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관념이다] - 1. 신앙이란 '단순한 관념의 집합'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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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encrow님의 칼럼입니다

[신앙은 관념이다] - 1. 신앙이란 '단순한 관념의 집합' 일 뿐이다.

ravencrow 0 4,961 2005.07.11 06:36

기독교 비판에 대한 내용은 사실 학문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서 많은 내용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는 그러한 면에서 볼때 많은 부분의 치부를 드러냈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만 울궈 먹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왜 이렇게 되는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즉, 왜 기독교를 믿는 사람중에서 그 폐단이라 말하는 광신이 만들어지고, 정신병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기며, 왜 기독교인들의 의식 구조의 변화가 힘든가 하는 부분에 대한 내용은 많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칼럼란을 빌어서 먼저 일반적인 기독교 비판과는 약간 다른 각도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첫번째는 바로 사람의 의식운동에 대한 내용을 정리함으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이 그 완고함과 배타를 주장하게 되는 원인을 색출하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정신적인 내면의 작용이 어떻게 행동을 결정하는지를 봄으로써 '기독교인 환자' 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을 진단해 보고자 함입니다. 




1. 피암시는 이렇게 걸린다. 

제가 종교에 대해서 많이 주장하는 내용이 바로 피암시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위 기독교인 환자들을 양산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지대한 공헌을 하는 작용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이 피암시라는 것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고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그 적용성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피암시라는 분야에 대해 말을 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주로 최면이나 심리학에 의해 연구되고 있으며, 특히 최면관련 분야에 많이 연구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최면을 사술로 취급합니다. 이점은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면과 명상을 전혀 다른 내용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님을 먼저 밝혀 두겠습니다. 명상은 자기 최면의 일부입니다. 즉, 최면이라는 범주는 사실 더 크게 볼수 있으며 현재 최면 즉 hyponosis라는 범역으로 연구되고 있는 것은 암시와 피암시성을 지닌 모든 분야에 통용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즉, 피암시가 형성되는 모든 인식기전과 기제, 그리고 기재요소들은 모두 최면이라는 분야 안쪽에서 다뤄지고, 의식의 운동과 그 안에서의 인식과 기전과 기제의 적용성을 다루는 분야가 바로 최면입니다. 단지 최면의 경우는 자의식 작용을 둔화 시킨 상태에서 이뤄지는 심층암시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고, 다른 분야인 명상과 심리에서는 의식 작용성이라는 부분이 살아 있는 상태의 범주를 다루는 부분이 다를 뿐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말이죠..

일단 피암시에 대한 내용을 다뤄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형태의 매체나 시술자는 기본적으로 라포라는 것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라포라는 내용은 집중력이라는 말로 생각해 볼수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집중과는 다른 형태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대상매체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을 가능케 하는 내용으로 볼수 있습니다. 즉,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상자의 이목을 끌게 되는 것을 라포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에 의해 피암시자는 암시매체나 대상으로부터 암시를 받아들일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이후 대상자는 암시성을 체험합니다. 여기서 암시가 걸리느냐 마느냐는 피암시자의 의식내에 있는 기재 요소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즉, 수용적 기전을 발생시키는 요소가 강한지, 아니면 저항적 기전을 발생시키는 요소가 강한지, 그리고 기전 자체가 기제에 의해서 어떻게 컨트롤되는지가 바로 암시의 성공과 실패 여부의 옥석을 가리게 되는데, 이것은 기전과 기제를 발생시키는 요인들, 즉 기재요소라는 것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의 관건 여부에 달려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저항성의 요소가 힘을 가지면 암시는 실패하게 되고 저항적 기전은 더 강하게 작용하며 의식을 컨트롤합니다. 그리고 수용적 요소가 강하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며, 이것은 누적될수 있습니다. 

이 저항적 기전, 간단히 말해 저항기전이라고 하며 의식 내부의 부정적인 반응을 도출하는 작용성을 내포한 내용이 형성되는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상식, 고정관념, 트라우마, 컴플렉스, 다른 피암시성등이 원인이 되는 기재가 됩니다. 이중 후자의 세가지는 가장 치유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흔히 기억 치료라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 간단한 원리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안좋은 기억이나 안좋은 인식이 있으면 생각나지 않도록 만들면 되는 것인데, 부정적인 기전을 상쇄하는 것은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최면과 의식치료의 차이점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최면의 경우는 무의식 자체에 대한 피암시를 걸어 저항기전을 우회하거나 돌파한 이후에 목적을 달성합니다. 의식 치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최면에서의 암시로 인한 내부로부터의 무력화와는 달리 외부적인 자극을 의식에 전달하여 반응하게 한 이후 부정적인 요소에 대해 스스로 비판을 하도록 하거나 혹은 원인에 대한 부분의 인식을 자극하여 작용성을 바꿔 암시성을 전달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수 있겠는데, 방법적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피암시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을 대상에게 전달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2. 기독교 역시 최면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위에서 저는 분명히 기독교에서는 최면을 사술로 취급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종교 자체도 피암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좀 지독한 편입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기독교는 어쩌면 괴벨스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중 하나가 아닐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기독교의 최면과 피암시에 대한 내용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많습니다. 

