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전도사들은 정말 고달프다. 몇푼 안되는 월급, 온갖 잡다한 업무들의 뒷처리,심방,교육 등등...
그러나 전도사들은 꿈이 있다.(물론 대부분의 여 전도사들은 제외해야 겠지만) 조금만 참으면 목사 고시를 보고 그다음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고생 끝,행복 시작이라는....
전도사들이 목사로 변신하는 그때쯤 필히 연습해야 되는 게 하나 있다 한다.
이해가 될 지 모르겠다.
예비 목사들이 가슴두근 거리며 그날이 오길 기대하며 남몰래 혹은 마누라와 함께 몇번이고 연습하는 그것의 정체는 축도라고 알려진 예배의 마무리 작업이라 한다.
"여보, 어때, 이 정도로 올리면 괜찮을까?" 두팔을 들어 보이면서 마누라에게 자랑반,농담반으로 지도를 부탁하여 부푼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전도사의 황홀한 모습,그대는 상상이 되는가?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오직 목사만의 권리, 축도라 한다.
옛날 박통 시절 이러한 예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강남 하고도 역삼동에 자리잡은 거대한 건물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장로 대통령을 배출한,목에 힘줄 깨나 주어도 그 누구의 시비도 받지 않는 김모 목사가 공군 군목으로 있을 때, 공군 사관 학교의 졸업식 행사 시 있었던 실화라 한다.
사관학교의 졸업식이니 대통령으로서 박통도 당연히 참석했으리라.
교회에서의 예배도 아닌데,어쨋던 우리의 김모 목사는 축도를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한다.
기독인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목사가 축도를 할 시에는 모든 청중들은 두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수그려야만 한다. 박통도 당연히 고개를 조아렸을 터이고.
그런데 한 장성이 고개도 숙이지 않고 두눈 마저 말똥 말똥 우리의 목사님을 쳐다 보고 있더란다.
대노한 목사님, 그 장군을 쏘아 보면서 박통을 가르켰다 한다.
마침내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푹 숙이는 그 장군 아저씨....
"지가 안 숙이고 배겨?"
일국의 대통령 게다가 조선 시대 제왕들의 권력 조차 우습게 여기던 무소불위 박통의 머리 마저 숙이게 만들었다는 김모 목사의 자랑스러운 고백, 과연 그 축도권이란 것은 무엇일까?
자 그러면 목사들이 무슨 똥배짱으로 혹은 어떠한 근거하에 축도 독점권을 주장하고 있는 지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자.
필자가 여러번 지적한 바 있지만,목사라는 제도 자체가 기독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바이블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 물론 목사들의 축도라는 무당 흉내 내기도 바이블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제도이다.
목사들의 밥줄을 위해 감독 그리고 장로를 목사라고 인정해 줘도,축도권이라는 목사들의 권리는 전혀 근거없음이 정답이 되겠다.
단지 기독교 사전에서는 축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 기도로서 보통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 있는 말씀을 외운다. 이 축도 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옛적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가장 엄숙한 순서로 인정하여 교직은 예복을 입고 이를 선언한다"
고린도후서 13장 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13:13) >>
이 문장을 왜 인용해야만 할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목사가 축도시 인용하는 글이라면 장로 혹은 감독,아니면 구약의 제사장들이 축도하는 장면을 인용해야 그래도 뭔가 쬐끔은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지 아니한가?
상기 글은 단지 서간물의 마지막 인사가 아니던가?
그렇다.
바이블에는 목사,장로,감독 게다가 제사장들 마저 축도하는 장면이 없다.
그러면 예수 혹은 야훼가 축도하는 장면은 있을까?
그역시 아니올시다가 정답이 되겠다.
그러면 이쯤에서 축도의 기원을 정리해 주겠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축도는 로마 카톨릭에서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며 신도들의 기복신앙을 이용한 발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는 무당이나 샤만들이 행하는 기복을 답습한 교회의 이교화 사건 중의 하나다. 본래 축도를 베네딕숀(Benediction)이라 하는데 이는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베네딕트 신부가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목사들이 축도를 할 때 두손은 왜 쫙 벌리고 할까?에 대한 의문도 풀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예베시의 축도를 제외하면 바이블의 주,조연들이 축복을 기원하는 장면이 제법 나오는데 몇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겠다.
1)아론의 축복권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 주라고 하여라. (민수기 6:22,23) >>
일부 목사들은 상기 아론의 축복권과 목사의 축도권을 연결시키고져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문제점이 해결되야만 하는 바, 첫째 아론은 예배시에 축복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로는 오늘 현재 목사들은 아론의 후손 즉 레위지파가 아니라는 것 마지막으로 신약시대에는 예수만이 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 (히6: 19-20) 그외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로 되어 있다는 (딤전2:5)의 글 등에 대해 목사들의 변명이 준비되아야만 하다는 뜻이다.
2)멜기세덱
<<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소서. (창 14:19) >>
멜기세덱의 정체에 대해서는 필자의 전작 [히브리서 기자가 출세시킨 멜기세덱]과 [멜기세댁 오해 유감(십일조의 유래)]를 참조바라며, 이 문장에서의 하느님은 엘 혹은 바알 정도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장면을 목사들의 축도권과 연결시키는 우매한 목사가 있다면, 정말 그 무식함에 치를 떨 지 아니 할 수 없겠다.
