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실존에 대한 위기 때문에 신앙을 택한 자들...

몰러 0 2,727 2006.05.15 18:45
톨스토이는 "나의 신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인생에서 단 하나의 행동마저 아무런 동기를 부여할 수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처음부터 이런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나에게 알려져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에게 질병과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악취와 벌레밖에는 남지 않는다. 나의 행동(업적)이 어쨋든간에 곧 잊혀지고, 나 자신은 아무 데도 없게 될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공연하게 바빠야 하는가?
인생이 나에게 취기를 주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리라. 그러나 술에서 깨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망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여기에 우습거나 재미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저 잔인하고 어리석을 뿐이다."
 
이런 실존에 대한 허무에 빠지면 사람들은 대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남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의 인생이 의미없다고 여기는 순간 그는 이러한 허무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경향도 꽤 높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번 쯤은 찾아오는 위기다. 물론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여기서 말하는 신앙인이란 아무 생각없이 신을 믿는 사람을 뜻한다)은 인생의 의미나 실존에 대한 고민이 적거나 아예 없기 때문에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이미 신이 의미를 부여한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벤 샌더슨(니콜라스 케이지가 분한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주인공)처럼 술먹고 죽겠다며 생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 벤은 톨스토이가 터트린 불평과 유사한 "지적 무기력"에 빠졌다.
 
"신은 왜 그런 곤경을 의식할 지능을 주고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자유의지를 부여하였으면서도 거기서 벗어날 능력은 부여하지 않는가?"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아니라 톨스토이의 발언임)
 
벤은 머리에 총을 쏘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식의 짧고 확실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는 라스베가스에 왜 왔느냐는 창녀(엘리자베스 슈가 분한 캐릭터인데 이름이 세라였던가?)의 질문에 술먹고 죽으러 왔다고 대답한다.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물음에 한 4주 정도 라고 답한다.
 
술에 골아 떨어져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술먹고 죽으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과음하고 난 뒤의 무기력함과 불쾌감도 그렇지만, 사실 자신의 인체기관들이 보내는 온갖 경보발령에 정신이 다 없어진다.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인 자살의 방법치고 술로써 죽겠다는 것은 하여간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런 식의 자살은 주변인들이 쉽게 따라하지는 못한다.
 
벤은 자신의 "지적 무기력"을 넘는 방법의 하나로 술을 선택한 것이다. 머리에 총을 쏘아서 죽는다는 것보다는 훨씬 자부심이 느껴지는 방법인 것이다. 총기자살은 사실상 패배이지만 술로써 죽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조롱하는 수단도 될 것이다.
물론 점점 기억이 희미해져 가면서 나중에는 왜 자살을 하려는지 이유는 생각나지 않고 단지 술먹고 죽겠다는 최초의 결심만 남게 된다.
 
 
 
하여간 벤 같은 이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하기나 했지만, 대부분의 종교인들을 보면 그런 측면이 별로 없다. 그럼, 실존에 대한 위기 속에서 신앙을 선택한 이들을 살펴보자. 처음에 인용한 톨스토이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신앙이란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물론 비합리적이라고까지는 느끼지 않지만 합리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신이 없이는 인생이 무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생은 결국 악취와 벌레(썩고 있는 시체의 상태 뿐만 아니라 모든 업적이 의미없어진 상태를 말한다)일 뿐인 것이다. 신이 있으면 신의 거대한 계획에서 개인은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며, 사후의 보상을 고려하는데 현생에서 중요한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라도 함으로써, 즉 유신론자가 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되찾았다. 많은 이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신앙인이 되었다.
(물론 이것을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증거로 삼는 등신들도 있다. 자신의 믿음, 자신의 결심이 증거라 하다니...)
 
그리고 나서 톨스토이는 합리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전제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신을 믿지 않으면 비참하고, 신을 믿으면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신을 믿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신학적 논거나 철학적 유용성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조용히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한, 잔인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이 갖게 된 신앙이 패배나 도피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잔인한 것이 아니다. 물론 패배자라는 낙인은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몰이성의 상태에 빠지도록 유도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패배자임을 감추기 위해, 위기로부터의 도피수단으로 선택한 신앙임을 부인하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준비와 능력이 있는 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명사들의 간증집회나 발표는 몰이성의 향연이다.
그리고 기준이 없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통상 말하는 좋은 신앙, 나쁜 신앙 중에서 후자에 빠질 위험성이 매우 크다. 대부분의 사이비종교 신자들은 위기에 대한 회피의도나 기존에 가졌던 신앙의 무의미함 속에서 간증집회나 전도행위에 영향을 받은 경향이 크다.
 
 
 
몰러가 꾸준하게 자칭 자유주의니 진보주의니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신앙의 핵심가치가 다른 이에게 어떤 유용성이 있는지 논증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들이 가진 신앙이란 아무 생각없이 믿는(소위 신학없는 신앙)자들보다 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에게는 바이러스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숙주와 전파속도, 그리고 경로의 불확실성이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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