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는 하나님인가?
다음의 예수자신의 말을 통해서 보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 정말 잘들어 두시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 아무 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입니다.[요한 5:19]
+ 나는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하느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심판을 할 뿐입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판은 올바릅니다.[요한 5:30]
+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 24:36]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그때가 언제 될른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마가 13:30-33]
+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들이 영접치 아니하나 만약 그분(another)이 자기 본래의 이름(his own name)으로 온다면영접하리라.[요한 5:18]
+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한8:28)
+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한12:49~50]
+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한16:28]
+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6:38~39]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3:17]
+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한8:42]
+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한14:28]
+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7:21]
예수와 하나님은 분명 위격(位格)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죽음을 앞둔 때부터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를 살펴 보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1) 예수는 운명하는 순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부르짖는다. (마태복음 27장 46절)
2) 예수는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라"하면서 약속을 한다.(누가복음 29장 49절)
3)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였다. 이 장면을 성경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먼저 1)의 장면을 보면 예수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시여! 왜 이 아들을 돌보지 않으시나이까"하면서 하나님께 원망까지 하였다. 여기까지는 아직 인성이 다하지 못하여 신성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일 것이므로 그런 대로 접어 두기로 하고 사망의 고통을 이겨내고 죽음에서 승리한 후의 예수의 모습을 보기로 하자. 2)을 보면 예수는 사망의 늪을 빠져 나와 부활한 상태이므로 예수는 마땅히 신성을 회복하였어야 함에도 아직까지도 예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내 아버지"하고 하나님만 찾았으니 이 구절 역시 예수의 신성을 입증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장면인 3)를 보면 예수는 스스로를 승천하지는 못하고 무엇인가에 이끌려서 승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he was received up into heaven) 삼위일체인 예수가 스스로 승천하지 못하고 누구에겐가 도움을 받아 승천하였으니 이 또한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고 하겠다. 또한 이끌리어 승천한 예수는 삼위일체인 하나님과 합쳐지지 못하고 하나님 오른쪽에 따로이 좌정하여 앉았다고 하였으니(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God)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구약성서를 다 같이 인용하고 있는 유태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슬람교는 예수를 마호멧과 같은 예언자로 봄)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보고 있다.
예수의 설교를 음미하면 할수록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예수 생전에도 사후에도 변함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경의 내용이 이러한데도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1:1~14]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한 다음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예수라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말씀=예수의 등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A(말씀)와 B(하나님)가 함께 있었다"와 "A는 곧 B다"라는 명제가 동시에 주장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은 영지주의의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파생한 것이며 말씀이 갖는 두 기능, 즉 우주생성론적 기능과 구속론적 기능이 동시에 주장됨에 따라 파생된 모순이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무시하고 요한복음의 "하나님=말씀=예수"라는 공식을 무조건 인정한다고 가정하고 한 번 생각을 해 보자.
신약을 잘 살펴보면 1)예수의 행적 2)예수의 가르침 3)예수의 생존시 함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이야기 4)성경저자의 견해와 주관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1)번 예수의 행적과 3)번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이야기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으나 2)번 예수의 가르침과 4)번 성경저자의 견해와 주관은 문제가 될 수 있다. 2)번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하면서 예수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기록한 대목이고 4)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하면서 성경저자의 견해를 기록한 대목이다. 성경에서 2)번과 4)번의 내용이 같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2)번과 4)번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면 이때에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 혼돈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는 예수의 이야기요 또 하나는 예수 추종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하여 보라. 예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는 하나님일까? 하나님이 아닐까?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면 혹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하나님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면서 성경 전체를 예수의 이야기이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건 성경저자의 견해이건 간에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데에서부터 성경은 수많은 모순을 안게 되는 것이다. 또한 Bible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성경은 성령으로 쓰여진 것이므로 성서의 이해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기도 하는데 물론 그렇게 난해한 말씀도 있다. 그러나 그냥 읽어서 초등학생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백한 내용까지도 성령 운운한다면 Bible의 존재이유가 없지 않은가? 성령을 통해서 성서를 이해를 했는지 안했는지 그 판단은 누가 하는가? 결국 인간이 하지 않는가? 기독교의 교파가 전세계적으로 25,000여 개를 넘어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 인간들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모두 서로 무조건 나의 해석이 정통이고 남의 해석은 이단이라고 매도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는 스스로 밝혔듯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직접 전달한 대역자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사사받은 사람들이고 성서의 저자들은 구전을 통하여 들어 두었던 내용을 견해와 주관에 따라 기록한 사람들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이러한 성경을 빌미로 하여 신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크기를 표시한다면 " 예수> 제자들> 성경의 저자들> 기독교인"이 될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한다면 성경은 의문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가지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시대적인 소산물" 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나는 곧 길리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하였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던 그 당시는 전통적인 유태인의 종교적 습관이 완고하리 만큼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때였다. 예수는 결국 그들의 손에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은 후대인 이 시대에도 경종이 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 시대의 정말 안 통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깨달음의 자극을 주기 위하여 이야기했던 시대적인 소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소산물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보다도 훨씬 이전에 세상을 다녀갔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하고 조금 양심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몽땅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안 되었던지 "그들이 가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는 예수조차 모르는 사실을 그들이 더 알고 있는 셈인 것이니 예수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는 많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을 종합해 본다면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라고 이야기 해 왔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는 성자(聖子)인 하나님이다."고 믿고 있음을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예수는 무능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도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예수는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예수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특별히 선택받아 세상에 왔으므로 예수를 무능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터이므로 이러한 추론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추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신앙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든 예수의 진위가 무엇이건 상관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고쳐가면서 신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자신과 하느님아버지는 그 능력과 위격(位格)이 서로 틀리다는 것을 누누이 말하고 있다.Bible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명백히 쓰여진 곳이 백 군데라면,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해석할 만한 곳은 한 두 구절밖에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작 예수 자신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그리고 자신이 왔을 때는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았지만 다른 분, 즉 하느님 아버지가 직접 오신다면 사람들이 영접할 것이라고 예수 자신이 명백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 삼위일체론의 성립과정
그러면 예수의 본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이 왜곡되었는지 삼위일체 교리의 성립과정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2세기 중엽 무렵에 당시 퍼져 있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중류 및 상류층까지 전파되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313년)되고 기독교가 억압받는 자의 종교에서 로마제국 지배계급의 종교로 됨에 따라 초기 억압받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기독교 신앙의 핵심사상(하늘나라의 도래와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이 변질되게 된 데에서 기인한다.
