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러님의 칼럼입니다. |
니체? 니체!... 그리고 감히 `초인`을 씨부린 있슴에게
작성일: 2001/03/22 20:43:02
작성자: 몰러
원조 니체와 가짜 니체의 아뒤 싸움?... 지겹소이다. 빨랑 합의보쇼.
"있슴"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초인의 비교후 어슬프게 진화론 까대기로 확장하는 걸
보니 웃음도 안 나오네...... 무식한 넘~
옛날에 봤던 니체 평전(작자도 출판사도 까먹었다)중 생각나는 것만 알려드리지.
솔직히 "짜라투스트라는 요로코롬 씨부렸다"는 넘 어려운 책이다. 이걸 완전히 이해했다는 사람은
천재 아니면 착각이다. 몰러는 한 페이지 넘기는데 1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앞을 까먹고...
하여간 쉬운 평전으로 대신하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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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저서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도덕의 계보",
"여명", "연애시", "반 기독자" 등등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하지만 이 저서들과 그의 행각은 많은 의문을 품게 한다. 이는 니체의 사상적 배경과
성장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고, 초인과 어쩌면 나치즘을 만들어낸 괴짜이거나, 풍자만화로서
문화생활의 주된 흐름에 끼어든 괴팍한 철학자"
정도일 것이다. 이래서 국민윤리와 철학교육은 분리해야 한다고 몰러는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니체의 사상적 배경을 훑어보자. 이거 모르고서는 니체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개차반이다.
니체는 명석한 학생이었으며, 겨우 24세에 바젤대학의 고전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만성적인 심신증환자(아마 무력하고 항상 피곤해하는 증상일 겁니다)로 항상 고통을
받았는데, 그는 강심제와 마약을 달고 살았고, 거의 누구하고나 논쟁을 벌였으며, 결국은 점점
더 고독해져서 유럽을 이리저리 방황했는데 1889년에는 미쳐버렸다.
그가 미친 이유를 개독들은 다음과 같이 단정하며 그의 저작과 사상을 까내리려 한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호모섹슈얼리티즘의 불만족과 결별
여자를 혐오했으나 성욕을 주체못한 점
기독교에 대한 혐오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감당하지 못하여서....
반민주적인 윤리와 사상으로 따돌림 당한 소외감
푸흘~ 미친 넘들...
니체는 철학자이자 시인이었고, 위대한 문장가이자 수사학자였으며, 특히 아포리즘의 대가였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저술엔 상이한 해석이 많다. 아마 성경해석만큼 다양한 해석이 있을 것이다.
철학과 전공하신 분은 알겠지만 교수마다 니체를 다르게 강의한다. 하여간에 그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고, 모순되는 요소를 함의하였으며,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신이 죽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고 죽어가고 있던 복잡한 사회속에서
표류하던 현대인의 중심적인 문제에 대해 설파하였다. 그 문제란 바로
"허무주의의 먹이가 되는 것" 이었다.
이렇듯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고통받은 사상가, 철학적 체계의 건설을 거짓이라고 반대했던
이 위대한 사상가에 대하여 사조의 변천을 살펴보자.
니체 제 1기
이 시기는 그가 "나의 그리스"(그리스의 의미는 좀 있다 나온다. 기둘리시라)라고 일컬었던
바그너 시기이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무신론과 반이성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독일 문화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의 그리스 문화처럼 퇴폐적이고 속물적이다.
오직 바그너만이 독일 문화를 구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바그너에 대한 그의 애정은 바그너의 배신(?)으로 결별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배경은
다음 일화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바그너 음악을 연주한 적이 있었다. 사실 바그너는「음악에
있어서의 유태성」이라는 책에서 멘델스존 등 유태인의 음악을 비난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바그너 사후 반세기 뒤 제3제국은 공식행사장에서 바그너 작품을 연주하도록 했다.
