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치유이적은 현대 부흥사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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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츠님의 칼럼입니다.

나는 "공의(公義)"가 "힘있는 자의 독재적 이기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을 교회에서 처음 배웠다.

예수의 치유이적은 현대 부흥사보다 못하다.

칼츠 0 3,560 2005.09.29 02:20

예수의 치유이적은 현대 부흥사보다 못하다. 
 
2003/08/05
 
 
부흥회에서의 주요 이벤트는 치유의 은사라고 불리는 불법 사이비 의료행위이다.

치유은사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앙치료사인 부흥목사 또는 전도사와 조작된 환자의 연기이며, 다른 하나는 "진짜로" 치유가 된 경우이다.

둘의 차이는 양심의 문제, 그리고 치유할 수 있는 병의 종류 뿐이며, 사회적인 문제점은 둘 다 동일하다. 사회적 문제점이란 사이비와 미신에 사람들이 순응케 하는 것이다.

조작된 치유은사는 치유불가능한 병이 없어 보인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장님이 새로운 빛을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양심적인 치유은사(사실 신앙치료사가 양심적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구체적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 양심적 치료사로 인정하기로 한다)의 경우 심인성 질환치료에 한정되며, 극히 이례적으로 비심인성 질환이 치료되기도 한다. 그러나 비심인성 질환 치유에서도 잘린 다리가 새로이 돋아나거나, 콜레스테롤에 의한 동맥경화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거나, 담석이 제거되었다거나, 곱사등이가 정상적으로 치료되었다거나, 관절마모로 생긴 추간판탈출증이 치료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조작된 치유은사의 경우 눈으로 볼 수 없는 증상의 병은 몰라도 잘린 다리가 돋아나는 것 같은 기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제부터 조작된 치유은사는 기독교인들도 부정할 것이므로 이 논변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 심인성 질환 : 스트레스, 환경변화 등에 의해 생긴 심적인 변화가 신체적 변화로 이어져 호르몬 이상 분비나 기타 이상이 일어나는 병적 증상으로 두통, 요통, 위궤양, 히스테리, 일시적 마비, 상상 임신, 우울증, 구토 등이 있다. 물론 위에 열거한 증상들이 반드시 마음의 병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며, 비심인성 질환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치료사들과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치유사례가 지닌 허구성 내지는 착각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곳이나 다른 사이트에 이미 같은 취지의 글이 올라왔을 것이지만, 한번 더 언급하는 것이 그리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위약효과(플라세보 효과)가 뭔지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의약품이 개발되면, 제약회사나 개발자는 이 약의 효능을 검증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위약효과를 배제할 수 있는지를 검사한다. 2개 혹은 3개의 집단으로 실험군을 나눈 다음, 개발된 약과 가짜약(당의정 또는 설탕물 따위)을 투여한 다음 결과를 관찰한다. 가짜약이나 신약이나 치료효과에 차이가 없다면 신약은 실패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약의 효능이 있다 하더라도 필요성은 거의 없다. 설탕물을 먹여도 치유가 되는데 굳이 비싼 약을 먹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위약효과는 인간의 심리에 작용하여 특별한 치료성분이 없음에도 치료작용이 일어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위약효과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신앙치료의 대부분이 이 효과의 덕을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들을 보면 위약효과는 심인성 질환 외에는 작용하지 못하며, 신앙치료들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비심인성 질환이 치료되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의 루르드 지방에서 1858년에 동정녀가 출현한 후 130 여년간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치료의 기적을 받으리란 희망에 루르드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말 쯤 교황청은 수천건의 사례 중에서 단 65건만 기적적 신앙치료의 결과로 인정했다. 이 중에 비심인성 질환의 일종인 암의 치료는 4건 뿐이었으며, 결핵치료는 3건이었다.
10억명 중에서 65건만 인정되었다. 이 확률은 다른 치료는 하지않고, 집에서 요양하며 식이요법을 하는 것만으로 치료된 사례보다 확률이 훨씬 낮은 것이다.


