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과연 대속물로서 가치가 있는가
손오공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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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9 09:22
<피를 좋아하는 여호와>
구약에서 묘사된 여호와의 모습을 살펴보면
여호와는 질투하는 신이다
그는 진노를 일삼으며 재앙 내리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를 즐긴다.....
직간접적으로 무수한 인명을 살해한 여호와는
그에게 드리는 번제물 역시 피를 요구하고 있는데
천만다행으로 사람의 피는 아브라함의 시험 정도로 끝나고
대속물로서 어린 양 쯤으로 만족한다.
이삭의 피를 거절했음에 아쉬움이 남았던가
반만년 조용히 있다가(사실은 이스라엘에 대한 광적인 집착만 보이다가...)
예수라는 人者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갑자기 없던 원죄를 만들어 내곤
그 대속물로서 예수의 피를 요구한다.
다음 과정으로 사람들에게 너희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나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게 만들었으니 이 사실을 믿어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만들겠다.
이런 줄거리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그 대속의 정체가 아닌가!
그런데 구약에서 서술된 야훼의 피를 탐하는 식성을 조금만 살펴보면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예수는 과연 야! 훼의 식성에 맞는 대속물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예수는 대속물로서 과연 가치가 있는가>
우선 야훼의 식성을 다시 정리해 보자.
무엇 보다 야훼는 영계를 좋아한다. 첫 XX 즉 처음 난 것을 즐기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바이블은 확실히 증명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어떠한가?
첫째:예수는 과연 야훼의 독생자인가
창세기 6장 4절을 보시라.
<<그 때 그리고 그 뒤에도 세상에는 느빌림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로서 옛날부터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느빌림이라는 거인족은 무엇이며
하느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적어도 예수는 야훼의 첫아들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귀절이 아닌가.
그리고 한가지 더
야훼의 식성을 감안한다면 예수가 죽을 당시의 나이는 너무나 많았다.
무려 서른세살이 아니었던가.
다시 기억하시라
야훼는 영계를 탐닉했음을....
두번째:예수의 피는 과연 깨끗한가
대속물인 예수의 피를 맑게 하는 작업으로 동정녀 탄생이라는 억지 설화를 창조해냈는데 사실이라고 인정해줘도 무리가 따른다.
마리아는 누구인가.
적어도 원죄를 짊어진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 아니었던가.
즉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인정해줘도 그의 피 반은 죄악의 피가 아닌가.
(우리의 혈액형이 어떻게 유전되고 따위는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겠고..)
게다가 그X의 성령은 누구나 받을 수 있고 성령 받은 사람은 예부터
따지면 부지기수가 아닌가....
세번째:야훼는 자발적인 번제물을 원한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아들 이삭을 공양하기로 함으로써
숫양으로 대치하는 은혜를 입는데
예수의 마지막 말을 상기해 보시라.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이렇게 원망하며 죽었는데 야훼의 입맛을 어찌 충족 시켰겠는가....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첨언하면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해도
예수는 대속물 즉 번제물인 따름인데
그 제물인 양에게 왜 감사를 드리고 은혜 운운 하며
그렇게들 눈물 콧물들을 흘리는 지...
대속물은 대속물
번제물은 번재물
어린양은 어린양 일 뿐이지 않은가!
더우기 야훼의 입맛에 맛지 않는 재물일 따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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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복음 [Matthew] 20장 28절
[개역]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 마가복음 [Mark] 10장 45절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 출애굽기 [Exodus] 13장 13절
[개역] 나귀의 첫XX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찌니라
5. 출애굽기 [Exodus] 34장 20절
[개역] 나귀의 첫 XX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찌니라
6. 민수기 [Numbers] 18장 15절
[개역]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 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부정한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대속할 것이며
7. 민수기 [Numbers] 3장 49절
[개역]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
8. 잠언 [Proverbs] 21장 18절
[개역]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9. 욥기 [Job] 36장 18절
[개역]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10. 욥기 [Job] 33장 24절
[개역]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11. 출애굽기 [Exodus] 13장 15절
[개역]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대속 [ 代贖 , atonement redemption ]
요약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 킴玭?죽음으로써 만민의 죄를 대신 속죄(贖罪)하였음을 의미하는 신학 용어.
본문
예수가 십자가의 보혈(寶血)로 만민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가리키는 이 말은 예수가 인류의 구원주이고 구세주임을 신앙으로 선포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종종 같은 구원사건에 대해서도 신학적으로 어떤 측면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용어들이 달리 사용되듯이,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속량(贖良)이란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속죄· 화해·구원 등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신학적으로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개념들과 밀접하게 결부된 용어이다. 구약성서에서 대속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사상은 속죄의 희생제사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에 관한 사상이다.
구약에서 속죄의 희생제사는 하느님과의 화목과 속죄를 목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사상은 이사야 예언자의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의 대속사상에서 그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종은 무죄하지만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한다. 죄는 생명으로, 즉 속죄 제물로 바쳐진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의 생명으? ?속죄된다. 이 무죄한 중재자가 죄인들을 위해 고통을 겪음으로써 다른 이들의 죄를 속죄할 뿐만 아니라 그의 고통은 속죄 그 이상의 효과를 이룸으로써 그의 업적은 메시아적이고 구원적인 것이다.
신약에서의 대속사상은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구약의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의 사명과 결부시킨 점에서 잘 나타난다.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예수의 죽음이 대속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무죄한 자신이 성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악마에게 속전을 바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제물로 자신을 바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생명이 몸값으로 하느님께 바쳐졌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현대의 가톨릭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해 먼저 성서에 나타난 희생제사의 사상을 재조명한다. 희생제사는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헌신함을 의식(儀式)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즉 희생제사는 속되고 인간적인 어떤 것을 하느님의 소유로 전향시키는 행위이다. 이 희생제? 玲?대한 성서적인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의 두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순간은 제물이 희생의 행위에 의해 속(俗)의 영역에서 신적 영역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고, 둘째 순간은 제물이 하느님에 의해 가납됨으로써 축성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성서적인 사상에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도출된 대속 신학도 재해석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인간의 인성을 성스럽게 전환시켰고, 또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켜 그의 인성이 변화되어 충만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성령의 완전한 소유에 참여케 하였다. 한편,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각 개인의 구원과의 관계는 가톨릭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여전히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모든 죄인들의 이름으로 봉헌된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은 객관적으로 보아 총체적인 보상과 구원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 각 개인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데 있어서는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은 죄에 대한 통회와 보상을 기꺼이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에 자진해서 참여해야 한다. 즉 예수? ?희생을 자신의 희생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성체성사의 설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빵(예수의 몸)과 포도주(예수가 흘린 피)를 먹고 마시도록 초대한다는 것은 각자가 예수의 희생에 참여하도록 초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의 죽음이 가져다준 구원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진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부분을 약화시키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죄의 단죄와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그리스도의 대신 역할만을 강조하던 초기 개혁자들의 노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성체성사의 희생제사적 성격에 관한 신학적 해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톨릭 신학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희생제사에 참여함을 강조하는 반면,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십자가 희생만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각 개인의 구원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