괴벨스(광고하시는 분과 선거운동자들은 괴벨스의 반만 해도 성공할 수 있다)의 치밀한 계획
아래 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2차 대전 중 많은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죽어갔다. 그래서 전쟁 후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 연주와 방송이
"자율적으로" 금지된 것은 당근이다. 그런데 음악의 자유를 주장하며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바그너 음악을 조용히 연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주회 당일 바그너 음악이
연주되자 한 노인이 갑자기 단상위로 올라왔다. 그 노인은 조용히 소매를 걷어 팔의 문신을
사람들에게 내보였다. 그것은 수용소의 죄수번호였다! 음악은 멈추었고 장내는 숙연해졌다.
후에 오케스트라 책임자가 사과성명을 통해 발표한 것은 "1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다시는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서양 음악사에서 '바그너'했을때 낭만주의 음악의 거장, 대형 오페라의 선두주자, 유태인 혐오
주의자, 극단적 민족주의자 대책없이 빚을 지고 사는 주제넘은 음악가로 보는 것이 '무난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바그너는 이후 히틀러의 나치즘을 지원하는 예술적
후견인이었고, 히틀러도 또한 바그너 사후에도 바그너의 가문과 친분을 유지했으며 정치적으로
옹호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자 이래도 니체와 바그너가 깨진 것이 단순한 동성연애의 실패로 보는가?
니체 제 2기
바그너가 기독교인으로, 반유태주의자로 돌아선 후 그와 결별한 니체는 대신 자신이 "위대한 저주"라고
칭한 기독교에 대해 탐구했다. 그의 탐구방향은 기독교라는 엄청나고 가장 깊은 타락을 대신할
도덕성을 찾는 것이었다.(사실 몰러가 보기엔 니체로부터 유일하게 발견한 일관성이다)
그는 합리론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과감히 버렸다
"내 생각이 가면일 뿐이었다"
그는 병의 고통때문에 마약과 강장제를 계속 복용했으며, 이는 또 몸이 더 약해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는데, 그가 강장제를 복용했을때 더욱 고상해졌다고 사가들은 전한다.(당연하지~)
그리스 비극에 관한 그의 저작에서 니체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간에 중요한 구별을 지었다.
아폴로는 질서, 형식, 억제의 상징으로, 디오니소스는 정열, 생명력이라는 광란의 상징으로...
니체는 아폴로가 디오니소스를 정복한 것으로 그리스 비극을 설명했다. 그리고 예술을 이러한
역동적인 갈등의 산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19세기 문화는 생을 부인하는 기독교적 연민으로
모든 것을 질식시켜 버리면서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부인하는 것, 인간에게 진정한 도덕적
기초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기독교적 사상을 넘어서야 한다!"
"보편적인 도덕은 없다!"
"인간은 개인이며 따라서 개인으로서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말이다. 이 말로서 그의 대한 모든 헷갈림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몰러~)
"기독교는 만물의 척도로서는 무가치한 자들의 도덕이다! 그것은 하층민의 도덕, 노예의 도덕이다"
(당시에 하층민, 노예라는 말은 바로 저질이란 뜻과 동일하게 사용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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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에 대한 해석은 구구합니다. 그는 만담왕이라는 별명대로 과학, 사회학, 실존주의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분석철학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죠. 특히 몰러 같은 공돌이에게는...
지금 쓰는 이 글도 단순한 이해일 뿐이죠.
하여간 초인에 대해서는 "있슴"이란 인간이 말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은 뻔합니다. 야후에
니체*초인으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많은 웹페이지가 있을 겁니다. 근데 거의 모두 제각각의 해석일
겁니다. 비슷한 해석은 물론 인용일 것이고...
꽉 막힌, 개뿔도 없는 기독철학 가지고 위대한 지성과 비교하지 말거라 개독들아!
글쿠 새롬~ 숙제했니? 안 했음 빨랑 보고 감상문 올려라이~
"데블스 애드버킷" 알 파치노, 키아누 리브스 주연
2001/03/22 229번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