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이상훈님이 저술한 바이블의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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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0 3,913 2005.02.23 08:47

5. 제5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5차 종교회의. 주최자는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1세였다. 황제는 쟁쟁한 독재자의 처이며 공동 통치자인 테오도라가 시키는 대로 처신하였다.

테오도라는 서커스 매니저의 딸 출신이었다. 청색,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때 옥좌자리를 되찾아 주면서 황제를 남편으로 소유해 버렸던 것이다. 이 공적이 있은 뒤부터 그녀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이교의 잔여세력들을 뿌리뽑아 없애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쾌거야말로 종교회의의 높은 양반들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애걸했던 것이었다. 제5차 종교회의의 주교들은 이 처사에 대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종교회의에서 의도했던 것을 유스티아누스는 벌써 황제로서의 교서, 법률로 공포해 놓았던 것이다. 이 모임이 역사에서 <갈채 회의>로 규정짓고 있는 데에는 일말의 비웃음이 아니었다고만은 단언할 수 없다 하겠다.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뒷날 교황의 무류성을 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가시로 보이는 배역)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 들였다.

비기리우스나 주교들이나 무두가 뒤에 가차없는 이단 소탕 법령때문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황제의 파워폴리틱스적 관심에 꼬리를 치며 뒤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도그머를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 죽음의 벌로 다스려졌고 세습권도 정지당했다. 로마 관리들은 큰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 내 끌어 모아다가는 유스티아누스의 어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했었다.

비잔틴의 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 반다르고트를 상대해서 유스티아누스의 전쟁사실을 기록했고, 또 유스티아누스의 소피아 교회의 건설사업까지도 문서로 남긴 인물이지만 동시에 유스티아누스와 그 처 테오도라를 비난하는 전단을 초안해 내기도 했었다. 유스티아누스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던 프로코피우스는 그를 교만하고 성인인 체하고 방자하고 음험스럽고 잔인하고 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 계통 사학자들은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을 대할 때 돌아 앉아 버리고 싶어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유스티아누스도 성인 품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회의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졌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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