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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마담의 실제용도
몰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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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8 09:17
기독교인의 선행 사례는 많다.
사실 기독교인들의 선행을 예로 들자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기독교인의 선행이 많은 이유는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의 폐해도 덩달아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가 일으킨 악행은 '덩달아 많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선행을 완전히 잠식하고 남는다.
더 큰 문제는 기독교인들의 인식이다.
악행을 없애고 선행을 강조하여 기독교를 정화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기독교 개혁주의자들의 논리다.
안티들은 그런 노력을 직접적으로 방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안티들은 실제로는 기독교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티들은 "기독교 악행은 기독교 선행이 아무리 강조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행을 늘이고 악행을 줄이는 노력을 하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안된 말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스스로 개혁을 한 적이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었으며, 그나마 칼비니즘이 루터니즘을 누르고 말았다.
그 이후 기독교(개신교인들은 개신교만 기독교라 하지만 안티들은 신, 구교 및 여러 종파와 이단들을 총칭합니다)는 외견상 개선되고 개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패악과 악행이 줄어든 것, 즉 기독교가 덜 사나워 진 것은, 기독교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과 계몽주의자들의 비판과 활동에 의한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의 선행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
그들은 한 때 슈바이처를 인간의 영혼을 위협하는 불순한 인간으로 치부했고, 마더테레사가 적극적인 전도를 하지 않았다면서 선행을 깍아내리고 심지어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악담하기도 했다. 또한 주기철 목사는 자신들의 치부(신사참배 동참)를 대조적으로 드러내게 하는 사람이어서 그의 목사직분 복권은 한참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비기독권에서 칭찬과 격려와 지원이 오히려 많이 나오자, 기독교계는 그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한국 기독교계가 근래에 와서 했던 작업은 주기철의 목사직분 복권과 미화였다. 그러다보니 종교적 이유에 의한 신사참배 거부가 적극적인 독립운동 수준으로 격상되는 오바질까지 나왔다. 하지만 주기철은 독립운동하고는 눈꼽만치의 관련성도 없다.
기독교계는 가끔 나오는 기독교인들의 선행을 기독교을 전파하는 수단으로만 삼고 있다. 이런 얼굴마담들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그런 선행을 하였노라고 열심히 광고질되고 있다.
세상 어디에나 선인은 나오기 마련이다. 그 선인이 기독교인일 확률은 그의 부모가 기독교인일 확률과 거의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기독교인이어서, 또 기독교리가 좋은 것이어서 선행을 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원래 선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좋은 부분만 실천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선행을 기독교리 덕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이것은 결국 버트런트 러셀의 지적, 즉 기독교인들이 종교관에 입각한 윤리관을 수립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윤리관에 부합하는 종교관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게 뭐 어떠냐고 반문을 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이거 심각한거다. 자신의 윤리관에 맞춘 종교관을 갖는 것을 합리화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더 큰 악당으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의 패악질이 모두 성서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라. 이때 기독교는 좋은데 사람이 잘못이라고 둘러대거나 애절한 항의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성경적으로"는 삯꾼 목사를 깔 수 있는 논리만 있는게 아니라 그들을 옹호할 수 있는 논리도 성서에 모두 들어있다는 점을 기독교 개혁주의자들은 간과하고 있다.
기독교리에서 불합리한 부분을 없애지 않는 한은 기독교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불합리해 보이는 부분이 바로 기독교리의 핵심이고 기독교 정체성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을 아무리 들먹여봤자 원죄론이나 종말론을 없애지 않는 한 예수는 인간말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화신 예수를 주장하려면 결국 예수의 태생과 십자가 대속 및 부활이 필요한데, 이것들은 원죄론과 종말론을 빼면 성립되지 않는다(물론 이것이 가능하다고 억지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도 있긴 하지만 그는 또다른 도그마를 제시하는 패착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것이 기독교 개혁주의의 한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기독교계는 의도가 순수하든 불순하든 간에 얼굴마담들을 잘도 써먹고 있다. 그 뒤에 도사린 기독교리의 패악, 기독교가 가진 원죄를 모르고 말이다.
아이들이 놀던 중에 신문지를 말아서 때리기를 가끔 한다. 그런데 그 중에 일부 아이는 진짜 몽둥이를 신문지로 감싸서 때리는 경우가 있다. 결국 사고가 난다. 기독교가 무서운 몽둥이를 얼굴마담들로 도배된 신문지로 감싸서 휘두르고 있는데, 안티들은 그 몽둥이를 직시하는 사람들이다. 안티들은 그 신문지를 직접적으로 탓하지 않는다. 그 신문지가 그렇게 악용되는 것을 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