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츠님의 칼럼입니다. 나는 "공의(公義)"가 "힘있는 자의 독재적 이기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을 교회에서 처음 배웠다. |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2003/07/16
기독교인들은 이성과 논리보다 감정과 믿음을 중시한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들이 신봉하는 성경이란 것이 비논리와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파생되는 교리(교리에 맞추기 위해 성경이 각색되기도 했다)도 마찬가지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반기독교 세력들과의 논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이때 기독교인들의 최후의 카드는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말대로 이성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정확하게는 감정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사용할 곳은 따로 정해져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성을 적용해야 할 곳에 감정을 적용하는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에 비판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꽃이나 풀은 어떤 의미가 담겨있다.
쵸콜렛은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어떤 여성에게 홀딱 반했을 때 이성적인 설득보다는 100 송이의 장미꽃다발이 효과적이다.
필자도 이미 하나의 풍습이 되어버린 발렌타인데이에 쵸콜렛을 받으면 발렌타인데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면서도 기분이 좋다.
장미가 사랑의 꽃이라고 하지만 장미는 어디까지나 식물일 뿐이지 사랑 그 자체는 아니다.
단지 인간들이 장미에 사랑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의미조차 모든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에게는 밧줄이나 구명용 튜브가 사랑의 의미를 더 담고 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던져진 장미꽃다발은 죽음에 대한 찬양으로 바뀔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뇨병 환자인 조직폭력배 두목에게 쵸콜렛을 선물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는가?
장미꽃이나 쵸콜렛을 누구에게 바치기 전에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이것을 그 사람에게 주어도 괜찮을지에 대한 생각을 할 때는 말이다.
꽃말 자체를 살펴보자.
중언하지만 꽃말은 그 꽃에 인간이 부여한 의미이지 그 꽃을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학자는 연구를 위한 활동을 할 때는 꽃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꽃말에 신경 쓸 때는 아리따운 이성에게 프로포즈하거나, 원수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이다.
교리(敎理)는 이치를 가르친다는 말이다.
이치를 가르치고 따름에 있어서 아무런 이성적 판단도 없이 단지 감정만으로 처리할 것인가?
감정이란 항상 거짓에 현혹되기 마련이다.
군중심리와 같은 경우처럼 확산되는 정도도 심하다.
기독교인들은 믿음과 감정을 주장하기 이전에 교리 자체가 똑바로 성립되어 있는지부터 판단하기 바란다.
반기독교인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이치를 따져보기 바란다.
반기독교인들도 감정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아니 상당히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리에 대해 방어적 입장을 가진 기독교인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교리해석에 대한 딴죽을 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틀렸다면 깨끗이 승복해야 할 것이다. 그때는 기독교를 버릴 것을 권고한다.
비록 기독교가 완전하지 않거나 거짓이라 하더라도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혼자" 그렇게 하라.
멀쩡한 사람들의 이성을 훼손하는 짓은 죄악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전도행위는 죄악이다.
기독교인들의 큰 착각 중 하나는 창조과학이 성경에 대한 이성적 증명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은 비록 과학적 지식과 방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틀려먹은 사이비과학이다.
1. 과학적 사실 중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에 부합하는 것만 모은다.
2. 반대되는 증거가 나오면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3. 결함을 가진 과학적 연구결과를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폐기된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4. 창조과학은 대부분의 경우 실험을 하지 않거나 틀린 실험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상을 볼때 창조과학은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 충실한 방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