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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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야훼의 속성

몰러 0 3,709 2005.06.20 18:54
야훼의 속성    
  
 
 
작성일: 2002/12/16
작성자: 몰러  
 


야훼가 가진 속성(屬性)


처음에 유대민족의 뒤만 돌봐주기로 했던 야훼는 바울에 의해 만민을 구원하기로 작정한 신으로 변모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야훼가 ‘바울에 의해 변모’했다는 표현이 맘에 안 들지 모르지만 신약에서 바울과 관련된 텍스트를 빼놓고 살펴보면 야훼는 여전히 유대민족의 신일 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은 야훼를 사랑의 신, 구원의 신, 그리고 뒤를 돌봐주는 든든한 형님 같은 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를 조금만 읽어보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야훼의 속성을 살펴보고 그것이 얼마나 DDR적인 관념인지 까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성경을 빼고는 야훼를 인식할 수 없다. 결국 야훼의 속성을 디비는 것도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다른 수단을 통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증거가 더 많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성경을 통한 고찰이 더 타당(?)할 것이다. 즉 순환논리가 될지라도 일단 인정해주고 모순을 잡아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자 방법이다.

기독교인들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가지셨는지를 아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계시, 특히 특별 계시로서의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왜 자꾸 ‘당연한’ 말을 되풀이하는가 하면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말문이 막힐 때마다 성경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우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히 야훼의 속성을 알려 준다. 물론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 비공유적 속성

비공유적 특성은 하나님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독특한 성품으로서 일명 본체적 속성이며, 이 특성에는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유일성이 있다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한다.

- 자존성(혹은 독립성) : 하나님은 당신 안에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갖고 계시므로, 무엇에 의존적인 피조물과는 달리 지적으로(롬 11:33,34), 의지적으로(단 4:35; 롬 9:18), 능력적으로(시 33:11; 115:3) 자존하신다(요 5:26).

사실 이 속성만큼은 성경 내에서 증거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스스로를 자존자로 일컫는 것은 증거나 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야훼를 창조하고는 ‘넌 스스로 생겨난 존재다’라는 인식을 심어놓았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한 자존성은 증명되지 못한다.
결국 이 속성은 외부의 증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번도 증명되지 않았다.

- 불변성 : 하나님 스스로와 그 분께 속한 그 어느 것도 결코 변함이 없다(말 3:6). 즉, 사상적 측면(시 33:2), 정서적 측면(시 103:17; 말 3:6), 활동적 측면에서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이건 성경적으로 보아 영 아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속했던 존재가 아니던가?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렇게 답답할 정도로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했는가?
변했기 때문에 그 분께 속하지 않게 되었는가? 아니면 속하지 않게 되어서 변한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 자신은? 스스로를 질투하는 존재라고 하였고, 또 후회도 자주 하셨다. 불변성을 가진 존재가 웬 후회를? 또 하나님이 선포했던 영원한 언약, 인간이 져야 할 영원한 의무들 중에서 지금까지 준수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 무한성 :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그 누구 혹은 무엇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행 17:25). 따라서 그 어떤 제한이 없이 자유로우시다. 즉, 하나님은 본질적 무한성(시 145:3), 시간적 무한성(시 102:26), 공간적 무한성(렘 23:24)을 가지시므로 만물 속에 갇혀 있는 신을 가리키는 범신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게 무한성을 가지신 분께서 만들어 놓았다는 세상을 한번 살펴 보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건 숫제 하나님이 직무유기를 자행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직무유기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악한 분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독생자 때문에 죄 없는 영아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이를 막을 만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으며, 히틀러가 ‘죄 없는, 그리고 영원한 언약의 백성’들을 가스실로 보낼 때도 그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도덕적 지탄을 받을 뿐이다. 성경을 놓고 봤을때 야훼는 무한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이러한 무한성은 그대로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 유일성(唯一性) : 하나님은 여러 신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 유일하신 절대자이시다(신 4:35; 롬 11:36).

십계명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한다. 아담은 ‘우리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타락한 아담이 ‘우리’처럼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아담을 에덴에서 내치기도 하셨다. ‘우리’라는 말이 장엄 복수니 어쩌니 해도 복수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질투하는 하나님은 절대자의 위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 공유적 속성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도 발견될 수 있는 성품으로 보편적 속성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은 지극히 불완전하나 하나님의 그것은 완전무결하다는 차이점이 있다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하고 있다.

- 영적 속성 :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합일체이지만,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볼 수 없다(딤전 6:15,16).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다음 구절들을 상징 또는 관념적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 3:6)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 33:20-23)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

순수한 영이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안 보여줘서 못 보는 것이거나, 야훼의 얼굴을 보게 되면 인간이 죽을까봐 못 보는 것이다. 어쨌든 모세는 하나님의 뒷모습이라도 봤다.

- 지성적 속성 :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고 계신다(요일 1:5).

· 하나님의 지식 - 하나님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 모두에 대하여, 즉 실제적인 것이나 추산적인 것,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것을 원형적, 직각적, 독립적, 총괄적, 불변적으로 분명히 알고 계신다(잠 15:3; 히 4:13).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저지를 것을 내다보셨다. 또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라든지 우상을 숭배할 것도 내다보셨다. 이런 불순종을 미리 막지 않으시고 인간이 일 저지르게 내버려 둔 다음 벌을 주는 악취미를 즐기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한 토끼가 새김질을 하는 것도 아시고, 박쥐가 새라는 것도 아시고, 곤충이 네 발로 기어다닌다는 것도 아시고, 족제비와 쥐와 도마뱀이 땅에 기어다닌다는 것도 아셨다. 참으로 똑똑한 하나님이시다.
그뿐이랴.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고르바쵸프는 문둥병환자이다.
“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문둥병이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발함이라”(레 13:42)

· 하나님의 지혜 -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지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지적 능력도 갖고 계신다(시 19:1-7; 고전 2:7; 엡 3:10).

