
*아마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 최종 확신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만약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다면 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지 않았겠는가?
[요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1:29) >>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요한 1:34) >>
*베드로 고백이전에 세례요한이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먼저 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2)예수는 세례요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마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마태 11:11) >>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 들인다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 (마태 11:14) >>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사야서 예언에 집착하여 세례요한을 메시아 이전의 선지자로 임명함에 전혀 주저하지 않앗음을 보여 준다.
[요한]
*예수가 세례요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는 기록된 게 없으며 요한이 바리새인과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요한 1:20) >>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다시 묻자 요한은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물었을 때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요한 1:21) >>
*자신은 메시아도 아니고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라고 답변하는데 그가 말한 광야에서 소리치는 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 의미는 이사야 예언의 보조 역활을 하는 자라고 보면 되겠다.
정리를 해보자 .
결국 쟁점은 예수가 메시아인가? 그리고 세례요한은 선지자인가?하는 두가지가 되겠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기자의 보는 관점은 확실히 다르다.
*마태기자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세례요한이 의문을 품었음을 말하고 있으나 예수는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확실히 인정했다.
*요한기자가 보는 세례요한은 예수를 메시아정도가 아니라 야훼의 아들이라고 오히려 격상시켰다.그러나 요한 자신은 선지자 자격이 없으며 그저 보조 선지자 정도로 자신을 낮게 말한다.
기독교 입장으로선 마태에서의 세례요한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함직하다.
그러나 복음서 전반에 걸쳐 세례요한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우호적이다.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의 역학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그 해답이 나온다고 보여진다.
*마태공동체 입장에선 그들과 비슷한 신학을 가진 바리새인이 가장 버거운 상대였음이 틀림없다.그리하여 세례요한 공동체와 협력관계를 가졌지 않았나 추측된다.
*요한복음 기자가 서술한 세례요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너무나 많다.그의 고백대로라면 그는 당연히 예수를 추종해야했음에도 그는 계속하여 자기 갈 길을 간다.더우기 예수는 경쟁의식까지 가졌음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시고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 갔다 (요한 4:1) >>
이제 마지막 결론을 내려 보자.
*초창기 기독교는 세례요한공동체,마태공동체,요한공동체,바울공동체가 있었다.
*마태공동체는 바리새인과의 투쟁을 위해 세례요한공동체와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요한공동체 역시 그러했다.
*바울공동체는 이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결국 수세기 후 바울공동체가 최종 승리하여 기독교의 주류가 되고 마태공동체와 요한공동체는 그 보조 역활을 하게 되었으며 세례요한공동체는 그 흔적만 남게 되었다....이러한게 기독교 헤게모니 다툼의 최종 정리가 아닌가한다.
기도교가 아직까지 이단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초기 부터 이러한 여러가지 이질적인 사상들을 짜집기한 그 역사 때문이라고 본다.
사족:세례요한 공동체가 만약 헤게모니 다툼에서 최종 승리했다면 그리고 바울 진영과 연합했다면 예수그리스도 대신에 요한그리스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