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와 조상숭배

▣ 기독교와 조상숭배

※※※ 0 5,544 2005.02.23 06:48
▣ 기독교와 조상숭배


19세기의 탁월한 인문주의자이며 사회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그의 주저 『사회학원리』(Principle of Sociology)에서 "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숭배이다(Ancerster worship is the root of every religion)라는 보편가설을 정립하였다. 결국 모든 신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조상신이다. 모든 신은 그 궁극적 분석에 있어서 한 특정한 역사적 개인의 귀신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Every god is, and must be, in ultimate analysis, the ghost of a particular human being.) 유대인들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 곧 야훼도 알고 보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다윗의 하나님이다. 결국 그 계보를 따져 올라가면 야훼도 궁극적으로 어떤 조상신의 전화형태인 것이다. 야훼는 결국 유대인들의 조상신일 뿐이다. 개별적 조상의 숭배(indivisual cult)이든, 민족전체의 조상의 숭배(national cult)이든 그것은 사실 조상숭배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것은 일신이나 다신의 이원에 의하여 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구약』의 구석구석을 뒤져보면, 개별적 조상숭배의 제식이 무수히 찾아진다. 죽은 조상, 그리고 죽은 왕이나 영웅에 대한 제사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테라핌(Teraphim,家神像), 죽은 자에게 음식을 바치는 것, 조상의 무덤에 대한 존중, 곡(哭,mourning)의 습관, 레비레이트율법(Levirate Law), 네크로만시(Necromancy,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말하게 함, 강령술에 의한 占) 등등의 무수한 사례들이 지적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조상숭배의 습관들이 카발라(the Kabbalah)나 탈무드·미드라쉬 문헌(Talmudic and Midrashic literature) 그리고 그들의 일상적 시나고그의 리터지(Litergy) 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
왜 신약성서의 첫 구절이 예수의 족보로부터 시작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예수 또한 조상신의 확고한 대열에 끼어야만 그 신위(神位)의 권위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가 가장 처음에 부닥친 사건은 바로 이 땅의 조상숭배와의 마찰이었다. 조상숭배, 즉 제사의 불인(不認)이 기독교신앙의 마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이야기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들추어내는 우행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교(=기독교)는 결국 예수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우리 제례는 예수가 아닌 자기 조상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영어로 "ancestor worship"이라 할 때 "worship"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라. 조상의 제사는 곧 조상의 예배다. 기독교는 개별화된 조상들의 예배를 예수 한 사람의 예배로 대치시키라는 명령이다. 예수도 물론 역사적으로 갈릴리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죽은 영혼이다. 그는 죽어 승천했고 신화(神化)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愼終追遠) 인 것이다. 예수의 신종은 "십자가"이며, 그에 대한 추원은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과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첫째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그 신종추원의 단위가 가족으로 고립된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그 신종추원의 단위가 교회라는 단위로 확대된다. 둘째로,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제사장(priest)그룹이 분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가족의 성원이 목사가 되고 신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식의 과정도 가정적 삶에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제사에 있어서는 가정적 삶과 종교적 삶이 유리되지 않는다. 가정이 곧 종교이다.
우리는 첫 번째의 차이에서 기독교의 보편주의적 성향에 대한, 조상숭배의 가족주의적 편협성의 위험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차이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인간을 일상적 삶에서 유리시키고, 인간을 종교적 질곡 속으로 빠뜨리게 되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지적을 할 수가 있다. 물론 제사에 있어서도 삶과 종교의 과도한 밀착이 인간을 목조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득실의 문제를 떠나 모든 종교가 알고보면 조상숭배에 불과할 뿐이라는 대명제의 근본적 의미를 물을 필요가 있다. ‥‥‥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의 저자이며,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프레이져경(Sir James George Frazer)의 종교의 정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명쾌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종교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진로를 지배하고 방향짓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과의 화해며 달램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의 원초적 출발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어떤 힘과의 화해인 것이다. 즉 한 인간이 신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종교적이라 부르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도덕적이 부르는 것이다. 종교의 모든 출발은 신9조상신)에 대한 두려움(Fear)이다. 두려움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나 환생, 그리고 고대사회의 토테미즘(Totemism), 우상숭배(Idology), 배뱅이굿에서 보여지는 샤머니즘의 강령술 등이 모두 조상숭배라고 하고 인류의 보편적 종교현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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