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츠님의 칼럼입니다. 나는 "공의(公義)"가 "힘있는 자의 독재적 이기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을 교회에서 처음 배웠다. |
[[퍼옴]] 의심을 죄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죄악이다.
2003/08/03
이민선의 출항을 앞두고 있는 어느 선주는 배가 낡은데다가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고민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이 배는 여러군데의 바다와 지역을 항해하였고, 이제는 수리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배가 항해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일었다. 이러한 의심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했고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배를 정밀진단한 후에 다시 수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배가 항해하기 직전에 이 우울한 반성을 극복하고야 말았다. 이 배는 많은 항해를 안전하게 통과하였으며, 수없이 많은 폭풍도 견뎌냈음을 그는 기억해냈다. 또한 이 배가 항해에서 안전하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은 쓸데없는 잡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는 하늘의 섭리를 믿었다. 하늘의 섭리란 다름아니라 조국을 떠나 더 나은 인생을 찾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이 불쌍한 가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배의 제작자와 계약자의 정직성에 대해 품었던 모든 편협한 의심을 마음에서 쫓아버리려고 하였다.
그런 식으로 그는 진정 자신의 배가 아주 안전하고 항해에 적합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그리고 예정된 낯선 새로운 고향에서 이루어지는 이민생활의 성공을 바라는 따뜻한 희망을 가지고서 배의 출항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배가 대양 한가운데서 가라앉았을 때 그는 보험금을 받았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는 틀림없이 그 이민자들의 죽음에 대해 유죄이다.
그가, 자기 배가 온전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결단코 그의 확신이 가진 진실성이 그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증거를 믿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끈기있는 조사를 통해 성실하게 얻어낸 것이 아니라, 의심을 억눌러서 얻은 것이다.
......
믿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윤리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믿음에도 책임이 따르며, 믿음의 정도가 클수록 책임의 무게가 커진다. 물론 책임이 없는 믿음도 있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때로 순환논리가 마음에 들 때도 있다.
------ William Kingdon Clifford <믿음의 윤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