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님이 저술한 바이블의 진실입니다. http://xbible.glad.to |
▣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1) 삼위일체설의 역사적 실체
삼위일체설...그것에 대해 고찰해 보기 위해서, 우선 그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생전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초기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삼위일체설이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날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때엔 당시 로마에서 스스로 황제라 지칭하는 사람이 6명이나 되었다고하는,혼란의 시기 였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제 1의시민)또는 가이사(caesar)이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때문에 시이저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공화파에게 로마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암살 당하는기까지 했으며, 그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썼다.[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한자)라는 명칭을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후,군인황제시대 서기69년에는 한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권력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6명의 황제 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를 쓰러 뜨린 후 유일한 황제가 되긴 했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경쟁자가 나올 것을 막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우선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의 자유로운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그 동안 핍박했던 크리스트교를 서기312년 공인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후임황제에게 유언으로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명했고 392년에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한편 크리스트교는 박해를 받았던 서기 320년무렵까지는 예수의 신성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인성을 위주로 예수를 파악하는 초대교회가 아리우스와 그의 제자 세쿰을 중심으로 지하에서 로마제국에 투쟁했었다.
삼위일체설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확립하기위해 서기325년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니케아]종교회의(=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라는 자가 최초로 주장하였는데, 그는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아첨하여 그를 신과 인간의 사이를 중개하는 교황이라 추대하여 아첨을 떨었던 것이다.
신성을 여호와만이 가질 수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이 이론은, 교황으로서의 로마황제는 신의 대리인으로 추앙받고 무오류(로마황제의 행동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별의별 아첨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 법칙도 이때 확립되었다.
삼위일체설은 당시 정통의 아리우스파들조차도 부정했는데,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늘 말했으며,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와 하나님이 일치한다는 말이 없었다. 즉, 예수=하나님=성령이라는 공식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 당시 그들의 반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아타나시우스파는 그들의 삼위일체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극소수 예수제자들의 이론을 마치 예수 자신의 입장인 것처럼 떠벌렸다. 결국 삼위일체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투표'로 결정났다. 기독교의 진리는 결국 '투표'로 정해진 것이다. 종교란 승자의 정신적 먹이이다.
그 로마황제에 대한 아첨꾼들이 두 번 다시 아리우스의 정통파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파라고 못을 박아버렸고 이 는 아리우스파를 결국 박해와 순교에 소멸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크리스트교 공인과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나온 삼위일체설, 그것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고도의 정치전략 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정통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한의[우리식 사회주의]처럼, [삼위일체설]도 당시의 기독교인들로부터도 외면받은 정치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2) 삼위일체 교리의 기원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말도 그에 해당하는 명백한 교리도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도 구약에 나오는 쉬마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주이시니라'(신명 6:4)는 말과 모순되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 그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점차 발전된 것이다. ... 4세기 말에 이르러 ... 삼위일체 교리가 구체적으로 정립되었으며 그 후 그대로 유지되었다." - (1976년판), 마이크로패디아, 제 10권, 126면.
「신 가톨릭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세 위 속의 한 하느님'이란 교리는 제 4세기 말 이전에는 완전히 체계화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온전하게 그리스도인 생활과 신앙 고백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체계화된 바로 이 교리가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리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사도 교부들 간에는 그러한 경향이나 사조에 조금이라도 닮은 것조차 전혀 없었다." - (1967년 판), 제 14권, 299면.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유대교에서 나온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엄격히 (하느님은 한분의 인격체라고 믿는) 유일신파였다. 예루살렘에서 니케아에 이른 길은 거의 곧은 길이 아니었다. 제 4세기의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 (1956년 판)), 제 27권, 294면 좌단.
「신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플라톤의 삼위일체는, 그 자체가 좀 더 고대 사람들의 시대에 속하는 더 오래된 삼위일체 사상들을 정립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합리적인 철학적 삼위일체로서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가르치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 희랍 철학자[플라톤, 기원전 4세기]의 개념을 ... 고대의 모든 [이교] 종교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M. 라샤트르 편, (파리, 1865-1870년), 제 2권, 1467면.
예수회의 죤 L. 맥킨지는 그의 편저 「성서 사전」(dictionary of the Bible)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위격들의 본성이 하나인 삼위일체는 희랍 철학 용어인 '위'와 '본성'이란 용어로 정의된다. 사실상 그 용어들은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삼위일체의 정의는 일부 신학자들이 그러한 용어들과 '본질' 및 '품성'과 같은 다른 용어들을 하느님께 그릇되게 적용한 오랜 논쟁의 결과로 생겨났다." - (뉴욕, 1965년 판), 899면.
삼위일체론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삼위일체"라는 말이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설명이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교리에 들어있는 개념을 성서의 말씀으로부터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예수는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보다 능력이나 위격에서 낮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말씀이 한 두 개 있다면 삼위일체에 반대되는 말씀은 백 개쯤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