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영생관 디비기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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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8:53
기독교의 영생관 디비기
작성일: 2002/12/09
작성자: 몰러
영생에 대한 관념은 인간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을 인식하면서부터 갖게 되었을 것이며,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는데 생의 후반기를 보냈으며, 붓다는 생로병사에서 해탈하기 위한 깨달음을 얻는데 전생을 투자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기 위한 직접적인 시도는 어느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다. 결국 사람들은 영생을 관념적인 것 이상으로는 다룰 수 없게 되었다. 이 관념적 영생조차 실패한 사례가 있는데, 저승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린 동방삭은 결국 탄현(한탄강)에서 숯을 씻는 저승사자를 놀리다가 덜미를 잡혔다.
그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어떠한가? 기독교의 교리도 현세에서의 물리적인 영생이 불가능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내세를 설정하고 내세에서의 영생을 주장한다. 또한 특정한 시기에 육체도 부활하여 심판을 받으며 이때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을 결정 받는다고 한다. 다른 종교들은 죽음을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는데 비하여 기독교에서는 죽음이나 영생이 모두 신의 섭리와 인간의 귀책에 따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럼 기독교의 죽음과 영생에 대한 교리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의 생각이다.
- 육체적 죽음의 정의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요 19:50). 이때 육체는 그 기능이 정지된 채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별도의 지정된 곳으로 간다(전 12:7).
- 육체적 죽음의 필연성
원래의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었으나, 죄를 범함에 따라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시 90:7) 그 심판의 결과(롬 1:32; 5:16; 갈 3:13) 필연적인 죽음이 오게 되었다(창 2:17; 3:19; 롬 5:12,17; 6:23; 히 9:27; 약 1:15).
신학자들이 유전자에 대하여 이해를 하게 된다면 육신의 죽음 또는 수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원래 인간의 세포는 필요한 만큼 무한하게 분열/복제될 수 있었으나 불순종의 죄를 지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전자에 텔로미어를 붙이셨다. 분열을 할 때마다 텔로미어는 점점 짧아지고 어느덧 텔로미어가 고갈되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하지 않고 죽게 된다. 이것이 곡 육체적 노화요, 죽음이다.”
어느 창조과학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던 것인데, 어쨌든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 때문에 붙인 일종의 벌이라는 관념의 측면에서 보면 전통적 성경교리와 일치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사생관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다. 사람마다 각각 길이가 다른 텔로미어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 세포의 분열속도가 사람마다 틀린 것,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마다 수명이 틀린 이유를 종교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도 일찍 죽거나 오래 살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일찍 죽거나 오래 산다. 이러한 사람의 수명에는 그 사람의 종교적 덕성이나 활동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도록 수명을 수백년 정도로 부여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신학자들의 답은 다음과 같다.
(선한 사람이 불행한 짧은 삶을 영위하고, 악한 사람이 흥하여 장수하는 경우에 대한 것은 뒤에 다루기로 한다.)
- 성도가 겪는 죽음의 의미
성도는 믿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롬 5;21; 8:15,16). 그러나 성도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게 하며, 육적인 데서 떠나게 하며, 신령한 데 삶의 목적과 목표를 두게 한다.
-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는 징계이나,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연단임을 아는 성도는 자신의 한 번뿐인 인생을 봉사의 기회로 삼고(엡 5:16),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힘쓰되(딤후 4:17), 죽음에 임박해서는 두려워 말아야 한다(살전 4:13-18). 또한 성도가 믿지 않는 자들같이 단지 육적 죽음만을 가지고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며(살전 5:13-18), 오히려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바라며 상호 위로해야 한다(롬 12:15).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언급한 성서구절을 읽어보면 모두 인간수명이 5, 60년일 때를 가정한 것이고, 또한 종말과 심판이 임박했으므로 육체적 영생에 구차하게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므로 필자가 제기한 의문에는 아무런 답이 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몇 사람을 택하여 전도의 사역을 수백년의 수명과 함께 부여하면 안되는 이유가 겸손을 배우게 하고 육적인 데서 떠나 신령한 삶을 영위케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죄사함을 받은 성도가 수명이 500년쯤 되면 교만해져서 도로 타락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때 가서 곧바로 수명을 회수하면 되지 않는가? 결국 하나님은 인류 전체가 전도되어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드는 것을 그리 탐탁치않게 여기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셈인데,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 의견에 반대할 것이다.
한편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천명한 구절들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인생을 봉사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개인의 구원에 더 비중을 두고 있고, 세속에 더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도들을 이끄는데 있어서 영적으로 훨씬 우수한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당회장직을 세습하려 하는 목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교회를 값비싼 자재들로 도배를 하는데 예산을 아끼지 않는 교회는 그 존재목적이 무엇일까? 사실 이런 것들은 필자가 고민할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고민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무신경하다.
다음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이 영생할 수 있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논리들이다. 하나하나 디벼보자.
우선 기독교인들의 대전제는 다음과 같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실 인간은 영생할 존재로서 지음받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하여 영생까지 당연시한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이 조치한 것 중 하나는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기 전에도 인간은 영생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인간이 영생할 존재로 지음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인가?
기독교계가 내세우는 영생에 대한 증거(논증)는 다음과 같다.
- 역사적 논증 : 동서고금을 막론한 심오한 사상들은 인간의 영생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한다.
- 종교적 논증 : 모든 종교는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영생에 대한 집착,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이 종교와 “심오한” 사상이지, 종교와 사상이 영생을 언급하고 또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영생이 증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진정으로 심오한 사상은 죽음의 문제에 그토록 집착하지는 않는다.
- 목적론적 논증 : 인간이 지닌 재능은 이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는 완전히 개발되지 못하며 이상을 실현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못한다. 이는 내세의 필요성의 당위를 보여 준다.
- 도덕적 논증 : 이 세상에서 상벌이 완전히 시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상벌이 완전히 시행될 내세가 있음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들은 논증이 아니라 세상이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내세, 영혼, 천국과 지옥 따위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일 뿐이다. 상벌의 완전한 시행을 위해서 내세가 필요하며, 그러한 내세에는 육적인 형태가 아닌 영혼의 형태로 인간의 존재가 가능하며, 그런 영혼은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받는다는 식의 필요성 말이다. 그리고, 이 주장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엉터리로 창조하였다는 증거로밖에는 달리 사용할 길이 없다.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돌아보니 너무나 큰 불의가 존재하여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으려고 내세라는 관념으로 땜질을 하는 불쌍한 신이 바로 하나님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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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종교의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다. 특히 기독교는 죽음이나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아도 될 이유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준다. 하지만 신과 내세를 통한 독단적인 믿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용기를 필요 없는 것처럼 여기게 하고, 비굴함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며, 온정과 지식과 이성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우를 범한다.
또한 기독교는 개인적 구원교리를 강조하면서, 후손의 계속된 번식을 영생으로 보는 견해라든지, 한 인간의 업적이 후대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을 영생으로 보는 것 같은 영생관을 전면 부정한다. 이러한 부정의 결과는 위인들이 인류의 후손들을 위해 남긴 업적을 가치절하하고 믿음 외에는 모두 무가치하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격하하면서까지 영혼의 안식을 추구하려는 종교는 무가치한 자들의 노예적 도덕일 뿐이다. 우리는 후손들이 좀더 편안하고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자들이 내세우는 관념을 더 이상 놔두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의 고통이나 영혼의 행방이 아니라 인간의 상실이다. 더 이상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지 않도록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우리가 가진 모든 역량을 최선의 세상을 만드는데 쏟아 부어야 한다.