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호와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지 않았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세계를 짓기 전에 하나님의 신이 지면에 운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설은 제사문서(창세기 1장), 야훼문서(창세기 2장), 제2 이사야, 욥기, 시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오는 곳은 마카비 2서 7:28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구약, 그것도 외경(外經)에 속하는 마카비서에 나오는 구절을 가지고 기독교 전체 교리를 결정하는 부분이 정해 졌으니 말이다. 마카비서에 나오는 한 귀절로 교리를 삼은 근본목적은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선하심, 그리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기독교인들이 외경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정작 중요한 교리를 외경에서 취한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강조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이다.
어떠한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사고,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어야 된다는 사고가 바로 직선史觀의 시원론(始原論)이고, 이 시원론은 '이원론의 산물'이다. 기독교의 창조주神觀 또한 이원론이며, 시원론이다. 러셀(Bertrand Russell)은 신의 존재증명인 '제1원인론'을 비판하면서, '하느님(제1원인)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계도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주 신관에 쐐기를 박는 주장이 현대과학에서도 제기되었는데, 아인스타인 이래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은 <A Brief History of Time(시간의 역사)>에서 그 결론을 '태초의 시간 경계는 무경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만약 성서에 하나님이 있었다 해도 그 하나님은 할 일이 없는 실업자 하나님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면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현대 과학에서는 약 100억~150억 년 전에 '대폭발(Big Bang)'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떤 한 점, 즉 특이점(singularity)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마침 원뿔의 꼭지점과 같은 특이점에서 말이다. 호킹은 이 특이점을 지구의 북극, 남극에 비유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주는 북극의 한 점에서 시작된다. 남쪽으로 감에 따라 북극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우주는 점차 커지는데 ...... 우주는 적도에서 최대로 커졌다가 다시 작아져서 남극의 한 점으로 수축한다. 그러나, 설사 북극과 남극에서 우주의 크기가 0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 두점은 특이한 점이 아니다." 곧 이 두 점은 시공간이 이어지는 점이라는 것이다. 원뿔의 꼭지점과는 다르다.
호킹은 동료 하틀과의 연구를 통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주에는 시공간의 경계가 없다." "만일 우주가 처음 생긴 어떤 시작점이 있다면, 이 우주에 창조자가 있을 거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시작이나 끝이 없이 늘 스스로를 변화시켜 간다면, 도대체 신이 설자리는 어디일까?"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고, 다만 하나의 시공연속체로 본래부터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주는 창조된 우주가 아니라 영원히 열려 있는 우주이며 스스로 변화해 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주가 처음 열릴 때 신(神)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호킹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 창조주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의 주장은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신의 사망선고인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적, 동양적 우주관에 오히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신관에는 무엇보다 '理(principle)'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우주의 변화원리, 창조원리에 대한 인식이 없다. 스티븐호킹의 말대로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히 열려있는 우주로 존재하며, 늘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는 우주이다. 그러한 변화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일까? 변화하되 그 변화하는 원리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시공간 속에 살고 있으나 그 변화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하는 길, 법칙이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일정한 주기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이러한 춘하추동(春夏秋冬),생장염장(生長斂藏)의 우주변화원리를 표현한 것이 주역(周易), 정역(正易) 등과 같은 동양의 역(易)이다.
서양의 창조신관은 유목민족의 사막문화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농경민족처럼 순환적 시간관에 대한 인식이 생길 수가 없었다. 동양문화가 싹튼 중심지는 농경문화이다. 사막문화와는 달리 농경문화는 자연의 春夏秋冬 변화의 이치에 대한 확연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양떼 앞에 서 있는 목자(牧者)는 자신을 양떼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는다. 목자는 어디까지나 양떼 위에 군림하는 초월자이며 그 초월자는 또 그 양떼에게 법칙을 주는 입법자이다. 그러나 식물과 인간은 모두 천지자연의 거대한 생명체의 유기적 일부로서 이해될 뿐이며, 식물에게 농부가 법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식물은 식물 나름대로의 내재적 법칙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유목생활의 사유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초월성(transcendence)이 강조되고, 농경생활의 사유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내재성(immanence)이 강조된다. 유목민족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는 초월적 신만을 유일한 실재로 간주하는 사유를 낳기 때문에 , 그러한 하느님숭배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이 완전히 이원적으로 분리되고 땅은 부정된다. 그러나 농경민족의 내재성에 대한 강조는 하늘과 땅은 내재적 전체로 이해되기 때문에 양자는 이원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하늘의 비가 없는 데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고 농사를 짓는 땅이 없이 하늘의 비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경문화에서 하늘성(남성성)과 따성(여성성)이 상보적 관계를 이루며, 이러한 인식구조의 필연성은 현대물리학이 얼마나 이러한 "상보성"을 중시하고 있는가 하는 데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유목민족에게서 목자가 양떼의 질서를 창조하듯이 우주질서까지도 창조한 창조주신관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땅이 철저히 부정되는 사막의 유목문화와 하늘과 땅이 동시에 중요한 농경문화 중에 어디에서 발생한 진리가 더 보편타당성을 가질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결국 유목민족의 이원론적 사유구조를 치유하는 방법은 결국 농경민족의 사유구조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생명은 어떤 한 분이 만든 게 아니라 생명을 창조해 내는 법칙 생장염장의 理는 우주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 속에 있는 그 이치에 의해, 모든 생명이 드러난 것이다. 모든 신들도, 모든 성자들, 인간도, 모든 동물들 ,풀 한 포기, 먼지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