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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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질문이 있어서...

몰러 0 1,413 2005.06.17 20:48

Re: 질문이 있어서...


중앙일보에서 퍼왔습니다.

‘入門’이란 하나의 가름을 뜻한다. 어떤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서면 그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나는 갈라진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다양한 분절선들, 사건들, 우연들, 만남들을 통해서 마디를 가지게 된다면, 입문이란 이 마디들 중 중요한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바둑입문, 야구입문으로부터 문학입문, 철학입문, 물리학입문… 등 수많은 입문들이 존재한다. 이 입문들을 통해 우리는 늘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Contents
철학입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철학교육의 딜레마
모범적인 프랑스의 철학교육


이러한 입문 중에서 ‘철학입문’은 매우 특별한 성격을 띤다. 철학입문은 다른 입문들과는 달리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에 관련된 입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입문은 삶 자체가, 나아가서는 죽음 자체까지도 처음으로 반성적 의식의 수준에 포착될 때 성립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엔가 그때까지 막연히 가져 왔던 생각들이 와르르 무너질 때, 우리는 삶을 처음부터 다시 정초해야 할 상황에 부딪친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대개 10대 후반, 20대 전반에 걸쳐 발생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철학에 입문하게 된다.

다른 한편, 철학입문은 대단히 막연하고 모호하다. 철학에는 어떤 특별한 대상, 영역, 작업이 명확히 변별되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은 단지 무엇인가를 ‘밝히는[哲]’, 명료화하는 학문일 뿐이다. 그 이상의 아무 구체적인 규정도 없다(‘哲’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이 때문에 ‘철학입문’은 유난히 혼란스럽고 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입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철학이라는 담론은 왜 이렇게 불투명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일까? 그러나 차분히 들여다보면 이 불투명성은 단지 복잡함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베르그송의 탁월한 설명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무질서로 파악하는 것들은 대개 너무 복잡한 질서일 뿐이다. 철학이라는 담론의 불투명성/복잡성은 이 담론의 규정 자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철학은 이른바 ‘메타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데 메타적인 문제는 일차적인 문제에 기생한다.

따라서 일차적인 문제들이 변하면 메타적인 문제들도 변한다.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은 좋은 예이다. 똑같은 문제가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에서는 ‘제1 실체(개체들)’와 ‘제2 실체(보편자들)’의 문제로 나타났지만, 과학이 발달한 이후에는 ‘과학적 실재론(과학적 존재들, 예컨대 전자, 인력, 질량… 등등이 실재한다는 입장)’과 ‘과학적 유명론(이들은 이론적 창조물일 뿐이라는 입장)’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시간의 문제, 우연의 문제, 복수성의 문제… 등등이 모두 그렇다.

이것은 곧 철학적 담론들이 행하는 작업이란 곧 그것이 처해 있는 역사적 지평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음을 뜻한다. 철학의 문제들, 대상들, 개념들, 입장들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커다란 변이들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성을 완전히 捨象사상한 채 철학의 문제들을 일정한 추상공간에 옮겨놓고 논하는 것은 철학과 수학, 논리학을 혼동하는 것이다.

철학은 그 역사적 변동 전체를 전제한 뒤에야 성립된다. 이것은 곧 철학에서의 ‘문제’와 그 ‘역사’는 하나라는 것을 뜻한다. 철학의 역사는 문제들의 역사요, 철학의 문제들은 끊임없는 역사적 변이에 처해 있는 것이다. 문제와 역사의 이러한 통일성을 이해했을 때, 철학이라는 담론의 복잡성과 모호함은 상당 부분 명료해진다.

이런 사실은 철학입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 빛을 던져 준다. 철학입문은 흔히 ‘철학개론’과 ‘철학사’ 두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철학개론은 흔히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며, 철학사는 철학의 역사를 압축해서 다룬다. 그러나 철학개론이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을 그 역사적 변이의 지평 위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의 문제들, 개념들의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변화들을 일정한 추상공간 안에서 왜곡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 철학개론은 철학의 문제들, 개념들을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의 눈을 투사해서 추상시킨 하나의 단면도일 뿐이다. 반대로 철학사가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의 형성과 변화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러한 철학사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독트린들’의 나열일 뿐이다. 한 철학자가 수십 권의 책을 통해서 말한 내용을 몇 쪽에 요약해 놓은 철학사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다.