일단 종교와 성직이라는 부분은 보편적으로 볼때 라포를 잘 형성할수 있습니다. 즉, 종교인이고 성직자라는 내용 때문에 대상자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욱 수월하게 라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저사람은 뭔가 있다. 혹은 알고 있다는 이미지가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노상 전도를 하면서 이목을 끄는 행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거부감을 이용하는 방법인데, 거부감을 일으키는 방법도 라포의 형성중 하나입니다. 라포란 위에서 말을 했다시피 이목집중에 대한 내용이라 할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거부감이나 공포감 역시도 라포 형성의 한 방법이 되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라포가 형성되면 당연히 다음 수순으로 넘어 갑니다. 암시 전달인데, 이때부터 피암시성은 대상자에게 적용이 됩니다. 그리고 대상자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판가름이 나는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저항기전이 제대로 작용을 하면 이것은 실패하겠지만, 제대로 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성공합니다. 대개 넘어가는 사람들의 경우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위의 내용은 한번에 주입 되기도 하지만, 한번에 주입되지 않기도 합니다. 즉, 오랜 시간에 걸쳐서 주입되어 인식을 변질시키거나 하는 내용도 포함이 됩니다. 이것은 원래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또한 상쇄합니다. 대개의 피암시는 그 암시성에 대한 긍정성을 유도하도록 진행이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이 점점 제대로 작용을 하지 못하게 되는 대상자는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능력이나 이성적 판단의 기준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에 대해 어느정도 긍정적인 인식을 하게 되면 수용성이 확장되고 이 확장된 수용성으로 인해 종교에 대한 심층적인 내용이 변하게 되며, 이로 인해서 저항기전이 재편성 됩니다. 또한 기제가 강하게 작용하기 시작하고 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진채 다른 의식구조를 가진 사람으로 재구성되는 것이죠. 

또한 이 내용들은 주기적인 재암시와 반복을 통해서 단련됩니다. 듣는소리 또 듣고 기도등을 통한 자기암시 훈련을 통해서 이 내용들이 점점 고착화 되고 이로 인해서 인식이 바뀌게 되는 것인데, 이 와중에 트랜스가 발생하면 혹자는 은사등을 체험하게 되기도 하고 일련의 과정등을 거치면서 불안한 인식일수 있었던 재구성된 인식은 점점 틀을 갖추게 되면서 점점 더 고착화 됩니다. 

이런 구조성이 완성이 되면 일반적인 의식 또한 재편되게 되는데, 새로운 고정관념과 거부감의 잣대가 생기게 되고 이에 따른 의식의 저항기전과 합리화 기전의 형성으로 인해서 더욱 강한 배타성을 가지게 될수 있으며 또한 지속적인 피암시로 인해 더더욱 강하게 형성되어 작용하는 피암시성은 이런 일련의 작용들의 중심에서 의식 구조 재편의 원동력이 되고, 그로 인해서 재편되고 재구성되며 강화된 의식은 기존의 의식적 내용들을 찍어 누르거나 융화하고 합리화 함으로 인해서 현재의 상태적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유지하는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자, 이제 여기서 저는 중요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위의 일련의 내용들을 비교해 볼때 기독교가 과연 최면을 사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분야라고 욕할 자격이 있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3. 신앙은 단지 관념일 뿐이다. 

기본적인 구조가 저러할진대, 당연히 종교라는 부분에 대한 인식은 달라져야 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이나 종교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 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가끔 한심하다 생각이 들때가 있는데, 그것은 인식적 방법론의 집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할수 있습니다. 

