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2003/08/26
유물론자만이 아니라 약간이라도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이 물질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약간의 합리적 발언을 한다면, 영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관념이니 유보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할 수는 있겠다. 약간 편하게 말한다면 형이상학적 관념과 실증적 과학은 별개의 문제이니, 종교나 철학이 고민하도록 내버려두자고 하겠다.
하지만 심령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증거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정신이나 영혼 같은 비물질적인 존재(여전히 나는 "관념"이라 칭하겠다)의 증거는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인간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중언부언하자면 인간의식만 완전하게 파악한다면 정신이나 영혼은 규명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인간의식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나는 물론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증거를 대어보라는 항변 밖에 못할 것 같다. 과학의 영역 바깥에서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영혼의 존재문제를 신경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학자는 긍정도 부정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 회의주의자들에게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할 만한 몇가지 단서가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뇌사자에 대한 것이다. 영혼존재 주장자들이 뇌사자를 영혼이 이탈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뇌사판정 후 수십년 지나서 깨어난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혼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다. 그럼 증거가 무엇이냐고 나는 물을 것이다. 이때 호교론자들은 임사체험자들의 간증을 동원한다. 문제는 임사체험에 대한 진술들이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인별로 영혼의 특성이나 모양에 대한 진술이 일치하지 않으며, 사후세계의 풍경이나 느낌도 제각각이다. 천사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에게 그 천사를 그려보게 하였더니 각 개인들이 어렸을 적에 본 그림이나 영화에서 본 천사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날개길이와 신장의 비율, 날개의 위치, 비행할 때 날개의 모양 등 세부적으로 파고 들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다음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뇌사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에도 대체로 약간의 뇌손상이 수반되는데, 이때 그의 기억은 일부 소멸되고 없다. 뇌출혈이나 충격으로 기억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기억"은 과학적으로는 대뇌피질속의 100조개의 신경결합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불공평한 싸움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기억"이란 물리적/화학적 저장이 아니라 영혼에 각인(다른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되는 사건의 정보이다. 신체의 손상이 영혼에 각인된 기억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다른 단서는 알콜, 마약 등에 의한 내분비계 교란이다. 물질적인 것에 의해 비물질적인 영혼이 각성되거나 흐리멍텅해지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알콜이 심령적인 것을 사람에게 잠시 머무르게 해주는 것이라는 옹색한 설명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 나의 논변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의식, 기억, 인격 등등 개인의 비물질적 특성과 영혼을 분리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분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위에 열거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나의 논변에 찬성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옆길로 새는 것은 싫지만 이 시점에서 내세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전에 올린 글에서 사후의 보상이 주는 불합리를 이야기했다. 잘 생각해 보라.
의식, 기억, 인격이 배제된 영혼에게 어떤 보상이나 처벌을 할 수 있을까? 내 말은 굳이 백지상태인 영혼에게 상을 주거나 처벌을 할 필요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불교의 업이나 기독교의 심판은 영혼의 존재와 함께 생전의 기억과 인격이 영혼에 내재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차이가 있다면 윤회는 영혼이 모두 리셋된 상태에서 새출발을 한다는 것이고, 기독교의 심판은 영혼이 영원히 자신의 기억과 인격을 가지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거나 영원한 처벌의 늪에 빠져서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이 딜레머를 해결하지 않고서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변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제 내가 빠뜨린 마지막 가능성은 저승에서 차곡차곡 기록되고 있는 인생기록부를 근거로 백지상태인 영혼의 향방을 결정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것이다. 여기까지의 논변에 이르게 되면 나는 "발 닦고 잠이나 자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나의 한계가 여기까지이니 악다구니나 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