그것은 사유의 심각한 왜곡인 것이다. 요컨대 철학개론은 문제와 개념들의 역사적 지평을 드러내 주어야 하고, 역으로 철학사는 철학의 역사를 문제들, 개념들의 역사로서 재구성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방금 우리가 ‘문제와 역사의 통일성’이라고 불렀던 것의 의미이다.

앙드레 베르제와 드니 위스망이 쓴 《프랑스 고교철학》(원제는 《새로운 철학강의Nouveau “cours de philo”》)는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은 여타의 철학개론들이 그렇듯이 철학의 역사성이 충분히 녹아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을 일정한 사유공간으로 추상화하여 대표적인 독트린들을 비교함으로써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역사적 지평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감독이 시공간을 파편화시켜 재조립함으로써 새로운 통일성을 만들어내듯이, 철학사의 흐름을 파편화시켜 문제별로 다시 재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저자의 창조성을 만끽할 수는 있겠지만, 역사의 ‘실재’는 그러한 재조직화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다. 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독파하기 바란다.

철학교육의 딜레마

철학입문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들 중 하나는 철학이 ‘메타적’ 담론이라는 점이다. 메타적 담론이란 일차적 담론을 전제한다. 일차적 담론의 토대와 근원을 파고들어갈 때 결국 부딪치는 문제들이 메타적 담론들이다. 가령 철학은 ‘1+1=2’라는 가장 기본적인 수학으로부터 더 수준 높은 수학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왜 ‘1+1은 2일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질량, 운동, 힘… 등을 전제하고서 물리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본개념들 자체의 의미를 파고든다. 이렇게 일차적인 문제들을 파고들 경우, 우리는 결국 존재와 무, 연속과 불연속, 우연과 필연, 시간, 공간, 무한… 과 같은 메타적 문제들, 존재론적 문제들에 귀착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이 ‘메타적’ 담론이라는 것, 어떤 담론이든 근본을 파고들어가면 철학으로 귀착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철학입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메타수학을 한다는 것은 이미 수학 자체를 상당 수준으로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메타물리학을 한다는 것은 이미 물리학 자체를 상당 수준으로 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의 비결정성의 문제’를 다루려면 우선 양자역학을 알아야 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시간론’을 다루려면 우선 조이스를 읽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철학개론을 가르칠 때 부딪치는 힘든 문제는 철학 자체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철학 ‘이전의’ 지식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차적인 지식도 없는 학생들에게 메타적인 논의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 이것이 철학개론을 가르칠 때 부딪치는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이것은 철학사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철학사를 배우려면 우선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 등을 일정 수준으로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플라톤을 읽으려면 우선 아테네 민주정치의 역사를 일정 수준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19세기 초의 해부학, 진화론(정확하게 말하면 ‘형태변이설’), 물리학 등에 대해서, 그리고 당대의 문학(예컨대 괴테와 횔덜린)과 미술과 음악 등에 대해서 상당 수준의 이해를 가져야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독파해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철학사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그저 몇 쪽으로 정리된 한 철학자의 독트린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암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철학사를 가르치려는 순간 이미 역사라는 망망대해에 떠 있게 된다는 것, 이것이 또한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메타적인 논의들과 일차적인 논의들을 적절하게 융화시키는 것이다. 일차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메타적인 문제를 던진다든지, 아니면 역사적 지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게 느닷없이 공자나 스피노자의 독트린을 제시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철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철학개론 시간이나 철학사 시간은 한없이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방식은 마치 팝송도 잘 못 듣는 학생들에게 메시앙이나 불레즈의 현대 음악을 들려주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간에 졸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천재 아니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학생일 것이다. 그런 시간이 되지 않으려면 일차적인 지식들과 메타적인 문제들을 교묘하게 엮어내는 거의 곡예와도 같은 솜씨가 필요한 것이다. 극히 일상적인 예에서 시작해 문학, 미술… 등으로 나아가고, 결국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수준을 넘어 메타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초심자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프랑스 고교철학》은 나무랄 데가 없이 뛰어난 입문서이다. 어떤 문제를 다루든 매우 구체적인 사례와 과학, 문학 등의 다양한 문화적 토대를 깔고서 친절하게 초심자를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두 39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간과 시간, 실존, 죽음, 자유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서 출발해 욕망, 지각, 기억 같은 인성론적 문제들,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에 대한 과학철학적 논의들, 그리고 정의, 윤리, 덕, 사랑 등에 대한 실천적 논의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양한 소재들과 정교하게 엮어 전개시킴으로써 철학입문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책을 통독한다면, 독자들은 철학적 ‘문제틀’의 장을 조망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자신의 문제의식 또한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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