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을 먹고사는 종교

이상훈님이 저술한 바이블의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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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을 먹고사는 종교

※※※ 0 3,703 2005.02.23 07:35

가난을 먹고사는 종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그것은 크나큰 미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왜 가난한 사람들이 있게 되었는가? 한 편에서 그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그들을 카톨릭교도로 개종시킨다. 그 봉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봉사는 카톨릭교회의 힘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그대는 계속 고아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개종시킨다. 어떻게 카톨릭을 6억까지 늘일 수 있었는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때문이다. 그 봉사가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대가 진정 가난을 없애는 데 관심이 있다면 가난의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대는 증상만을 치료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어떻게 그러한 것이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을 최소한의 생존 수준에 붙들어 둘 뿐이요, 그들을 착취하는 지배세력을 계속 허용하는 것이다. 그대는 이 악순환을 아는가?

자본가는 계속 교회에 기부한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 돕는다. 왜냐하면 노동자와 노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예조차도 그들의 주인에게서 먹을 것을 얻는다.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 만약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거나, 소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면 그대는 많은 돈을 잃을 것이다.

자본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자본가는 사라질 것이다. 누가 자본가를 위해 일할 것인가? 자본가가 누구를 착취할 것인가?

그러므로 봉사는 매우 교활한 게임이다. 부자는 계속 그의 착취물의 일부를 조금 떼어서 교회에 기부한다. 교회는 계속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원시인들을 최소한의 생존수준에서 양육한다. 그들은 살아있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없이는 사회의 착취구조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한편에서 자본가는 계속 돈을 자선금으로 내 놓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그는 계속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성직자는 그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그는 중개인이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게 살고 있다. 수백만의 선교사가 세상에 나가 있지만 그들은 봉사라는 미명하에 착취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예수에게서 봉사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라.

그런데 왜 봉사해야 하는가? 사실, 논리적으로 예수는 말했다. "가난한 자들은 축복받을지니, 그들은 천국을 물려받을 것임이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라. 부자는 천국으로 갈 수 없다. 낙타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으나, 부자는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가? 봉사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부자이다. 부자의 돈을 훔치고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라. 그러면 그들도 신의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다. 가난은 예수 자신의 말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이다. 예수에 따르면 가난한 것은 위대한 것이다. 나는 가난을 증오한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부자들을 옹호하는, 그러한 말을 한 예수를 증오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단 말인가? 또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는가?

기독교 국가에서조차도 엄청난 가난이 있다.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서조차 3백만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추운 겨울에 그들은 죽어간다. 기독교가 그들을 위해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이미 기독교인들이므로 돕건 돕지 않건 간에 신의 왕국을 물려받을 것이다.

미국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세계에 선교사들을 계속 파견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자국의 빈자들을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봉사의 기준이 명백해졌다. 봉사는 가난한 이들을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은 매우 중요한 말을 한 바 있다.

"가난이 사라진다면 종교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겠는가?"

만약 죽음이 없다면 모든 교회들과 종교들은 완전히 쓸모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들은 빈곤과 죽음, 질병과 고아들 때문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산아제한에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산아제한은 모든 빈곤을 몰아낼 수 있고 고아들이 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없앨 수 있다.

그럼 불쌍한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되는가? 누가 그녀에게 노벨상을 주겠는가? 고아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테레사 수녀는 사라질 것이다. 가난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끊임없이 모든 산아제한법에 반대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것은 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종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이나 학교를 열면 천국행 티켓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자비심으로 무언가를 주고 어떤 덕을 행하는 것이 가치있는 행위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동기를 가지고 행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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