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

▣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

※※※ 0 5,893 2005.02.23 11:43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


구약성서 중 맨 처음을 점하고 있는 기록이 창세기이다. 이 창세기의 기록과정을 살펴보자. 창세기 중 1:1~2:3까지의 기록은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가 된 후에 나타난 사제학파들에 의하여 쓰여진 사제 사료층이라고 하며 2:4~3장 끝까지는 야훼 사료층으로서 창세기 1~3장은 두개의 사료층이 혼합되어 구성되어 있다.


사제 사료층(P문서)
 야훼 사료층(J문서)
합본된 귀절
창세기 1:1 ∼ 2:3
창세기 2:4 ∼ 3장
쓰여진 시기
기원전 5세기 중반
기원전 8세기 중반
신의 호칭
신[엘로힘]
야훼 신[야훼 엘로힘]
창조 이전에 있었던 것
완전한 물

형체없는 땅

물이 되는 안개

완전한 땅

창조의 과정과 순서
1. 하늘, 땅, 빛

2. 물(바다/하늘)

3. 땅,바다,식물

4. 해,달,별

5. 새, 큰물고기, 물고기

6. 동물, 사람

1. 남자

2. 에덴동산

3. 나무(생명나무,선악나무 등)

4. 강

5. 들짐승, 새

6. 여자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똑같은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두 가지의 사료층은 그 내용이 서로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두 사료층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인지 판단하기에 실로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두 가지의 사료층을 다 인정한다고 하면 태초의 천지창조는 엘로힘이 먼저 시작하여 창조를 끝마친 다음에 야훼가 다시 창조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엘로힘이 우주를 창조한데 반하여 야훼는 부분적인 창조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 엘로힘과 야훼의 서로 다른 창조신화가 나오고 신의 이름도 틀리는 것일까?

▷ 창세기 1:1∼2:3에는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니 첫째 날이었다"와 "아침과 저녁이 지나고 둘째 날이었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은 태양을 4일째에 비로소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그 전에는 어떻게 밤이 오고 아침이 올 수 있었는가? 전지전능한 신의 기적으로 가능했다고 치자.

그러나 성서는 문맥상으로도 분명히 모순이 일어난다. 첫날은 빛과 어둠을 만들었고 넷째 날에 광명을 만들어 낮과 밤을 나누었다고 한다. 즉, 넷째 날이 되기 전에는 단지 주야는 없고 빛과 어둠의 구별뿐이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첫째 날부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을 계속 쓰고 있다.

▷ 새가 먼저일까? 사람이 먼저일까?

* 1장---신은 다섯째 날 날개 있는 모든 를 만들고, 여섯째날 사람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 2:4---땅에 초목도 나기 전에 인간을 만들고 다음에 나무를 만들고, 다음에 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 동식물을 먼저 만들었나? 사람을 먼저 만들었나?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 동물을 만든 후에 사람을 만들지만, 2장에서는 남자를 만든 후에 식물, 동물을 만든 것으로 순서가 되어 있다.

▷ 남자를 먼저 만들었나? 남녀 한 쌍을 같이 만들었나?

창세기 1장에서는 맨 마지막에 남녀를 동시에 만들지만, 2장에서는 남자를 만든 후에 식물, 동물을 만들고 맨 나중에 여자를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 창세기에는 아주 내용이 다른 두 가지의 창조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창조신화는 2:4의 전반부에서 종결되며, 두 번째 창조신화는 2:4의 후반부에서부터 시작된다. 처음 것은 남녀평등 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나중 것은 남존여비 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첫 번째 창조신화에서는 인간의 창조는 천지창조의 최후에 행하여진 데 비해, 두 번째 창조신화에서는 야훼 신은 천지를 만든 후 동식물보다 먼저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창조신화에서는 인간은 처음부터 남녀로 만들어진 데 비해 두 번째 창조신화에서는 처음에는 남자만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창세기 2장에는 야훼 신이 인간을 만든 후 코에 입김을 불어 넣었으므로 그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야훼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 말하고 있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은 야훼 신에 의해서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괴로운 짧은 생을 마친 후 흙으로 되돌아간다고 되어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창조신화는 늦어도 기원전 8세기 쯤에 성립된 것이지만, 소위 사제성전(司祭聖典)이라고 하는 첫 번째 창조신화는 훨씬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5세기쯤에 성립된 것이다.

