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 모계를 따르는 이유
손오공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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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9 07:19
종교 구역(宗敎區域)을 통과하면서 유대인들의 여러 가지 모습을 차창 밖으로 보며 촬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종교 구역(宗敎區域)에서 만난 여인네들은 한결 같이 머리 모양이 같았으며, 종종 가발(假髮)을 한 여인네들도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머리에 키파를 쓰고 있고 성인들은 검정 쟈켓에 검정 모자를 한 종교인(宗敎人)들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모자 속에도 키파를 쓰고 있으며 모자를 벗었을 때에도 머리가 보이는 죄를 범치 않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들은 잠을 잘때에도 키파를 벗지 않으며 목욕할 때만(한 여름에는 1주일에 한번 정도) 잠깐 벗는다고 한다.
이들의 평균 자녀수는 적으면 3-4명 보통은 7-8명이라고 했다. 여인들은 한여름에도 긴소매에 긴치마를 하였고 발에는 검정 스타킹을 하였으며 정숙한 여인들은 머리를 삭발(削髮) 하여 가발이나 머리 수건을 쓰고 다닌다고 했다. 물론 일거양득(一擧兩得)일 것이다. 신앙상 경건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구역(宗敎區域)을 통과하면서 “유대인이 모계를 따르는 이유”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에서는 부계(父系)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은 모계(母系)를 따르고 있다. 본래부터 모계를 따르던 것은 아니나 모계를 따르게 된 데에는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경계 밖으로 흩어진 것을 말한다. 디아스포라는 포로와는 달리 바벨론 포로 이후에 자발적으로 다른 나라를 향해 가나안 땅을 떠난 사람들을 가리킨다)와 깊은 연관이 있다. 바벨론 포로 이후! 백성들이 귀환할 때에 모두 돌아오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또한 여인들은 포로 생활 가운데서 노예가 되어 능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 생활이 끝나고 귀환을 하면서 사생아를 가진 여인네들이 자녀의 아비를 모르는 가운데서 자녀들에게 바벨론의 성을 따라 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었다.
본격적인 디아스포라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과 주후 132년에 일어났던 제2차 유대 반란 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예루살렘의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여인들은 능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자녀들의 문제가 대두 될 수밖에 없었다.
갈릴리를 중심하여 도처에 디아스포라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혈통(血統)의 문제와 함께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모계의 시기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중세 이후(中世以後)부터 이러한 모계 제도(母系制度)가 정착되었음을 보게 된다.
모계를 따르는데 대한 유대인들의 말은 “어머니가 유대인인 경우에는 무조건 50%가 된다고 한다. 유대인이 아닌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50%는 유대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닌 경우에는 유대인과 결혼시 유대인이 될 수가 있는데 유대인이 아닌 남자와 결혼하면 유대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의 확률을 50%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계를 따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현재도 어머니가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고 있으며, 이민하여 정착 시에도 어머니가 유대인인지 비유대인 이느냐에 따라서 이스라엘 시민권의 발급이 결정된다고 한다.
현재 디아스포라는 80개국에 자리하고 있으며 1950년 귀향법 제정에 따라 귀향하여 구성된 사람들로 현재의 나라를 이루고 있다. 현재도 귀향시에는 어머니의 혈통(血統)을 따지고 있고, 그 혈통에 따라 유대인일 경우에 한하여 귀향과 시민권이 발급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위치에서 종교 생활을 얼마나 실시하여 왔는가,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했던 소속 지역의 랍비들이 어떠한 증인을 하느냐에 따라 귀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