부흥회 외에 가끔 간증이라고 불리는 신앙고백행위 중의 절반 정도가 치유기적사례를 말한다. 예수를 믿고서 치유가 되었다거나, 치유가 된 다음 알고 보니 하나님 덕분이었더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간증에 의한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원치료가 병행되었거나 심인성 질환의 자연적 치유(위에 언급했듯이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마음의 병의 경우 종교적 치유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펼칠 법도 하다. 하지만 종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위험하다. 전문 의료진에 의한 치료를 거부함으로써 더 큰 낭패를 보거나 사망에 이른 경우가 신앙으로 치료된 사례보다 수백 배 더 많다.

더구나 비심인성 질환에 대해 신앙치료에 의탁하는 것은 살인방조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신앙치료사는 바로 살인자가 되고 만다. 물론 만성척추질환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거나, 절대안정을 취해야 할 환자가 박수를 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모처럼 활력을 보이는 것 같은 사례가 가끔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위약효과의 절정일 뿐이었다. 엔돌핀이라는 물질은 모르핀처럼 고통을 잊게 해주고, 또한 아드레날린은 인간으로 하여금 괴력을 발휘케 한다. 두 물질의 분비는 모두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열광적인 부흥회가 끝나고 엔돌핀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 그 환자는 그나마 남아있던 수술적 치료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휠체어 신세를 그리워 하게 되었다. 그는 휠체어에도 앉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어 평생 침대에 누워서 인생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울증에 걸려 불과 1년도 안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일시적이나마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고, 아예 치료가 되지 않은 "대다수의" 환자들에 대한 신앙치료사와 기독교인들의 전형적인 변명은 그 환자가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심이라고 하는 죄악의 마음이 그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환자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관점에 따라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열정이 생기지 않았고, 일시적이라도 치료가 되는데 필요한 물질 - 엔돌핀이 분비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독교인들은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빨리 망각하고, 응답받은 기도는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종교적 선전의 도구로 삼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 뿐만 아니라 성수, 성유, 안수치료 등이 진정 효과가 있다면, 기독교의 신은 복음을 너무나 어설픈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하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신에게는 예방이 용이로운 것이 분명한 병이 왜 그렇게 많이 발생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난장판(불교용어다) 같은 기도가 필요한가를 생각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전능한 신은 굳이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어린 양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선하디 선한 신은 어린 양의 고통을 긍휼히 여겨 어린 양의 기도를 듣지 않아도 미리 자신의 뜻과 선함을 전할 수 있지 않은가?


현대의 신앙치료사들의 방법을 잘 들여다 보면, 복음서에서 예수가 행한 기적적인 치유보다 훨씬 그럴 듯하고 정교하다. 다른 분야의 기적들도 마찬가지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벽을 통과한다든지, 큰 탑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든 적이 없다.

당신이 방법이나 이유를 잘 모른다고 하여 무조건 초자연적 현상이라거나 기적이라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방법은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예수가 행한 기적들이 실재 있었던 사건으로 일단 간주하고, 그것이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긴 했지만, 실재로 필자는 복음서 속의 사건들이 기적이냐 사기냐를 따질 필요도 없이 실재로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어느 기독교인은 예의 흔해빠진 반응을 보였다. 내가 너무나 유물론적이며, 신앙의 힘을 너무 왜곡하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힘이 가진 허구성을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는 과학적 분석방식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과학자도 사기친 적이 있는데 신앙치료사들만 비판하느냐는 피장파장의 논리를 편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중대한 착각이다. 한가지만 살펴보자. 필트다운인은 진화론의 역사가 가진 치명적이고 부끄러운 사건이다. 하지만, 필트다운인이 조작과 사기임을 밝혀낸 것은 창조과학 같은 신앙이 아니라 바로 진화론이었다. 이렇듯 과학은 오류수정의 기제를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오류의 가능성과 사기의 가능성을 항상 인정하여 이를 단속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그럼 반대로 신앙치료사들의 협잡과 착각을 기독교 내에서 스스로 밝혀낸 사례는 그 비율이 얼마나 될까? 필자는 그런 사례를 별로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학문적 성취가 인정되는 신학대학의 교수가 기복신앙을 비판할 때 가끔 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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