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츠님의 칼럼입니다. 나는 "공의(公義)"가 "힘있는 자의 독재적 이기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을 교회에서 처음 배웠다. |
예수를 믿기 위해 필요한 것
2003/10/29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해 자주 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구세주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
'예수는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무척 많지만, 위 2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독교인들도 아마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니라"라는 말도 있지만, 그의 사랑은 별 감흥을 주지 못하므로 생략한다.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처음의 논변은 예수의 특화적 성격을 나타내고,
아래 논변은 예수가 당위적 보편성이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칼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우선 예수가 구원해야할(아직 구원한 것이 없으므로 미래형 표현이 맞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아니 구원할 대상이 없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구원해야 할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어낸 논변은 '토라의 주인'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결국 우리는 기독교인들 덕에 "죄인"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제시한 지표도 구체적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에 대한 진리와 생명인가?
무엇을 위한 진리와 생명인가?
위와 같은 물음에 예수는 빌라도 앞에서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과 같은 억지만 되풀이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결국 우리는 진리와 생명에 이르기 위해 과대망상증 환자를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환자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가 있는 정신과 의사처럼
인내력과 포용심을 가져야만 진리(病因)를 알 수 있다.
칼츠가 예수의 논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를 믿고 의지하면 너의 생명과 영혼을 보장해 주겠다."
하지만 칼츠는 브로커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듣는다.
"나를 믿고 투자하면 최대의 수익을 보장해 주겠다."
결국 예수를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주장에
귀가 솔깃해 지는 능력(??)과, 피해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다.
계약서나 채권 한장도 없이 투자해서 성공한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 성공이라는 것도 사기꾼이 더 큰 돈을 울궈내기 위해 신용을 쌓으려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주는 작은 성공이다.
언젠가 그는 속옷까지 털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