주지하는 바,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단 한번 등장하는 유령 인물이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축원하는 장면 역시 단 한번이고.....
아직도 멜기세덱의 축도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평생 단한번 축도를 해야한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짐을 알고나 있는 지....에혀...
3)이삭의 경우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야곱이 입은 옷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복을 빌어 주었다. "아! 내 아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야훼께 복받은 들 향기로구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리신 이슬로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하고 술이 넘쳐 나거라. 뭇 백성은 너를 섬기고 뭇 족속들은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는 네 겨레의 영도자가 되어 네 동기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창 27:27~29) >>
이삭이 자기 맏 아들도 몰라 보고 둘째 아들 야곱에게 축원을 하는 장면이다.
이 설화의 문제점에 대해선 일단 생략하기로 하자. 이 장면 역시 축복권은 단 하나라는 사실이 되겠다. 나중 둘째 아들의 음모와 비리를 깨달았어도 재시도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목사들은 일요일 마다 축복권을 남발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끊임없이 복이 흘러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기를 즐겨 한다.
돈만 넣으면 커피와 음료수 등이 끊임없이 쏟아 지는 자판기를 생각나게 한다.
4)예수의 경우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 이렇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누가 24:50) >>
예수가 축복을 하는 유일한 장면이 되겠다.
마가서와 사도행전에도 예수의 승천 장면이 묘사되어 있지만 복을 빌어 주는 장면은 오직 이 뿐이다. 그리고 이글을 보면 왜 목사들이 두 손을 들고 축도를 하는 지 그 연유를 어느 정도 눈치채렸으리라 믿는다.
그러하다, 목사가 축도할 시 두 손을 거룩하게 펴고 온 신도들의 머리를 쓰다담는 흉내를 내는 것은 그들이 예수의 흉내 내기를 함과 동일 하다고 판단하면 되겠다.
5)두손을 들고 기도하는 풍경
기독인들은 대개 두손을 맞잡고 무릎은 꿇고 기도 하기를 즐겨 한다. 이번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박주영 선수의 기도하는 모습 그대로 이다.
그러면 목사들은 왜 두손을 들고 기도를 할까?
예수 흉내 내기 만이 그 해답이 될까?
사실 두손을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은 고대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한다.
그러면 상기 누가서 외 바이블에 묘사된 손들고 기도하는 장면들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아론은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고 복을 빌어 주었다. 이렇게 그는 속죄제와 번제와 친교제를 모두 드리고 내려 왔다. (레위기 9:22) >>
아론은 백성을 향해 손을 들었다는데 두손인지 한손 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느 예배소에서나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다투거나 하는 일이 없이 깨끗한 손을 쳐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딤전 2:8) >>
이 장면에서도 두손 여부는 확실하지 않고 깨끗한 손을 쳐들어 기도하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며 두 팔 치켜 올리고 당신 이름 찬양하리이다. (시편 63:4) >>
바로 이 장면이 고대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의 표본이 되겠다.
일단 이정도로 하자.
다시 정리를 해 보면,
*목사 제도는 바이블에 근거 없는 제도다. 물론 전도사도 마찬 가지이다.
*감독이나 장로를 목사로 이해해 줘도 그들에게는 축도권이라는 게 없었다.
*일부 축복 기도하던 바이블의 몇몇 사람들도 일생에 한번 정도에 그쳤다. 목사는 복을 뽑아내는 자판기가 결코 아니다.
*교인들에겐 두손을 맞잡고 무릎꿇고 기도하게 하면서 목사들만이 두손을 들고 하는 행태는 목사들의 월권 행위이다.
개신교는 부패한 카톨릭을 개혁하기 위해 출발하였다고들 주장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중세 당시의 카톨릭과 오늘의 특히 한국의 개신교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인지하리라 믿는다.
당시 종교 개혁자들의 구호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솔라 스크립투라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는 오늘 현재도 기독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호이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인들만큼 그들이 신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블을 무시하는 집단도 없다고 판단 된다.
한번쯤 기억해 보시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교조 예수의 생일 조차 엉뚱한 날을 정해 사용하고 있다. 부활절 역시 마찬 가지
*추수 감사절 그리고 맥추절은 또 무엇인가?
*그대들은 왜 일요일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십일조는 어떠한 근거로 강요하고 있는가?
*800억 들여 짓고 있다는 할렐루야 교회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호화 건물을 건축하고 있는가?
*목사들에게 주는 사례비는 바이블 어떤 귀절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목사 제도 자체가 바이블에 없는 직분임을 알고는 있는가?
*게다가 유령 직분일 뿐인 그 목사들이 축도권이라는 신을 사칭하는 행위를 그대들은 왜 용납하고 있는가?
이래서야 어떻게 그대들이 개혁 운운 할 수 있겠는가?
개신교 그대들은 솔라 스크립투라라는 구호를 외칠 자격 자체가 없다.
그대들은 바이블을 전혀 무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기독인들은 목사로 부터 그 축도권이라는 무당 흉내내기를 박탈하지 않으면
기복 신앙 신앙이라는 틀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명심하길 재차 지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