즉, 그 안에서의 관념적인 정의들이 구성해 놓은 하나의 인식방법론이 종교나 철학이라고 할때, 신앙이라는 것 역시도 관념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자들은 그러면 체험을 통한 진리의 체득이니 뭐니 하면서 인간의 수준으로 분석되는 내용이 아니라고 강변하는데, 저는 그들에게 있어서 상당한 연민을 느낀다 할수 있습니다. 사실 그 체험 역시도 피암시로 인한 발생성이 충분히 고려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전에도 밝히고 후에도 다시 쓸 내용이지만, 치료은사는 플라세보 효과로 생각해 볼수도 있고, 기초 대사 능력의 응용으로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은사와 비전은 트랜스 현상으로 생각해 볼수도 있으며, 그네들이 알고 있는 진리란 것은 사실 관념적인 내용의 집합이라 할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인식의 산물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수많은 시간이 만들어 놓은 족적을 토대로 형성된 관념적 집합의 한 부분을 인간이 차용하거나 혹은 그 범주 안에 들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뿐입니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적용되는 의식운동 이상의 의미를 가질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폄하하는 인간의 지식은 저들의 신앙을 분석할 능력 정도는 이미 충분히 구비되어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의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사고의 균형성이 전제된 이성적 판단에 의거하는가, 아니면 고정관념과 편향적 피암시에 절어버린 내용에 의거하는지에 대한 차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결코 그들이 증거할수 없는 신의 임재나 진리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저한테 질문을 던질수 있을 것입니다. 나 역시도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고정관념의 틀 안에서 해석을 내리고 있지 않은가? 유감이지만, 이 부분은 분명히 말해 두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안타깝게도 그 인식적 방법에 있어서 이질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방법론을 달리하는 자에게 적대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쪽에서도 기독교를 향한 인식기준이 우호적일리 없으며,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을 볼때 당연하고 타당한 반응입니다. 그것은 내가 있기 전에도 존재했고, 그 종교가 생성된 이후로 계속적으로 그 종교의 인식의 틀 안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에게 작용한 코드이기에, 그 인식적 방법을 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상대적인 부정적 인식이 발생할수 밖에 없음을 밝혀 두겠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관념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것처럼 거창한 영적인 전쟁이 아니고, 그저 관념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이유는 사실 이것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그들의 신앙이라는 관념적인 집합체 내부에 있는 적대관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할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 이것 역시 신의 영역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의 영역일 뿐이며, 인간의 지식으로 분석되지 않는 불가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그것은 신의 기준으로만 분석되지 않거니와 이미 인간이 도달한 지식의 영역으로 충분히 분석할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그 분석되지 않는 진실한 신앙과(이 말도 사실 아이러니입니다만, 만일 분석되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저들이 말하는 진짜 신앙적 증명이 될 것입니다.) 진리를 말한다면 0.1 %도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지금 미검증 사유일 뿐인 내용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수치는 더 줄면 줄었지 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 분석할수 있는 인간의 의식적인 부분일 뿐입니다. 단지 그것을 이성의 영역으로 인식하는지 비이성의 영역으로 인식하는지의 차이에 기인하며,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이것을 비이성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다는것...




4.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신들의 인간성을 개떡같이 알고 버리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관념적인 패턴에 기인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알수 없는 내용을 신의 영역으로 돌려 버리는 게으른 자들일 뿐인 것이고, 결국 그 안의 딜레마에서 괴로워하며 충돌을 조장할 뿐인 것이고 이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병폐안에서 구체화 되어 있습니다.  

즉, 기독교의 교리 자체에서 말하는 것들이 피암시로 작용하면서 참으로 많은 부작용을 생성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뭔가 특별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달라야 하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래야 하고, 이런 인식들의 문제가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폐적인 기준을 가지게 하는것의 원동력이 됩니다. 

더군다나 주변의 여러 자잘한 문제들은 더더욱 자신의 내부에 형성된 부정적 인식의 내용들을 서포트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이것들은 더더욱 사고의 기준에 있어서 일반성을 결여 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합리화 됩니다. 단지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인식을 하고 있다는 쪽이거나 혹은 기독교가 진리라는 쪽으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대개 그래도 일부가 부패할뿐 종교는 괜찮다고 하는 쪽은 우호적인 인식의 합리화를 가하고 있고, 소위 병적인 인간들의 경우는 진리라는 쪽의 합리화를 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종류의 합리화는 여증등의 기독교 유사 종교에서 더욱 심합니다. 이들의 경우는 저항기전이 사회내부의 부정적인 인식과 자신들의 문제들로 인해(병역 거부를 통한 구속등) 더욱 강해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어온 수난에 대한 합리화를 필요로 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보다 더욱더 폐쇄된 인식관을 가지게 됩니다. 

기독교 이단들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는 일반적인 기독교인들과 증상의 경증이 다를 뿐 원인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즉, 얕은 감기가 걸린것과 독감으로 앓아 눕는 것.. 증상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인플루엔자라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이들은 인간성을 팔아 버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거부하는 관념적인 형태야 말로 기독교의 정신적 폐단의 본질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고, 다른 방법론에 대한 적대성이 바로 자신들을 향한 비판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망각한다면 기독교인들의 폐단과 문제는 언제나 반복될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 자체의 교의적인 문제에 대한 옥석과 정통성을 떠난 의미에서 볼때, 즉 순전히 인간의 의식에 대한 분석만으로 볼때도 충분히 말해줄수 있는 견해입니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영적인 수모라고 생각하기 전에 자신들의 신앙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와 사고를 해 봐야 할 것인데, 절대로 그러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의 의식구조의 문제점은 폐단의 양산을 불러올수 밖에 없음에, 참으로 씁쓸한 감정을 금할수 없습니다.






마치며............

이 글을 통해 밝히는데, 저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기본적으로 연민의 심정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 비우호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로 종교나 교의,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인 행태들에 대한 비판을 가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때마다 저에게 인성을 말하며 자신들에 대한 긍정성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저는 잠시 종교적 교의에 대한 비판을 잠깐 줄여 볼까 합니다. 어짜피 시간은 많습니다. 할말도 많고.. 대신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인성이라는 문제, 인간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뤄 볼까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왜 기독교인들이 병들었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기독교인들이라는 존재가 연민할 대상인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세상이라는 것은 돈과 물질만으로 살수 없다면, 그리고 정신적인 부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가장 동정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그들 자신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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