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예수의 입술은 그럴듯하게 포장이 된 말들로 넘친다.
한편 그의 말과 행동이 전혀 다름은 바이블을 정독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이상대로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란 것을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위선적인 말따로 행동따로 정도는 이해해 줄 수도 있겠다.
물론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 바,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느니...성인이라느니...하는 오해들은 배재해야만 한다는 뜻이다.그러나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까지 이해를 해주고 용서해야만 할까?
예수의 일구이언 중 소위 악한 종의 비유라는 삽화를 예로 들어 보자.
마태문서 18장에 나오는 이 삽화의 주제는 죄와 용서 정도로 이해된다.
즉 신은 인간이 짊어진 거의 무한대의 죄를 용서해주니,너희 인간들도 이웃과 동료의 죄를 용서하여 주어라...이 정도의 교훈인데, 이러한 가르침에야 필자 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가 시비를 걸겠는가?
그러나 이 삽화는 구성상으로도 문제가 많으며,내용 자체도 아주 심각한 반사회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 자 그러면 그 문제의 현장으로 안내하겠다.
1)악질 경제범도 예수의 비위만 잘 맞추면 모든 빚이 탕감된다는 논리.
이 이야기의 주제는 죄와 용서임에 틀림없다.
그러하다면 어떠한게 죄인가라는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예수는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채무라는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여 진다. 부언하자면 신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차용한 인간 그리고 채권자로서의 신을 등장시켰다는 뜻이다.
상당히 유치한 발상이지만, 일단 이해해 주기로 하자....고대인의 상상력 부재를 어떻게 자꾸 딴지만을 걸겠는가?
문제는,그 빚을 해결하고 탕감하는 절차에 심각한 반사회적 행태를 조장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우선 지적한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마태 18:23~25) >>
그대는 일만 달란트가 어느정도의 금액인지 아시는가?
일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이고,일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일당(약 오만원 정도로 계산하겠다.)이라고 하니 한번 계산을 해보시라.....약 3조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전제봉건시대의 왕이라고 하나 3조원 정도를 통치권자 임의로 탕감해 준다면 그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엄청난 돈을 탕감시켜주는 이유도 불명확하다.
처음에는 마누라와 자식까지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라고 독촉을 하더니...이것도 도덕적인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그렇고 자기 몸팔고 마누라 자식을 노예로 팔아봐야 얼마나 될까?
다음 장면을 보자.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18:26,27) >>
어쨋던 그렇게 강압적으로 빚독촉을 하자,그 종은 분명 갚을 의사를 표명한다. 그러나 왕은 단지 가엾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빚을 탕감해 주었다 한다. 한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할 왕이 이렇게 자기 멋대로 빚을 탕감해 주어서야 그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운영이 될까?
하늘나라를 이 지구촌에 세우겠다는 일부 기독인들의 소망이 혹 이루어 진다면,
그 하늘나라는 무조건 부도 공화국이 되리라 확신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2)너무나 쪼잔한 자산가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18:28~30) >>
3조원의 자산가 혹은 자산가였던 사람이 겨우 오백만원 정도의 채권 때문에 채무자에게 폭행을 가하고 게다가 소송을 걸었다?....사실 이 정도의 소액은 설령 사기죄로 판명이 되더라도 인신 구속까지는 갈 수 없음이 오늘 현재의 법령인데, 하늘 나라는 채권자만의 천국인가 보다.
뭐 그럴수 있다고 치자....
일수놀이하는 악질 사채꾼도 더러는 있으니까.....
3)고발만이 능사일까?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18:31) >>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종들은 모두 동료로 설정되었다.
그렇다면 동료의 악행을 보고 쪼르르...주인에게 달려가 고발을 했어야만 했을까?
3조원 자산가는 분명 악랄한 행태를 부렸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다른 종들의 행태도 도저히 이해못하겠음은 필자의 아둔함인가?
그들이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쬐끔이라도 있었다면,
그 자산가를 설득하던가,아니면 그들이 오백만원 정도 갹출하여 동료를 감옥에서 빼주던가했어야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4)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어긴 그리고 일구이언하는 왕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18:32~35) >>
왕은 이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다른 이의 고발을 듣고 그 조치를 무효화하였다 한다.
예수 당시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법령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쨋던 그 왕은 적어도 일구이언하는 쫌팽이가 된 셈이 되어 버렸다.
사실 왕은 처음 부터 그 재벌의 채무를 탕감해 주지말았어야 했다.
더우기 그 채무자는 분명히 갚을 의사를 표명했었지 않았던가....
3조원이라는 엄청난 부채를 단순히 가엾다고 탕감해주고, 그리고 그 채무자가 다른 채무자에게도 빚을 탕감해주길 바라는 통치권자라....그 나라의 경제는 어떻게 될지...에혀,그저 한숨만 나온다.
이 삽화에는 네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왕, 3조원 자산가, 5백만원을 빚진 자, 그리고 동료....
그런데 그들 모두 비 정상적인 사람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3조원이라는 거대한 채무를 임의로 처리하는 왕
*단돈 5백만원 때문에 폭행을 가하고 당하는 게다가 인신 구속까지 불사하는 채권,채무자
*그것을 고자질하는 동료들....
이런 비정상적인 등장 인물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배울 수 있을까?
5)채무와 용서의 불균형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18:36) >>
예수는 조금 앞절에서 베드로에게 거의 무한정의 용서를 베풀라고 가르쳤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1,22) >>
베드로보곤 무한정 용서를 베풀라고 해놓곤 자기는 단 한번의 용서로 끝났으니 이것도 일구이언한 셈이다. 역시 예수는 성령이라는 애비 그리고 요셉이라는 의붓애비를 가진 즉 두 애비를 가진 자라서 일구이언을 쉽게 하나 보다.
그건그렇고, 이 삽화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용서의 대상을 물질 즉 채무관계로 묘사했다는 점이라고 판단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3조원 정도의 죄를 용서해주는 신
*그리고 5백만원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는 인간....
*그 인간의 몰염치 때문에 이미 용서한 인간을 재차 벌주는 신......
예수 그리고 마태문서의 편집자들의 상상력 부재에 그저 한숨만 나온다.
한편,이 삽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심각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즉 재벌들의 무차별 차입 경영으로 인해 도산시, 재벌들은 어떻게든 자기들의 생존을 위한 발판은 마련하지만, 피해 중소기업 사장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도퇴되어 버리는 현실의 모습이 상기 삽화에서 연상됨은 필자만의 과민함일까?
실제 IMF시 그리고 그 이전,이후의 전례를 보더라도,
대기업은 부도가 나더라도 법정관리니 화의니 채무 탕감이니,,,등등의 방법으로 생존하지만
종이쪼가리가된 어음용지를 가진 하청업자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던가?
예수의 허접한 비유 설교가 대기업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혹 어떠한 변명거리를 제공해 주지 않았을까하는 의문도 제기하는 바이다.
바이블 그리고 예수가 쏟아낸 화려한 말의 성찬들은 그 포장만 한겹 벗겨내면 언제나 악취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독인뿐만 아니라 보통의 시민들도 이제는 알아채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