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츠님의 칼럼입니다. 나는 "공의(公義)"가 "힘있는 자의 독재적 이기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을 교회에서 처음 배웠다. |
인간에게는 종교가 필연적이라고?
2003/11/06
호교론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종교는 그것이 악하다 할지라도 결국 인간은 종교를 가지게 되어 있다.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은 분명히 종교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람직한 종교'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종교멸절론 혹은 종교무용론에 대한 반박으로 내세우는 위 논변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신/무신 논쟁의 대상은 아니다.
호교론자들은 '인간 본성에 종교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인데,
어떤 인간이라도 또한 비록 약간일지라도 종교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누군가가 어떤 종교를 가지겠다는 것을 적극 말려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그 종교가 '바람직한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종교성이 있으므로 종교를 꼭 구성해야만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하겠다.
이는 인간의 "종교성"부터 잘못된 전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성의 근원은 생명에 위협을 주는 미지의 것이나,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이다." - Bertrand Russell
또한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한 위안을 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가진 종교성이란 공포를 상상력으로 극복하고자 하려는 비겁한 의지에 불과하다.
그래도 호교론자들에게는 여전히 종교의 필요성이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는다.
비록 종교반대자들로부터 비겁자로 비판당하더라도 종교는 그것을
비겁함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있으며, 두려움을 해소하고 위안을 받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번개나 지진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언젠가 해결될 것이지만,
죽음만큼은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분명히(아마도 영원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죽음에 대한 연구를 끝낼때까지는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짓지 말자고 하는 것은 분명히 헛소리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종교가 가지는 문제점은 다음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종교는 극기적 용기를 덜 가지고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 Burtrand Russell
극기적 용기에는 고난에 대한 도전정신, 공포에 대한 의연한 자세,
이성적인 판단, 생명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탐구심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생명에 대한 사랑은 공포를 억누르고, 판단력을 가졌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두려움을 가지면 다른 생명에 대한 공격성향이 표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종교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종교는 분명 멸절되어야 하는데,
바람직하지 못하다 함은 다름 아닌 '가상의 관념을 독단적 신념으로 포장하여
믿음을 강요'하는 짓거리를 말한다.
반기독인들이 할 일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