1장과 2장의 창조된 순서도 다르지만, 창세기 1장의 이야기에서는 신이 창조할 때는 매우 조심스러운 계획을 가지고 만들었고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것을 강조하여 신이 만족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의 이야기는 한번 만들어 놓은 것은 자꾸 고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아담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담이 쓸쓸해 보인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들어 준다. 그래도 심심해하자, 이번엔 동물들을 만들어 주고, 그래도 쓸쓸해 하는 것 같자, 이번에 하와[하와]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아담에게나 하와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결국 먹고 마는 아담과 하와. 또한 1장과 2장의 창조의 방법도 다르다. 이것은 야훼계 전승이 신을 인격화 시켜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생겨라" 하고 만든다[예: 빛이 있으라]. 즉, 말씀으로 만든다. 하지만 야훼계 전승은 야훼 신이 사람이나 동물들을 만들 때 진흙을 빚어서 만든다. 그리고 야훼계는 신이 에덴동산을 걷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선악의 열매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할까 걱정하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까지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의 신의 모습은 추상적인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이와 같이 성서에는 기원과 내용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문서들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모순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며 이러한 내용은 신학대학에서 다 배우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목사가 된 "고귀한" 분들은 이러한 내용을 알면서도 성서는 신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신도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으로서 믿어 의심치 말라", "성경을 읽을 때 긍정적으로 보아야지 부정적으로 보아선 안된다"고 말한다. "성경은 믿지 않는 자는 제대로 그 뜻을 알 수 없다"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사탄과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2부에서 언급할 성서의 원전 자체의 문제점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에 읽은「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정직한 사람의 눈에만 옷이 보인다"는 사기꾼의 농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사탄과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어떤 의심과 질문도 덮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번창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과 기독교

일단 다음의 도표를 보고 비교를 해 보자

  벌거숭이임금님
성서 무오설
 교황 무오설
주장
임금님은 선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옷을 입었다
성서는 신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
교황이 교황으로서 공식적으로 신앙이나 도덕 또는 교리에 관하여 선포한 내용은 절대로 틀림이 없다
세뇌교육
( 편견, 선입견 주입 )

악한 사람에게는 옷이 보이지 않는다.
성서 무오설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사탄에게 넘어간 자이다. 성경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며 절대 의심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성령이 임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며 아무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교황 무오설을 부정하는 자는 이단이다.
문제 인지자
모든 사람의 눈에 옷이 보이지 않는다
신학자, 목사, 성서를 많이 읽고 공부한 사람들은 문제를 알고 있다.
성직자들은 알고 있다.
문제 제기
세뇌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아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얘기한다.
가끔 솔직히 말했다가 퇴출당하는 성직자들을 볼 수 있다.

아무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읽다 보면 틀리는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내용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성서에는 신화나 전설도 있고 또 오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일부 후진국과 우리 나라만 성직자들에게 속고 있다.
1998년 3월 1일자 <파수대>에 의하면 현 교황은 94회에 걸쳐서 천주교의 과거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죄를 구하였다고 한다. 조찬선씨가 쓴 <기독교 죄악사>를 보면 교황들의 추태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성서 번역본에 쓰인 히브리어나 헬라어 등은 신의 언어가 아니다. 성서번역학자 나이다(Nida)의 말대로 얼마든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이 가능한 언어이다. 물론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단어가 많지만 그러한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주석에 일일이 달아주어 밝혀주면 되는 것이다. 성서가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이상 고도의 비유나 상징을 제외한 대부분은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특히 한글개역판보다 공동번역판 성서가 더욱 그렇다. 신학자 나채운씨의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한글개역판 성서에는 문법이 틀리거나 말이 잘 통하지 않거나 부적당한 말이 많아 고쳐야 할 곳이 대략 10,0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필자가 인용한 성서의 구절은 공동번역을 많이 참조했으며 이해하기 쉬운 문장들은 한글개역판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성서를 읽어 보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틀리는 곳도, 서로 모순이 되는 곳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것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발뺌하거나 아예 문제 제기를 못하도록 세뇌교육을 하는 성직자들의 부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서에 일반인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일찍부터 있었다. 중세기에는 일반인들의 성서 소유를 금지하였고 어려운 라틴어 성서를 영어, 독어 등의 쉬운 언어로 번역하는 것조차 금지했었다. 왜 그랬을까?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벌거숭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벌거숭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자신이 악한 인간이 되고 만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성서에 읽고 뭔가 이해가 안되고 의심스러워도 그냥 뭔가 심오한 뜻이 담겨 있겠지 하고 그냥 지나치고, 또 서로 모순되는 구절들이 분명히 있어도 왜 그럴까 하며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그 자신이 "사탄에게 유혹을 받거나 넘어간 사람"으로 간주되고 만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구조적 장치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장치구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맴 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구조를 벗어나 성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이 있다. 지금부터 순수한 동심의 어린 아이가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솔직하게 말했듯이 성서를 쓰여진 그대로 읽고 솔직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장치구조 속에서 벗어나기 두려운 사람들은 이 책을 덮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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