세상을 만들기 전에 미리 준비하신 결과가 고작 나찌와 KKK단인가? 영원한 언약을 쌔우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당사자들인 유대인을 그렇게 배척받도록 내버려두셨다는 말인가? 또 벌만 주면 몰러 같은 넘에게 허접신이라고 욕먹을까봐 예수라는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허영심을 위해 당신의 지식을 아주 비효율적으로 사용하신 듯 하다.

· 하나님의 진실 -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진실하시므로(출 34:6), 인간에 대한 계시와 행위 또한 진실하시다(시 117:2; 신 7:9).

바로를 강퍅하게 만드시어 그가 모세의 경고를 무시하게 만드신 후 아작을 내시고, 이스라엘에 대해 삐지셔서 다윗을 부추겨 인구조사를 하게 하신 후 그걸 빌미로 백성 7만명을 아작내시고, 흠없고 정직한 욥을 가지고는 사탄과 내기를 하셨다. 이게 인간에게 진실하신 계시와 행위를 하신 건가? 오죽하면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넋두리를 하였겠는가?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 도덕적 속성

불완전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이방신의 경우와 달리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할 만큼 하등의 도덕적 결함이 없으시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음은 구약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 하나님의 거룩 - 피조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위엄적 거룩(출 3:5)과 죄와는 합치될 수 없으심을 말하는 윤리적 거룩이 있다(사 5:16; 마 5:48; 벧전 1:16).

창조주가 피조물보다 위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수긍하겠지만, 별로 옳은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은 순전히 자기 기분대로 행하는 존재가 백성을 심판하겠다는 것은 웃긴다. 한편 죄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사탄? 마귀? 그럼 사탄이나 마귀는 누가 만들었을까? 거룩했던 존재가 타락한 것이 사탄이라면 그의 타락과 인간이 죄에 오염됨을 막지 못한 창조주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으며, 사탄이 원래 그렇게 타락한 상태로 스스로 태어났다면 창조주는 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며, 이때 누군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월권행위일 뿐이다.

· 하나님의 의 - 여기에는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 원리로서의 의(사 32:1) 및 정치적 의(신 7:9)와, 또한 하나님이 그 통치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시어서 불순종한 자에게 벌을 내리게 하는 동기로서의 분배적 의(롬 2:9)가 있다.

우주가 돌아가는 현상을 관찰해 보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통치하지도 못하고 있고, 그의 정치는 어린이가 위험한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처럼 불안해 보이고, 불순종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을 보면 그다지 대범하지 못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의 선 - 선의 유일한 원천(막 10:18)으로서의 하나님은 그 뜻과 행위가 항상 선하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선에는 일반 생물에게 베풀어지는 자선(시 145:9,15,16),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사랑(마 10:31;12:12), 죄인으로서의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값없는 은혜(롬 3:24;딛 2:11)가 있다. 또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긍휼(삼하 24:14; 시 79:8; 애 3:22), 범죄를 일삼는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인내(출 34:6; 롬 9:22)등도 있다.

하나님이 선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한다면 바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선과 악을 정함에 있어서 그 기준의 근거를 살펴보자. 자신이 선한 존재가 되려면 그는 어떤 기준을 따랐을 테니 선의 원천이 될 수 없으며, 그 기준을 자신이 정했다면 자신은 선악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즉 선과 악 모두의 원천이 되므로 선한 존재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고, 또한 최고의 존재라고 하였으니 자신은 선악에 차이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 죄로 인한 고통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 인간이 죄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몰라도 미래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을 터이니 인간이 불순종하고 타락하는 것을 미리 막지 않은 것은 창조주로서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이러한 직무유기는 바로 악이며, 결국 하나님은 그리 선한 존재가 아니라 새디스트에 가까운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개미를 밟는 것처럼 인간에 대해 아무런 사랑이나 긍휼도 없이 그저 힘을 남용하는 것이다. 이런 존재를 믿고 따라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 자체가 불의인 것이다.

- 주권적 속성 : 하나님은 우주의 조성자이시므로,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 우주와 인간들을 다루실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신의 행위 방향을 결정짓는 주권적 의지(롬 9:15,16)와 실제로 그 의지를 행하게 하는 주권적 능력이 있다(창 18:14).

기독교인들은 야훼에 대하여 이것 한가지만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권적 하나님은 ‘뭐든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말이다.

- 유복적 속성 :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시므로 모든 덕의 요소를 지니시며, 자신을 아시는 절대적 사랑을 가지셨으므로, 스스로에 대하여 자충족적 기쁨이 있으시다(딤전 1:11; 6:15). 이러한 내면적 유복성이 외향적으로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은 DDR을 즐기신다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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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코멘트

신에 대한 총체적 개념은 고대 동방의 전제주의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이것은 자유인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개념이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스스로를 비하하고 그들이 비참한 죄인이라는 등 여러 가지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그것은 자존심을 가진 인간존재를 경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나는 인생을 대담하게 맞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앙이나 종교를 가져야만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모종의 비겁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비겁함은 다른 분야에서는 경멸할 만한 것이지만 종교분야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분야에서건 비겁함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마음을 말한다]

내 생각으로는 철학적 엄격성의 차원에서는 누구나 물질적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고 세계는 단지 5분 동안 존재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나는 무신론자이다. 나는 기독교 신의 존재가 올림프스의 신들이나 발할라의 신들의 존재보다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즉 어느 누구도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는 도자기 주전자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실제 생활에서 이것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신이 이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친애하는 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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