즉 현실의 역사적 세계가 결코 변혁(종말)될 필요없이 인간의 구원은 오직 부활하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보장된다는 신앙으로 변질된 것이다.
또한 인간인 예수가 진리를 깨닫고 죽음을 뛰어넘어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신이었던 예수가 인간구원을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빌려 잠시 왔다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즉,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말살한 것이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300여년이 지난 4세기까지만 해도 3위일체론은 확고하게 정립된 교리가 아니었다.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예수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당시 "3위1체" 인정여부에 대해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아리우스(258~336) | 아타나시우스(297~373) | |
하나님 |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며, 하나님은 신성의 본질과 존재를 나누어 가질 수 없다(3위를 부정) |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이루어져 있다.(3위 인정) 3위는 각기 완전하며, 셋이 합하여 완전한 동등성을 이룬다. |
아들 예수 | 아들 또는 말씀은 피조물이다. 명목적으로만 하나님으로 불려질 뿐 참 하나님이 아니다 | 아들 또는 말씀은 피조물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다. 만일 로고스가 약점을 갖고 있다면 인류는 구원될 수 없다 |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 아니었으나 나중에 하나님에 의해서 신성이 부여되었다.(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존재) |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다.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잠시 인간의 모습을 빌려 내려왔다(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말살) |
로마제국이 신흥의 기독교가 모든 측면에 있어서 제국문명의 논리에 반하는 요소를 함장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탄압하였지만은 결국 그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이용하여 기독교 그 자체를 제국문명화해 버린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기억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야말로, 로마제국에서 억압돼왔던 기독교 저항문화가 갖는 강력한 조직성과 반체제적 생동성을 제국문명자체의 정신적 유대감의 기저로 역이용하여 제국문명을 재건하는 기발한 구상을 도모했던 정치적 천재였던 것이다. 그 뒤로 교회와 국가의 파트너쉽은 서구라파 역사패턴의 한 기저를 이루는 형식이 된 것이다. 후대의 비잔틴 제국이나 카롤링그 왕조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모습에서 그러한 기독교제국의 전형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그 맥락과 종교조직적 성격면에서 매우 상이한 것이기는 하지만, 유교가 시황제(始皇帝)에 의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참상에 이르기까지 탄압을 당했으면서도 새로 정립된 한제국(漢帝國)에 이르러서는 그 제국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국교(state ideology)로 등장한 것은 인류보편사적 패턴에 있어서 기독교의 운명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최소한 유교의 이론체계나 이념지향성이 제국문명의 논리에 반한다고 판단되었던 그 역기능적 측면들, 예를 들면, 종교공동체적 천명(天命)민주주의 사상이나, 고대봉건체제의 하부구조로 이상시 되었던 정전제(井田制)의 옹호라든가, 주종실(周宗室)을 주축으로 하는 정명(正名)사상의 보수성이라든가 하는 모든 역기능적 측면들을 제국문명의 순기능적 요소로 전환시키는 패턴은 동일하다. 한무제(漢武帝)야말로 중국의 콘스탄티누스대제였던 것이다.
"예수"라는 보편사적 사건이 바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기실 알고 보면 "여호와(야훼) 하나님"의 보편성이 아니라 바로 로마제국의 논리라는 역사적 보편성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 논리의 씨앗을 그 형성 초기에 뿌렸으며, 그것은 그러한 토양의 맥락 속에서 장대하게 성장하였으며 급기야는 바로 로마제국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의 제공자로서 그 인위문명의 구조 속에서 신격화되어 세계문명사의 주요부분을 제패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논리와 초기부터 결탁된 예수가 오늘날 21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그 막강한 정경적 힘(Canonical Power)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인류보편사의 빤할 빤자의 운명, 그 결정성과 한계성의 비극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